이동호 캠페인전략연구소 소장·미래한국 편집위원
사회혁명 위해 공산주의 사상 수입, 상대를 대화의 대상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아
막말 정치. 잊을 만 하면 다시 터지고 반복된다. 어제 오늘이 아니다. 도대체 막말 정치의 근원은 무엇인가? 단순히 발언 실수인가? 아니면 무심결에 내 뱉은 본심의 표현인가? 오늘 한국 정치 극한 대립의 실태를 나타내는 단어 중의 하나가 막말이다.
막말의 근원에는 상대방에 대한 인정 대신, 상대방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자리 잡고 있다. 상대가 대화의 상대라고 판단한다면 그처럼 거친 표현이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만약 상대가 분노와 증오의 대상이라면 표현은 달라진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대립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한정된 자원의 배분권’이 정치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한정된 자원에는 돈 뿐만 아니라 지위, 명예 등도 포함된다. 정치를 통해 자원이 배분될 경우 이 배분에 이익을 보는 세력과 손해를 보는 세력을 양산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배분은 없기 때문이다.
▲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386 전대협 세대가 현재 우리나라 야당의 주류를 형성하며 대화가 아닌 분노와 증오의 정치를 전개하고 있다. 사진은 전대협 출범식 장면. |
오늘날 우리가 채택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가 복수정당제, 선거와 다수결 등을 중시하는 이유는 대립을 포함하고 있는 정치의 본질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복수의 정당이 자신의 자원 배분에 대한 원칙과 내용을 정책이라는 명칭으로 포장하여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선거를 통해 심판을 받는 것이다.
선거를 통해 승리한 정당은 자신들의 정책을 실행하고, 그 결과를 다시 선거로 심판받는다. 패배한 정당은 자신들이 국민 다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원인을 반성하고 다시금 변화 발전된 자신들의 정책에 대한 지지를 호소해 정권 교체를 실현한다.
자유민주주의의 요체는 ‘선거’와 ‘결과에 대한 승복’이다. 선거에 승리한 집권세력의 밀월기간이 존재하는 것은 승리한 정당이 자신의 정책을 실현하고 그 평가를 받을 시간을 주려는 사려 깊은 배려다. 이런 선순환 과정을 통해 정치가 발전하고 국민들의 삶의 질이 개선되는 것이다.
극한 대립의 정치, 그 뿌리는 전대협
오늘날 한국 정치의 행태, 특히 야당의 행태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극한 대립의 정치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도 여야(與野)의 대립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타협도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현재 야당의 막말과 극한 대립 그 어디에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찾아보기 어렵다.
당연히 이들에게서 선거 결과에 대한 승복은 찾아보기 힘들다. 선거에 패배한 다음날부터 극한 투쟁이 시작된다. 자신들의 선거 패배는 우매한 백성들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다. 자신들이 너무나 옳고 정당하기 때문에 우매한 백성들의 선택 따위는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모한 자기 확신과, 그것에 기인한 잘못된 행태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들의 극한 대립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상대방이 나와 대화의 대상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 극복의 대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야당의 주류는 소위 386 운동권이다. 다시 말하면 전대협 세대들이 한국 야당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전대협, 즉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는 1987년 건설된 전국 대학 총학생회 협의체다.
1987년 7월 5일 연세대 재학생이던 이한열 씨가 시위 도중 사망하자 장례 절차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전대협 결성이 합의되었다. 같은 해 8월 19일 충남대에서 전국 95개 대학 4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기 전대협이 발족되었다.
당시 전대협은 학생운동사상 최대의 조직으로서 각 대학 총학생회장이 대의원이 되는 협의체였다. 전대협은 발족 선언문에서 군부 독재정권과 제국주의자의 타도를 선언하고, 활동 방향으로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 외세 배격, 독재 종식, 평화통일에 기여, 민중과의 연대, 학원 자율화 등을 천명했다.
사회혁명 위해 공산주의 사상 본격 수입
당시 전대협을 이끌던 인물들이 정치에 투신하여 야당(새정치민주연합)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들의 잘못된 인식이 오늘 한국 정치를 망치고 있다. 이들이 사사건건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와 가치에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정치가 한국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대협의 사상과 가치를 정밀 복기하면 이들의 정치 행태에 대해서 많은 정보와 자료를 얻을 수 있다.
