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원조로 경제 발전한 것은 잘한 일. 이제 정부가 피해자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달라”
[편집자 주] 본지는 지난 498호(5월 13일자) 기사 ‘정대협을 움직이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 정부의 대일(對日) 외교정책이 ‘위안부 문제와 관련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법적 배상’이라는 정대협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정대협의 주요 임원 및 측근의 활동을 분석함으로써 이 단체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인권을 위한 시민단체라기보다는 ‘정치운동 단체로서의 성향을 보인다’는 문제제기를 했다.
이와 관련한 후속 보도를 위해 본지는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 아닌, 실제 당사자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취재했다. 이를 위해 피해 당사자로서 일본의 과오를 알리기 위해 국내외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용수 할머니를 만나 심경을 들었다.
▲ 88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이용수 할머니. 이용수 할머니는 한일관계의 미래를 위해 감정을 자제해야 한다고 말했다./사진 정재욱 미래한국 기자 |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을 했던 지난 4월 29일(현지 시각) 미국 국회의사당 내 청중들 한 편에서는 아베 총리를 쏘아보는 백발의 할머니가 있었다.
2007년 미 하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을 때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와 일본군의 만행을 알렸던 이용수 할머니다. 이용수 할머니는 아베 총리의 방미(訪美) 일정을 따라 보스턴의 하버드대, 샌프란시스코, LA를 방문해 침묵시위를 벌이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총리의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6월 10일 대구 자택에서 만난 이용수 할머니는 올해 88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정했다. 먼저 이용수 할머니에게 아베 일본 총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물었다. 할머니는 “아베는 비겁하다”고 말문을 열었다.
“난 위안부가 아니라 이용수예요. 일본이 날 위안부로 만든 겁니다. 아베는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갔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나요? 아베가 눈이 멀었는지, 귀가 먹었는지 직접 보고, 또 역사의 산 증인인 내가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미국에서 아베를 줄곧 따라 다녔어요.”
아베 일본 총리는 지난 2012년 12월 취임 이후 ‘위안부의 강제 연행에 대한 증거가 없다’(2014년 4월 17일 <타임> 인터뷰), ‘(위안부는) 인신매매의 피해자’(2015년 5월 27일 하버드대 강연)라면서 위안부 동원에 군 개입이나 강제성이 없었다고 발언했다.
아베 총리는 위안부 동원에 일본군의 개입을 인정한 1993년 고노 담화를 수정할 의사가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집권 자민당 내에선 고노 담화에 대해 수정 요구 움직임이 거세다.
16세 소녀의 고난의 세월들
이용수 할머니는 1943년 가을 우리 나이로 16세 때 다른 소녀 4명과 함께 일본군 2명에게 끌려갔다. 집에서 잠을 자다 영문도 모른 채 납치된 할머니는 기차를 타고 경주와 평양을 거쳐 중국 다롄(大連)까지 갔다. 할머니는 다롄에서 배를 타고 대만 북서부의 신죽(新竹)에 있는 일본 가미카제 부대의 위안소로 보내졌다.
“우리 고향 집이 초가집이었는데 방에 조그만 봉창이 있었어요. 거기에 모자를 눌러쓴 군인과 여자 아이가 하나가 있는데, 그 아이가 나오라고 손짓을 했어요. 자다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마루에 걸터 앉아 있는데, 갑자기 누가 내 입을 막고 뭔가 뾰족한 것으로 등을 찌르는 거예요. 그길로 다른 여자 아이 4명과 함께 기차에 태워졌어요. 그때 ‘난 안 간다’, ‘엄마한테 갈란다’ 하다가 엄청 맞았어요.”
대만 신죽의 가미카제 부대 위안소로 가는 도중 배에서 군인들에게 폭행 당한 일, 위안소에 도착해 군인과의 잠자리를 거부했다가 얻어맞아 사경을 헤맸던 경험, 폭격으로 위안소가 무너져 겨우 살아난 일화 등등 아무 것도 모른 채 잡혀간 ‘소녀’ 이용수 할머니가 겪은 일들을 담담하게 증언했다.
