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민주주의는 데모크라시(democracy)가 아닌 ‘대중격돌’의 데모크래쉬(democrash), 혹은 떼거리정치의 오클로크라시(ochlocracy). 그렇기에 소유와 자유, 덕성과 책임의 시민 개념은 사라지고 1인 1표를 가진 평등한 국민만이 존재한다
“무기를 들어라, 시민들이여. 너희의 군대를 만들어라. 나아가자, 나아가자. 더러운 피를 물처럼 흐르게 하자!”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 가사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 궁에서 전국 신분회가 소집되었다. 루이 16세는 전국 신분회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회의장을 봉쇄했지만, 평민 대표들은 테니스 코트에 모여 스스로 국민의 대표 기관임을 선언했다. 그렇게 해서 프랑스 혁명의 시민정부가 탄생했다.
당시 혁명정부는 행정과 입법, 사법권을 모두 갖고 있었다. 포퓰리즘이 난무했다. 빵과 우유가격이 오르면 법으로 그 가격을 정했고, 위반하면 반(反)혁명분자로 몰아 처형했다. 증오와 선동은 혁명정치의 핵심이었지만 그것은 ‘이성의 힘’으로 포장됐다. 민중이 원하면 그것이 곧 법이었다.
▲ 국회는 민생법안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포퓰리즘 악법을 양산하고 있다.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발의해 시장경제를 '사회적경제'로 대체하겠다는 사회적 경제법이 대표적이다. |
공화정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걸고 공포 정치를 시행했다. ‘혁명의 적(敵)’으로 간주된 사람들은 처단되었다. 1년 만에 50만 명이 투옥되고 3만5000명이 처형당했다. 혁명은 혼란에 빠졌다. 혁명은 지킬 수 있었지만, 자유와 평등의 이상은 빛이 바래 갔다.
결국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의해 시민정부는 막을 내렸다. 나폴레옹이 파리에 입성했던 날, 파리 시민들은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연도에 나와 열렬하게 나폴레옹을 환영했다. 나폴레옹은 황제에 올랐고 프랑스는 안정과 번영의 황금기를 맞았다.
의회 민주주의가 만들어낸 히틀러와 나치
프랑스 혁명은 국민의 뜻을 내세운 민주주의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수권법(授權法)을 통해 민주주의 다수결로 독일 바이마르 헌법을 무력화 시키고 독재 권력을 확보한 히틀러의 국민사회당(Nazzi)도 합법적이었다. 의회 민주주의가 어떻게 독재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보여줬다. 그렇게 해서 ‘국회 독재’(elective despotism)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국회 독재’라는 말은 미국의 독립선언서와 헌법과 함께 미국 정치의 3대 문건으로 꼽히는 <연방주의자 논고>(Federalist Papers) 제48번에 나온다. 이것은 미국 헌법의 아버지 제임스 메디슨이 쓴 개념으로서, ‘3권 분립체제’ 하에서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무너지고 미국 의회로 권력이 집중되는 정치 체제의 타락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되었다.
메디슨은 미국 헌법을 만들면서 ‘국회 독재’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을 예상하고,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자제력을 발휘하여 헌정 질서를 유지해 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한 국회 독재 현상은 대한민국에서도 목격된다. 지난 6월 1일, 박근혜 대통령이 정부 시행령에 대한 국회의 수정·변경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권 행사를 시사하며 ‘위헌(違憲) 논란’을 제기했다. 야당은 “입법부와의 전쟁 선포”라며 강력 반발했다.