1980년대 학생운동의 특징은 사회혁명을 위해 공산주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수입한 것이다. 공산주의 사상은 혁명을 위한 철학이다. 마르크스는 혁명의 동력을 어디서 가져올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인간 본성의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분노와 증오를 발견했다.
생물 중 가장 고등한 인간의 대립은 곧 살육이다. 인간과 인간의 대립은 곧 공멸, 멸망을 의미했다. 따라서 인간은 수 만 년 발전해오는 과정에서 분오와 증오를 조절하고 억제하는 훈련을 해왔다.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 존재하는 예의범절과 도덕 등으로 축약되어 있다.
분노와 증오를 억제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혁명을 위해 인간의 분노와 증오를 끌어냈다. 가진 자, 자본가 계급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사회혁명의 동력으로 삼은 것이다.
공산주의 사상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기둥은 계급투쟁론과 역사적 유물론이다. 그중 계급투쟁론이야말로 공산주의 혁명이론의 핵심이다. 또 분노와 증오의 철학의 핵심이다. 공산주의자들의 설명을 들어보자.
발전된 새로운 생산력과 구태의연한 낡은 생산관계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갈등은 생산력의 발전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근로자 계급과, 과거의 생산관계를 유지하는 데 이해관계를 가지는 지배계급 사이의 대립으로 전환된다. 그것이 계급의식에 반영되어 근로자 계급과 지배계급 사이의 계급투쟁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낡은 생산관계를 새로운 생산관계로 교체해야 할 사회혁명 과업이 제기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생산력 발전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근로자 계급이 낡은 생산관계를 유지하려 하는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새로운 생산관계로 교체함으로써 사회혁명은 승리하게 된다. 공산주의는 이런 계급투쟁을 사회발전의 동력으로 보았다.
계급투쟁론이야말로 분노와 증오의 정점이다. 노동자들은 생산력 발전의 담지자다. 사회 발전은 이들의 손에 있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지고의 선(善) 그 자체다. 반면에 자본가들은 악(惡)이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이해를 위해 사회 발전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가를 타도하는 것은 사회 발전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이 된다. 공산주의가 ‘계급의 적’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아무 제약 없이 표출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전대협 회칙에 숨어 있는 비밀
한국 정치의 극한 대립에는 전대협 세대들이 도입한 공산주의 사상에 그 근원이 있다. 이들은 공산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1986년부터 본격적으로 김일성주의를 수입하고 북한 공산당의 지도적 지위를 인정했다.
전대협을 배후에서 지도했던 ‘반미청년회’ 조혁의 고백을 들어보자. 조혁은 1987년 대선(大選) 투쟁에서 학생운동에 김대중(DJ)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을 제기했다. 당시 다수의 대학이 이 노선에 따랐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이에 대해 조혁은 자신이 발행했던 기관지에 자기비판의 글을 게재했다.
“나는 노태우 집권을 방조한 운동가로서의 책임을 통감하고 한국민족민주전선이 지령한 노태우 집권 저지와 단독 올림픽을 저지하는 투쟁에 나의 모든 노력과 재산과 생명까지라도 다 바쳐 싸울 것을 결의합니다. 나로 인해 화합과 대타협의 국면이 조성되었으므로 이젠 다시 대결과 투쟁의 국면을 유지하도록 혼신의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조혁의 글에서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한다. 하나는 북한의 대남(對南) 혁명기구인 ‘한국민족민주전선’의 지령을 언급하고 있다. 자신의 활동이 북한의 지령을 수용한 결과라는 뜻이며, 이는 한국 학생운동에 대한 북한의 지도적 위치를 스스로 표출한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화합과 대타협이 아니라 대결과 투쟁 국면으로 전환시키겠다고 선언했다. 분노와 증오의 구체적 행태가 대결과 투쟁이다. 그는 화합과 대타협 국면이 조성된 것에 알레르기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공산주의 사상의 구체적 표현이다.
전대협 회칙을 살펴보자.
“전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 회칙 초안
1. 명칭: 본회의 명칭은 전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이하 전대협)라고 한다.
2. 목적: 전대협은 전국 백만 학도의 단결과 통일을 기하며, 민주적 학생자치활동의 적극 옹호 및 보장과 분단된 조국의 자주·민주·통일의 실현에 기여한다.