“방에 들어가니까 군인 한 명이 담요 안에 있더라고요. 그래서 ‘나 안 들어간다’ 하고 돌아서서 나오는데, 갑자기 누가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가는 거예요. 광 같은 데 밀어 넣고 발길로 차서 지금도 허리가 아파 잘 못 걸어요. 그날 맞아서 한 일주일 누워 있었는데, 그때 담요 속에서 누워 있던 군인이 미안했는지 약도 가져오고 먹을 것도 가져오고 그랬어요.”
할머니가 가미카제 부대의 지명을 기억해낸 것도 그 군인이 가르쳐준 일본 노래 속에 ‘신죽’이라는 지명이 나왔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해방이 되어 대만 수용소에서 지내다 1946년 어렵게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국하는 배에서 다른 언니들이랑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라며 노래를 부르면서 왔어요. 이맘때보다 조금 이른 시기였던 것 같아요. 보리가 한 허리 춤까지 자랐을 때예요. 그런데 내가 집에 돌아오니까 엄마가 ‘귀신이 왔다’고 ‘그냥 돌아가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뛰어가서 ‘엄마’ 하고 안겼는데, 그대로 기절하셨어요.”
이용수 할머니가 일본에 반감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할머니의 생각은 의외였다.
“내 소원은 이웃 나라인 한국과 일본이 원수 지지 않는 것이에요. 나는 일본의 학교에 가서도 학생들에게 그렇게 말해요.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 라고요. 우리나라 젊은 사람들에게도 올바르게 얘기해줘서 서로의 미래를 열어줘야 해요. 괜히 일본 욕하면서 이승만이나 박정희까지 끄집어내서 비난해서도 안 되고요.”
이제 정부가 우리 돌볼 차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비난은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 세력을 정부에 대거 기용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과의 밀실 거래를 통해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했다는 주장이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일본과 무상 3억 달러, 2억 달러의 정부 차관 및 3억 달러의 민간 상업 차관을 지원받기로 합의했다. 다만 이때 청구권 문제가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한다’(청구권 협정 2조)고 합의함으로써 일본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에 대한 배상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를 제공했다.
“한일협정을 피해 당사자인 우리 모르게 진행한 것은 큰 문제예요. 그런데 난 당시에 일본에게 원조 받아서 포항제철을 짓고 경부고속도로 건설한 것은 백번 잘한 일이라고 봐요. 제 얘기는 그때 그 돈으로 경제 발전을 했으면, 이제는 정부가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 나서달라는 겁니다.”
▲ 지난 5월 아베 일본 총리의 강연에 맞춰 하버대를 방문한 이용수 할머니가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한 아베 총리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
이용수 할머니가 일본 정부나 우리 정부에 대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본 정부에 대해서는 아베 총리의 공식 사과와 배상이다(이용수 할머니는 1995년 무라야마 총리의 공식 사과가 있었음에도 아베 총리의 사과를 바랐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게 어렵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아베는 조상도 그렇고 사무라이 기질이 있어서 절대로 사과 안 할 것을 잘 압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본인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야죠.”
이용수 할머니는 내후년이면 우리 나이로 90세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친구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 정부에 등록된 생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이제 50명이 전부다. 그래서 우리 정부에 바라는 게 있다.
“사과는 언제든 일본한테 받겠지만, 정부가 일본에 앞서 우리에게 미리 배상을 해주기를 바랍니다. 죽으면 무슨 소용 있나요. 생전에 배상을 받아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정대협, 당사자 의견 안 듣고, 일본과는 협상 거부”
우리 정부는 일본의 국민기금(일본 무라야마 내각에서 정부 예산과 일본 민간 모금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지급한 보상금)을 수령하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3100여만 원을 지급했고, 현재는 정부 및 지자체 지원금을 합쳐 매월 200만 원이 채 안되는 생활비를 지급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껏 실질적인 도움을 요청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법적 배상만을 요구하는 정대협의 목소리뿐이었다. 한때 대구에 살면서도 매주 수요일이면 서울에 올라와 수요 시위에 참여했던 이용수 할머니는 위안부 단체들에 대해 “맨날 박물관이나 짓고, 자기들끼리 뭐하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문제 해결을 하려면 피해자를 참석시켜서 의사를 묻고 일본 대표나 우리 정부 관계자들과 회의를 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어요.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른다고 무시하는데, 모르면 알려주고 설명해주면 되죠.”