세월호법 시행령 개정 문제로 촉발된 이번 사안이 입법부와 행정부 간 본질적인 3권 분립 문제에 대한 정치권의 대논쟁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정부의 시행령까지 국회가 번번이 수정을 요구하게 되면 국정은 결과적으로 마비 상태가 되고 정부는 무기력화 될 것”라며 “이번 국회법 개정안은 정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수용불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아울러 “이번 공무원 연금법안 처리 과정에서 공무원 연금과 관계없는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문제를 연계시켜 위헌 논란을 가져오는 국회법까지 개정했는데 이것은 정부 기능이 마비될 우려가 있어서 걱정이 크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과거 국회에서도 이번 개정안과 동일한 내용의 국회법 개정에 대해 위헌 소지가 높다는 이유로 통과되지 않은 전례가 있는데, 이것은 국회 스스로가 이번 개정안이 위헌 소지가 높다는 점을 인식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 대통령의 이런 입장은 국회가 상호 주고받기 식의 법안 거래를 통해 포퓰리즘 입법을 양산하고, 이를 견제하려는 행정부마저 무력화하려는 현실을 비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민의(民意)의 전당’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러한 의회의 월권(越權) 경향은 강력하게 견제되지 않으면 의회 독재로 가게 된다. 여기에는 민주주의라면 마치 무제한의 권력을 양도해도 괜찮다는 민주주의 숭배론이 작동한다.
무제한의 폭식 권력자, 국회의원
민주주의 대의제는 의회를 통해 민의를 달성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대의제란 언제나 주인-대리인 문제(Agent problem)라는, 즉 대리인도 실은 주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일한다는 선천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국회의원들은 자신의 당선과 국익(國益)이 충돌할 때 당선을 포기하기 어렵다.
그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누구든 자신을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민주주의 선진국에서는 의회 권력의 타락을 막기 위한 제도를 가지고 있다.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과 위헌법률 심판, 그리고 입법부와 행정부 간의 권한쟁의 심판과 같은 제도들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회는 이러한 권력 견제에도 불구하고 포퓰리즘적 법안을 양산해 왔다. 이 문제에 대해 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부 교수는 국회의원 직을 “책임은 없고 권한만 있는 자리”라고 비판한다. 김인영 교수의 진단이다.
“국회가 조폭(組暴)집단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폐쇄 소집단 공동체 의식을 가졌다는데 문제가 있다. 본인들의 어떤 실수와 행동에 대해 소속 정당의 보호와 동료 의원의 명시적·암묵적 비호를 든든한 배경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다.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행정부와 사법부, 시민 등 외부세력의 견제가 작동하지 않는 구조가 철옹성처럼 작동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런 문제를 고백하는 국회의원도 있었다.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은 2014년 10월 31일 대정부 질문에서 국회의원이 가진 특권의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우리 사회에서 무노동 무임금이 적용되지 않는 유일한 집단, 주요 20개국(G20) 중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법을 안 지키는 유일한 나라, 선거제도가 정착된 나라 중 단식투쟁을 하는 국회의원이 있는 유일한 나라, 만일 국회와 국회의원이 국정감사, 국정조사, 청문회를 받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인사청문회 자료처럼 국회의원의 의정활동 관련 자료들이 공개되면 국민 여론의 뭇매를 맞을지도 모른다.”
현직 국회의원의 통렬한 자기 비판 목소리는 오늘 대한민국 국회의 현주소를 말해준다. 이런 문제로 피해를 입는 자는 다름 아닌 그들을 뽑아준 국민들이다. 실제로 국회는 민생법안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반(反)시장적 포퓰리즘 입법을 양산해 왔다.
특히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주도로 발의됐던 ‘사회적 경제법’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 법안은 과거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개념에서 아예 시장을 빼버렸다.
한국 국회의원의 성향: 反시장적, 시장적대적, 포퓰리즘…
이 법의 목적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사회적 경제’로 대체하겠다는 오만과 독선을 보여준다. 사회적 경제법의 취지문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 실패했다’라는 표현은 나치가 파쇼 정당을 수립할 때 내세웠던 아젠다였다. 나치는 제3의 길로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오로지 나치가 주도하는 경제질서를 내세웠다. 그런 포퓰리즘을 새누리당이 주도한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넘어 공포심을 자아낸다.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은 이를 ‘오만과 독선’이라고 표현한다. 한마디로 국회의원들의 지적(知的) 오만이 대중영합주의와 결탁해 반(反)시장경제로 나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자유경제원이 조사한 국회의원들의 입법 성향을 잠시 살펴보자.
