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여년간 식민지 지배를 받아왔고 1975년 독립선포 이후에도 내전으로 인해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사망하는 참혹한 고통을 견뎌온 동티모르(East Timor).
2002년 독립 정부가 출범하면서 신생국가로 탄생했으며 우리가 상록수 부대를 파견해 지원하는 등 한국과 동티모르 양국은 정치 군사 문화적인 교류를 통해 가까워지고 있다. 미래한국이 지난해 말 헤르나니 코엘류 다 실바(Hernani F. Coelho Da Silva) 동티모르 대사를 만났다.
▲ 코엘류 다 실바 주한 동티모르 대사 |
- 동티모르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최근에 건립된 신생국이지요?
3년 전만 해도 우리가 세계에서 제일 어린 신생국이었습니다. 하지만 2011년 남수단이 생기고 나서는 두 번째로 어린 신생국이 됐습니다.
- 동티모르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서 자국 역사에 관해 간략하게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동티모르는 ‘순다’라는 통상 명칭을 가진 열도 부근에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지배하에 있었을 때 붙은 이름이지만 위치를 쉽게 파악하기 위해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의 식민지배 하에서도 순다 지역으로 불렸습니다. 동티모르의 위치는 대략 인도네시아와 호주의 중간지점입니다.
티모르는 약 15세기부터 포르투갈과 접촉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부터 식민지배를 받았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포르투갈 상인들이 드나들었다는 점은 알 수 있습니다.
차후에 네덜란드가 진입하기 시작해 두 국가가 섬의 패권을 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티모르를 두 부분으로 나누기로 했습니다. 서티모르는 네덜란드가 차지했고 동티모르는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1975년 11월 28일에 우리는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1974년 혁명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은 포르투갈이 식민지들 스스로 독립을 할 것인지 계속 포르투갈 아래 종속될 것인지 행보를 정할 수 있도록 해줬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동티모르는 의견 불일치로 인해 내전을 겪게 됐습니다.
- 내전을 겪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당시 동티모르에는 다양한 정당들이 있었지만 어떤 특정 사상을 지지하는 당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애국주의의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다들 국가의 독립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이견이 있어 분쟁이 생겼던 것입니다.
목숨을 건 독립투쟁, 2002년 동티모르 출범
- 일본도 동티모르를 침략했던 역사가 있었지요?
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2년에 일본의 진격으로 인해 티모르도 피해를 받게 됐습니다. 포르투갈 정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국이었지만 일본군에게 티모르는 호주나 다음 동남아 국가들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하는 전략적 위치였기에 일본의 진출을 늦추기 위해 호주가 군을 배치했습니다.
결국 일본이 총공세를 펼쳐 티모르를 점령하려고 했지만 티모르의 지형은 대부분의 산과 계곡으로 이뤄져 있어 재래식 전쟁으로는 점령하기 힘듭니다.
티모르가 영국의 도움을 많이 받은 점도 있지만 지형 덕분에 일본이 3년간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티모르를 완벽하게 점령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 75년 독립 당시 다양한 정당이 있었고 그것이 내전의 이유가 됐다고 하셨는데 당시 정치적 상황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동티모르는 4개의 정당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즉각적인 독립을 원했던 FRETILIN 혁명당과 일정 기간 동안 점진적인 독립을 시행하기 원했던 UDT(Uniao Democratica Timorense: 티모르민주연합), 그리고 인도네시아와 친화적인 APODETI당 그리고 소규모 당인 노동당(Labour)이 있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1976년에 전 국민을 대상으로 투표를 해야 했지만 독립에 대한 주권 투쟁으로 다투던 정당 중 하나인 UDT당이 1975년 8월에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평화에 대한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FRETILIN이 반-쿠데타를 일으켜 진압에 성공함으로써 UDT당을 진압했습니다. 하지만 그 무렵 정치적 공백기의 틈을 탄 인도네시아가 친 인도네시아 세력을 이용해 시작한 총공격이 24년간 행해졌습니다.
동티모르에는 기갑부대도 없었고 경무장을 한 약 7000명이 되는 병력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대칭 전력을 이용해야 했으며 모든 국민이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됐습니다.
약 25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폭격과 굶주림, 질병 등으로 죽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국민들은 국가를 잃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 과거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이웃 인도네시아와 현재 관계는 어떤가요?
1975년부터 1983년까지 동티모르인들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은 생각을 바꿔 인도네시아의 체제에 대항해서 싸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습니다. 과거의 일은 과거로 두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에 공식적인 사과를 받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채널을 통해 화합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양국이 조정 위원회를 공동으로 설립해 역사를 되돌아보고 배운 교훈들을 기록해두며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기여하고 있습니다.
- 독립과 건국은 어떻게 이뤄진 건가요.
1999년 유엔은 주민투표에 의한 동티모르의 독립을 허용했습니다. 전 국민이 투표에 참여하도록 권유를 받았고 과반수가 인도네시아에 합병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투표 이후 UN 전환기구 하의 통제를 받는 기간을 거쳐 2002년 5월 독립적인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한국은 김대중 정부 시절 상록수 부대를 동티모르에 파견했으며 그들은 동티모르에 인도주의적 지원을 했습니다. 그들은 임무에도 충실했고 공병 작업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습니다. 우리는 한국에 도움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겁니다.
- 일반 국민들은 한국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습니까?
한국에 파견됐던 상록수 부대는 많은 업적을 이뤘습니다. 전투부대일 뿐만 아니라 공병작업에도 뛰어났으며 무술 실력도 좋았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태권도를 가르쳐줬는데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금까지 즐기고 있습니다.