이용수 할머니는 “최근에 일본 정부에서 국장급이 세 차례나 회담을 요청했다는데, 정대협을 비롯한 위안부 단체들이 우리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회담을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협상을 하자는데 왜 안 해요? 문제 해결을 하려면 만나야죠. 만나지 않고 어떻게 해결이 되겠습니까. 정대협의 수요 시위도 무엇을 위해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건 처음도 없고 끝도 없이 무조건 ‘사죄하라’, ‘배상하라’고 하면서 집회 횟수만 채우면 된다는 식이에요. 회담이 있어도 단체 사람들끼리만 해요. 엄연히 피해자들이 있는데, 왜 자기들 마음대로 하는지 모르겠어요.”
수요 시위는 정대협이 1992년 1월부터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진행하고 있다. 이용수 할머니는 최근에는 정대협이 주관하는 일본 대사관 앞 수요 시위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참석하지 않는다.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이용수 할머니가 수요 집회 안 나가는 이유
“일본 대사관 앞에서 ‘사죄해라’, ‘배상해라’ 외칠 때 마음이 편치 않고, 시위에 나가면 다들 악을 쓰게 돼요. 매주 그러다 보면 성격도 그렇고, 태도도 나빠져 건강에도 좋지 않습니다. 정대협 사람들은 투쟁가 쪽인 것 같아요. 몇 년 전에 비전향 장기수들이 수요 시위에 왔는데, 난 별로 마음에 안 들었어요. 하지만 정대협의 윤미향 대표의 남편(김삼석 씨)이 대전형무소에 있을 때 탄원서도 넣고 면회도 갔어요.”
정대협은 수요 시위의 주관을 관련 단체에 맡기기도 하는데, 비전향 장기수들의 모임인 통일광장이 수요 시위를 주관해 비전향 장기수들이 대거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이용수 할머니가 말한 윤미향 대표의 남편 김삼석 씨는 1994년 ‘남매 간첩단’ 사건으로 징역 4년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정대협이 1993년 출간한 증언집에 대한 불만도 토로했다. 증언 청취를 부실하게 하고, 일본에 가서 증언할 때도 통역을 잘못해서 위안부가 된 경위가 사실과 다르게 알려졌다는 것이다.
“증언은 내 생명과도 같아요. 그런데 정대협 담당자들이 본인한테 확인도 하지 않고 사실과 다르게 증언집을 내고 6500원에 판매까지 하더라고요. 증언을 들으려면 따로 조용한 곳에서 정식으로 해야지 식사하면서 ‘할머니 어디 갔다 왔어요?’라고 질문하고 대답한 게 대부분이에요. 그래서 증언들이 뒤죽박죽 된 게 많아요.”
박근혜 대통령이 6월 12일자 미국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협의와 관련해 “상당한 진전이 있었으며 현재 협상의 마지막 단계에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꽉 막혔던 한일 관계에 활로가 뚫릴 것이란 기대감이 조성되고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 당사자들이 아닌, 정대협이 만들어 놓은 ‘법적 배상’이라는 틀에 갇혀 큰 틀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과거 이명박 정부 때는 2012년 3월 이 대통령이 일본과 인도적 조치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밝혔는데, 곧바로 외교부가 한국 정부는 ‘입법 해결’을 바라고 있다고 말을 뒤집은 바 있다. 정대협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이름으로 ‘이명박 대통령은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인도적 해결에 동조하지 말고 공식적으로 일본 정부에게 법적 책임 이행을 촉구하라’고 성명을 냈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문제 해결을 위한 이용수 할머니의 생각은 이랬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가 위안부 단체와 피해자들을 한 자리에 모여 의논하고 의견을 들어야 해요. 그래야 피해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해결책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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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년이라고 했다
그럼 일본군에 위안부할머니들은 뭐라고 불러야하나 일양년이라 해야하나
나라가 망해 힘이 없어 이더러운 수치를 뭔 자랑아라고 동내방내 까발리냐
정대협 이역적들을 모조리 때려죽여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