자유경제원은 17대 국회부터 시장친화성 평가를 하고 있다. 19대 국회 개원(2012년 5월 30일)부터 2013년 4월 30일까지 1년 간 국회에서 총 370여 건의 의안들이 가결되었는데, 이 중 시장 및 기업과 관련 있는 법안은 104건이었다.
이를 검토한 결과 45개 중요 의안이 시장친화적인가 반시장적인가를 시장친화지수로 평점해 보면, 시징친화적 의안은 16개(35.6%)인 반면, 시장적대적 의안은 29개(64.4%)나 되었다. 19대 국회의 시장친화지수는 31.1로, ‘매우 시장적대적’(시장 좌파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정당별 시장친화지수를 보면 새누리당이 36.6으로 다른 정당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높지만, ‘매우 반(反)시장적’ 성향을 겨우 면하고 있는 상태다.
이렇듯 한국 국회의원들이 반(反)시장적, 또는 시장적대적 성향을 노정하게 되면 한국 경제의 앞날은 어둡다. 이미 그리스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그리스가 디폴트(default·채무 불이행)로 가게 된 배경에는 경제활동을 하는 국민 4명 중 1명이 공무원이라는 사실이 있다.
그리스는 1980년대 좌파 정당이 득세한 후 반시장경제적 입법을 양산했다. 그 결과 포퓰리즘에 의한 공공재정의 천문학적 지출이 일어나 2013년 GDP 대비 국가부채비율은 독일의 2배인 약 160%선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은 당연하게도 부정과 부패를 불러온다. GDP의 8%에 달하는 그리스의 부가가치가 부패로 인해 해외로 유출되고 있다는 지적은 남의 일같이 들리지 않는다.
결국 그리스의 좌파 포퓰리즘은 개혁이 아니라 더 좌경적인 정당의 득세를 불러왔고, 극좌 모험주의 시리자(Syriza·반자본주의, 사회주의, 세속주의 급진좌파연합) 정권의 등극을 불러왔다. 그 결과는 국가 파산이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실제 민주주의 개념과 맞는가?
이제 국회 권력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 요청된다. 1987년 민주화의 경험은 행정부를 독재 권력의 발원지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대통령의 권력은 무소불위하고 권위주의적이어서 이를 국회가 견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1987년 민주화 이후 보편적인 정치 상식으로 등장했다.
따라서 국회에는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입법 권력이 필요하고, 특히 행정부를 감시하는 국정감사와 인사청문회, 국정조사는 ‘정의’의 다른 이름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국회가 보여주는 인사청문회와 국정감사는 그야말로 양보 없는 정쟁(政爭)의 수단이 되어버렸다. 국회의원들은 인사청문회와 국정감사 그 자체보다 언론에 자신을 부각시키는 기회로 삼고 있다는 평가가 차라리 일반적이다. 사례를 보자.
2014년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은 주어진 8분의 시간을 거의 전부 질의로 소진하여 증인이 답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8분의 시간 중 의원들은 평균 6.08분을 질의했고, 증인에게 주어진 답변 시간은 겨우 1.52분에 불과했다.
최원식 새정치민주연합(새민련) 의원은 증인의 답변 시간이 1분도 채 안 됐다. 의원들이 주어진 시간을 넘겨가면서 질의만 하고 끝내는 경우, 또 답변 들을 시간이 부족하여 서면 답변을 요구하는 것은 국정감사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한마디로 의원들이 ‘자기들 할 말만 하는’ 것이다.
국정감사에서 호통 치기와 억지, 답변 기회 박탈, 허위사실 주장 등은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에 의해 볼썽사나운 장면들을 연출한다. 더 가관인 것은 바쁜 기업인들을 국정감사에 불러낼 때 마치 대역죄라도 신문할 듯한 기세로 증인 신청을 하지만, 막상 국정감사에서는 자기 주장을 열변하거나 호통 치기로 끝난다는 점이다.