- 상록수 부대의 동티모르내 활동에 대해 좀 더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상록수 부대는 450명으로 구성된 UN 소속 전투부대였습니다. 지역 치안유지를 주임무로 가지고 있었지만 지역사회와 문화적인 교류에도 참여했습니다. 애석하게도 임무 수행 중이던 5명의 장병이 급류에 쓸려가 희생됐습니다.
동티모르 지역은 산과 계곡이 많아서 삼각지 부근에 있으면 급작스런 수위 변화로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 동티모르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위해 지역 주민들이 매년 추도식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 상록수 부대 파견
- 올해로 한국과 수교 14년째인데 양국간 어떤 현안이 있으며 어떤 협력이 이뤄지고 있나요?
한국과 동티모르는 모두 전쟁이라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전쟁의 고통과 억압받는 시절을 겪었기 때문에 전쟁과 평화에 대해 같은 철학과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협력 사항을 보면 한국이 직접 지은 대사관이 동티모르에 있고, 또한 KOICA 프로그램도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KOLCA는 동티모르에서 기초 교육과 의료 기반 등 사회에 필요한 틀을 갖추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한국은 또한 인쇄소를 동티모르에 건설해 이 시설이 교육을 위한 책을 인쇄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그 책들은 초등학교와 상급 교육 시설들에게 배부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은 기념관을 동티모르에 건설했는데 이는 동티모르에 한국의 존재감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에 감사하게도 우리는 EPS(고용인 허가증 제도-Employee Permit system) 혜택을 받는 국가에 포함돼 2009년부터 동티모르인이 한국으로 일하러 올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1380명 정도의 동티모르인이 한국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 다시 잠시 동티모르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 보면 오래 전부터 무엇이 외지인들을 작은 섬 동티모르로 불러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동티모르에서는 백단나무(sandal wood)가 나오는데 동티모르의 토양에서 자란 백단나무는 향이 강하고 오래 가기로 유명해 그것을 차지하기 위한 상인들이 대거 유입됐습니다.
또한 동티모르는 호주에서 약 5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상인들이 무역에 사용하기 적합하고 출입이 용이한 항구의 역할을 했습니다. 일본이 동티모르에 온 것도 호주와 동남아로 넘어가는 데 좋은 거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동 지역에 비하면 생산량이 매우 적지만 바다와 육지에서 나오는 석유와 천연가스는 정부 소득의 약 90%를 차지합니다. 이 또한 외부의 세력들이 동티모르에 들어온 이유 중 하나지만 천연자원 덕분에 현재까진 정부의 부채가 없습니다.
- 우리 한국과도 천연자원 무역이 이뤄지고 있나요.
현 시점은 아니지만 차후에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는 정유선의 도입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세계 최대의 정유선이 한국에서 건조돼 호주에 배치됐다는 뉴스를 BBC에서 봤습니다. 앞으로 천연자원에 대한 일을 할 때 한국도 함께 하는 기회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동티모르 국민들도 한국문화 좋아해
- 동티모르의 문화에 대해 궁금합니다. 독특한 문화로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사용하는 언어는 무엇인가요.
동티모르에는 다양한 문화가 존재합니다. 약 35개의 방언이 있는데 자신의 지역에서 약 10km 정도만 벗어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제일 많이 사용되는 언어는 대략 4개 정도가 있지만 태텀(Tatum)어가 공용어입니다.
옛날에는 글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해외에서 종교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언어를 흡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라틴 알파벳을 가져와 음차 형식으로 사용합니다.
티모르에는 오래 전부터 두 개의 왕국이 있었는데 같이 어우러져 살았습니다. 특별히 정해놓은 영토도 없었지만 혈통은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동티모르의 분단도 그 두 개의 혈통을 기준으로 해서 나뉘었습니다. 우리는 문화적으로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으며 국경 지역에서는 유사한 언어를 사용합니다.
- 대사님의 이력에 대해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인도네시아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게릴라 당 비서였던 아버지를 따라 정글에서 게릴라들을 위한 병원을 운영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3년 후 동티모르에서 학업을 계속 하는데 불편을 느껴 인도네시아 잘라 지역에 가서 10년간 지냈습니다.
티모르에 돌아가려고 했지만 게릴라 활동을 했던 이력 때문에 다시 본국으로 환송됐습니다. 그래서 포르투갈에 돌아가 공무원으로서 일을 하게 됐고 동티모르가 2000년 완벽히 독립하게 된 시점에 모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후 UNDP(유엔 발전 프로그램)에서 일을 하다 동티모르 외교부로 옮겼습니다. 그 후 호주와 뉴질랜드 각지에서 일을 했고 한국에 친화적인 대통령의 명을 받고 2013년도 한국에 오게 됐습니다. 대사로서는 호주에 이어 두 번째 주재국이 되는 겁니다.
-한국 대사로서 어떤 목표와 과제들을 갖고 계신지요.
지금까지 우리 양국이 유지해왔던 우정을 계속 지켜나가고 함께 창출해낼 수 있는 기회를 찾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현재까지 양국의 관계는 매우 좋습니다. 학생들과 비정부단체 및 기업들의 교류가 왕성합니다.
동티모르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경제성장입니다. 현재는 GDP가 6000달러에 이르지만 동티모르 건국 당시는 300달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GDP의 큰 변화가 2030년 전에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한국의 투자와 기술적인 도움을 많이 필요로 합니다.
* 이 기사는 '미래한국TV'를 통해서 동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 해당 영상 링크 : http://youtu.be/OEEC819QSSc
인터뷰/김범수 편집위원 www.kimbumsoo.net
정리/박종하 인턴기자 saintjoepark@gmail.com
사진·영상/황규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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