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세동점(西勢東漸)이 쇄국 조선의 문을 두드린 수단은 선교와 통상이었다.
공통점은 이 둘 앞에는 국경이 없다는 것이다. 선교는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파하는 것이 사명이고, 통상은 상품을 지구상 어디든지 매매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 두 가지 수단을 꿰뚫어본 사람이 이승만이다.
“당초에 미국이 동양 각국과 통섭을 시작할 때에 두 가지 목적이 있으니 일은 통상이오 일은 선교라.”
그의 <독립정신>의 기초는 기독교 선교이고 그의 학위논문 <미국 영향 하의 중립>의 주제는 국제통상이다. 문필로만 그친 것이 아니다. 이승만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국제통상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두 가지를 합하여 자신의 정치경제사상을 만들고 자신의 외교독립방략의 기초로 삼았다. 여기서는 기독교 선교에 대한 그의 통찰력을 기술하겠다.
그의 독립정신에 기독교가 얼마나 중요한가는 초기 저서 <독립정신>을 기독교의 강조로 마무리 지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것(기독교)이 곧 지금 세계상 상등 문명국의 우등 문명한 사람들이 인류 사회의 근본을 삼아 나라와 백성이 일체로 높은 도덕지위에 이름이라. 지금 우리나라가 쓰러진 데서 일어나려 하며 썩은 데서 싹이 나고자 할진대, 이 교로써 근본을 삼지 않고는 세계와 상통하여도 참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오,
신학문을 힘써도 그 효력을 얻지 못할 것이오, 외교를 힘써도 깊은 정의를 맺지 못할 것이오, 국권을 중히 여겨도 참 동등 지위에 이르지 못할 것이오, 의리를 숭상하여도 한 결 같을 수 없을 것이오, 자유 권리를 중히 하려도 평균한 방한을 알지 못할지라.”
알렌이 일으킨 기적
뒤집어 풀이하면 기독교를 반석삼아 독립요지의 6대 강령인 통상, 교육, 외교, 국권, 자유, 의리를 실천하면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이승만은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나라를 일심으로 받들어 영·미 각국과 동등이 되게 하며, 이후 천국에 가서 다 같이 만납시다”라고 썼다. 말하자면 그는 독립 요지의 전도사다.
한국에 천주교가 도래한 것은 이승훈이 베이징(北京)에서 세례를 받은 1784년이다. 그 후 100년 동안 여러 차례의 박해를 받고 수많은 순교자를 양산했으나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지를 않았다. 1884년 개신교 의료선교사 알렌이 미국 공사관 의사로 입국했다.
그해 갑신정변이 일어나서 여러 사람이 죽고, 이 와중에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27군데 자상(刺傷)을 입어 빈사 상태에 이르렀다. 알렌이 서양 외과 기술로 그를 살렸다. 고종과 민비의 신임을 얻어 의학교와 병원을 개원함으로써 개신교 선교의 첫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개신교 역사에서 기적에 해당한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때 그 지점에 있는 사람(알렌)이 그 상황(갑신정변)의 필요에 능히, 그리고 적절히 대처할 수 있었던 기민과 능력, 그리고 결단의 사람에서입니다. 만일에 그때 거기서 있었던 사람이 그만한 능력이 없었고 그 고관(민영익)을 치료할 수 없었다면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이렇게 해서 처음부터 선교사들은 이 백성의 상이나 하에서 존경을 받게 되었던 것이며 그들의 메시지(복음)는 다들 경청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많은 개신교 선교사가 입국했다.
“이러한 기회가 주어졌을 때 왕실의 후원 아래 병원을 확보한 알렌의 지혜와 그로 말미암아 선교본부가 계속 의료 선교사를 파송하게끔 만든 지혜야말로 이 나라를 계속해서 복음의 문을 활짝 열게 만들었다. 이 조그마한 쐐기가 튼튼하게 박히지 않았더라면 이(기독교)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을 때 많은 관리들이 다시 (복음의) 문을 닫았을 것이다.”
알렌의 뒤를 이어 1885년 부활절에 복음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발을 내디뎠다. 언더우드는 연희대학교를, 아펜젤러는 배재학교를 창설한다. 그 후 1893년에 알렌의 병원을 인수한 사람이 토론토의과대학의 외과 교수 올리버 에비슨 박사다. 그가 이 병원을 오늘날 세브란스 병원과 의과대학으로 발전시켰다.
이승만은 선교사들이 아끼는 제자가 되었다. 말하자면 이승만은 알렌이 일으킨 한국 개신교선교 기적의 첫 번째 열매가 되었다. 그도 처음에는 선교사들을 의심했다.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하기 시작한 직후 우리 한국인은 어떻게 선교사들이 하와이 군도에 가서 원주민들을 다수 기독교로 개종시켰는지를 알았다. 이 고장에서 하와이 여왕이 폐위되었음을 알았다. 따라서 우리 한국인은 당연히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똑같은 운명이 계획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선교사들과 접촉하면서 선교와 통상에서 평화적 공생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조선이 아직까지 부지하여 온 것은 다 외국인들의 교제상 서로 관계한 형편에 달려 된 것이라. 만일 지금껏 통상이 아니 되었다면 어떤 강한 나라가 무슨 욕심을 부렸을는지 알 수 없을지니 오늘날 이 뜻을 깨쳐본 즉 전일에 까닭 없이 남(외국인)을 의심하던 것이 어찌 어리석지 않으리오.”
아펜젤러가 선교 도중 목포 앞바다에서 사망하자 수감 중이던 이승만은 사흘을 울었다.
이승만, 사형 선고 받고 기독교로 개종
이승만은 거의 매일 에비슨의 병원에 찾아가서 영어와 서양 문물을 배웠다. 특히 서양의 기독교 자유주의를 배웠다. 후일 이승만은 회고했다.
“에비슨 박사는 그가 이 땅에 전한 기독교 정신으로부터 오는 자유주의 사상의 상징으로써 본 대통령(이승만)의 신실한 친구였으며, 또 본 대통령의 청년 시기에 기독교적 민주주의의 새 사상을 호흡케 했다.”
이승만이 국사범(國事犯)으로 한성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콜레라가 돌았다. 많은 동료 죄수들이 쓰러졌다. 이승만은 에비슨 박사가 차입한 약으로 자신의 몸보다 환자들을 돌보았다. 마침내 그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사형 선고의 불안 속에서 떨던 25세 때였다. 그는 문득 배재학당에서 들었던 성경 문구가 떠올랐다.
“네가 너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너를 용서하실 것이다.”
순간 그는 “오 하나님! 내 영혼과 내 나라를 구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올렸다. 어머니의 불교를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한 그가 개종한 순간이다. 그 결과 그는 감옥에서 거듭나서 옥중 죄수들을 개종시키는 데 힘썼다. 그들과 옥중에서 성경 연구를 했다. 이때 개종한 대표적인 인물이 이상재다.
이상재는 전형적인 유교 선비였다. 대한제국의 외교관으로 주미 한국공사관의 서기관을 지낸 인물이다. 이처럼 이승만에 의해 한국 개신교 역사상 최초로 40명의 양반 출신 관료와 지식인이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들은 출옥한 후 대거 황성기독청년회관(서울YMCA)에서 중요한 선교사업에 종사하며 많은 청소년들을 기독교 앞으로 이끌었다. 앞서 인용한 “이(기독교)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을 때 많은 관리들이 다시 (복음의) 문을 닫았을 것이다”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승만에 의한 감옥 전도의 의의가 되살아난다.
(추기: 이 글의 인용문의 출처는 마지막 회에서 제시된다.
김학은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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