인사청문회가 정치 막말 쇼로 변질된 것은 더 이상 언급할 가치도 없다. 왜 1987년 민주화로 쟁취해 낸 민의의 전당은 이렇게 타락했을까. 이 질문은 차라리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실제로 민주주의의 개념과 맞는지 살펴 볼 것을 요구한다.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민주(民主)를 ‘국민이 주인인 정치’로 교육받고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데모크라시(democracy)라는 어원에는 그 어디에도 국민이 주인이라는 개념은 없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생각은 국가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근대적 국가개념일 뿐이다. 데모크라시는 아테네 시민들(demos)이 동등하게 국가의 의사결정에 참여한다(krat)는 뜻이다. 근대 민주주의 개념 또한 ‘시민(市民)의 정치 참여’였고, 이때 시민이란 덕성과 책임을 가진 납세자였다.
이러한 민주주의가 주인과 백성의 대립 개념으로 번역된 것은 17세기 일본 메이지(明治)유신 학자들이 democracy를 부정적인 관점에서 해석했기 때문이다. 당시 메이지유신의 아젠다는 존왕양이(尊王讓夷), 즉 천황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만세일계(萬世一系) 천황의 권위가 중요한 상황에서 신분에 관계없이 국정에 참여한다는 서구의 democracy는 반(反)천황적 개념이었다. 따라서 민주라는 개념에 경계심리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중우(衆愚)정치가 낳은 괴물
이런 메이지유신 학자들의 생각은 민주주의의 타락을 우려했던 플라톤에게도 있었다. 그는 민주주의가 타락하면 중우(衆愚)정치(ochlocracy)가 된다고 봤다. ochlo라는 그리스어는 ‘떼거리’라는 의미다. 이런 ‘떼거리 정치’는 ‘떼법’을 만들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서구 근대민주주의는 이런 떼거리 정치를 방지하기 위해 세금을 납부하는 시민들에게만 참정권을 허락했다.
17세기 근대민주주의의 성립은 소유(property)와 자유(liberty)라는 두 개의 바탕 개념 없이는 등장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다시 말해 ‘소유권적 자유’, 즉 사유재산에 대한 근본적인 탐색이 없다면 우리는 서구 근대 민주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 민주주의는 그런 정신보다는 평등주의에 경도되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민주주의와 민중주의 간에 변별력을 잃어버린 상태가 되었다는 진단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혹시 데모크라시(democracy)가 아닌 ‘대중격돌’의 데모크래쉬(democrash)나 떼거리정치의 오클로크라시(ochlocracy) 아닌가. 우리는 실제로 민주주의를 민중주의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기에 소유와 자유, 덕성과 책임의 시민 개념은 없고 1인 1표를 가진 평등한 국민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반성적 성찰이 오늘 대한민국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 투사해 봐야 한다.
그렇게 등장한 국회라면 괴물은 우리가 만든 것이다. 비(非)민주적이고 오만하며 몰상식한 국회의원들의 면면은 다름 아닌 우리의 내면이 아닌가. 전라도라서, 경상도라서 주도력을 가져야 한다는 우리의 생각을 그들이 실행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모두가 평등하게 살고, 부자는 단죄(斷罪)되어야 한다는 우리의 생각을 그들이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결국 우리가 원하기에 국회의원들은 그렇게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정치 수요가 우리 안에 있기에 그들은 그런 정치를 공급하고 표를 받아가는 것 아닌가. 이런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국회의원들의 문제는 우리가 만들고 있고, 유권자인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그들이 변할 리도 없다는 생각은 오늘 대한민국 국회의 독선과 오만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한다. 한 나라의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는 말은 국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렇기에 정치개혁 이전에 우리는 국민 의식개혁이 앞서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지난 1987년 민주화는 우리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는 통렬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민중이, 계급이, 노동자가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민주주의는 아니었는가 말이다.
그것은 플라톤이 말한 ‘떼거리’의 다른 이름이다. 집단과 계급에는 양심과 덕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어떤 민주적 아젠다를 내세워도 개인의 자유와 소유를 전제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타락한다는 사실은 이미 프랑스 혁명이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민주주의는 의회정치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강력한 행정부의 권력으로도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사법부의 법치로만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오로지 개인의 자유와 책임, 그리고 덕성을 가진 시민의식으로만 성립하고 유지되며 보장된다.
대한민국에서 본격적인 ‘시민정신’을 교육하고 전개해 나가야 할 때가 되었다. 시민 없는 민주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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