1) 외세의 배격과 독재의 종식을 위하여 완전한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을 위해 헌신한다.
2) 민족과 민중에 근거한 진보적 민주주의의 구현에 기여한다.”
전대협은 대중조직이다. 따라서 배후조직이나 비밀조직에서와 같이 노골적인 표현은 없다. 그러나 그 단초들은 곳곳에 존재한다. 회칙에서 전대협은 ‘자주·민주·통일’의 실현에 기여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북한이 정식화한 대남혁명의 3대 투쟁 과제인 반미 자주화 투쟁, 반독재 민주화 투쟁, 조국통일 촉진 투쟁을 말하는 것이다.
더 있다. 2조 2항의 민족과 민중에 근거한 진보적 민주주의 구현에 기여한다는 표현이다. 어디선 본 적이 있지 않은가. 바로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 선고를 받은 ‘통합진보당’의 강령에 있는 내용이 ‘진보적 민주주의’다. 통진당 간부는 자신들의 내부 모임에서 “ ‘진보적 민주주의’는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한 헌재의 판결을 인용해 보자.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우리나라를 미국과 외세에 예속된 천민적 자본주의 또는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로 인식하고 있고,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자본가 계급의 정권으로서 자본가 내지 특권적 지배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민중을 착취 수탈하고 민중의 주권을 실질적으로 강탈한 구조적 불평등 사회로 인식하고 있다.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이러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민중이 주권을 가지는 민중민주주의 사회로 전환하여야 하는데 민족해방문제가 선결과제이므로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사회주의로 안정적으로 이행하기 위한 과도기 정부로서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를 설정하였다. 한편,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연방제 통일을 추구하고 있는데, 낮은 단계 연방제 통일 이후 추진할 통일국가의 모습은 과도기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를 거친 사회주의 체제이다.…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폭력에 의하여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이를 기초로 통일을 통하여 최종적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북한을 추종하고 있고 그들이 주장하는 진보적 민주주의는 북한의 대남혁명전략과 거의 모든 점에서 전체적으로 같거나 매우 유사하다.”
헌재의 판결은 분명하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북한의 대남 혁명전략과 같다는 것이다. 진보적 민주주의가 북한으로부터 수입된 것이라는 뜻이다.
전대협은 회칙에 자신들의 목적이 진보적 민주주의라고 쓰고 있다. 대한민국이 미국에 예속된 사회이며, 자본가들의 착취가 일상화된 사회라는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구체적 표현이다. 혁명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혁명을 위해 대결과 투쟁의 일상화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상대가 자본가 계급, 지배계급이라면 타도와 극복의 대상이다. 여기에 대화와 타협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전대협 주역들은 성장하여 오늘 대한민국의 정치 주역이 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야당의 주류가 되었다. 이들이 아직도 학생 시절에 가졌던 대립과 투쟁의 사상에 머물러 있다면 한국 사회의 앞날이 암울하다. 이제 그들은 한국 사회를 주도하는 리더들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의 극한 대립의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분노와 증오의 사상을 걷어내야 한다. 극한의 정치적 대립이 한국 사회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대한민국이 보다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이의 극복이 시급한 이유다.
운동권은 답하라
과거 386 핵심 지도그룹과 숱한 좌파 지식인들은 이제 답해야 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미 제국주의의 수탈에 의해 이미 망하거나 역사 속에서 사라졌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우리 사회는 발전했고, 대한민국의 성장을 이 지구상에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있는 이 현실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이 그토록 추종했던 사회주의 나라의 본류인 소련은 이미 망했고, 북한은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가장 실패한 나라라는 이 모순된 현실에 솔직해야 한다.
나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 이들이 아직도 과거의 생각에 머물러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최소한 그렇게 믿고 싶다. 그렇다면 이제 솔직해져야 한다. 우리 사회의 주류로 등장한 386 핵심 지도부는 과거 그들의 주장에 대해 현재 그들은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 만일 바뀌었다면 어떻게 바뀌었는지 등에 대해 밝혀야 한다.
그것이 과거 그들의 말과 행동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도리다. 또한 우리 사회를 이끌고 있는 사람으로서 의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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