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한 그릇의 경제학
라면 한 그릇의 경제학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4.11.24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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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 ‘글로벌 한류’ 한국 라면 대박記 ①

배고팠던 60년대, 5원짜리 ‘꿀꿀이죽’ 대신 사먹던 국민 구호식품 라면이 출시 50년 만에 일본을 제치고 전 세계로 진출한 글로벌 한류식품이 됐다.

기적과 같은 한국 라면의 성공기에는 한국인들이 애환과 희망을 담아 끓여 먹었던 시대의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라면시장에서 벌어졌던 경쟁과 기업가 정신이 있다.

지난해 한국 라면은 1억 달러가 넘는 사상 최대의 수출을 기록하며 전 세계인을 사로잡는 한류식품으로 그 위상을 떨쳤다. 가난했던 나라에서 배고픔을 달래던 먹거리가 이제는 세계인의 기호식품이 된 것이다.

올해 수출은 지난해 수출액의 2배에 달하는 1억9000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업계는 추산하고 있다. 한국 라면은 일본 라면보다 세계시장에서 더 비싼 가격에 팔린다. 제대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한국 라면의 성공 신화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한국인 70% “주1회 라면 섭취”

2014년 소비자 조사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민 10명 가운데 7명 이상은 1주일에 1회 이상 라면을 먹는다. 1주일에 3회 이상 라면을 먹는 사람도 15%에 달했다.

세계라면협회(WINA)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1인당 연평균 라면 섭취량은 74.1개로 전 세계 국가 중 1위에 올랐다. 그야말로 라면 마니아들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나라별로 한국의 라면을 먹는 방법이 특화돼 있다는 점이다. 세계 80개국에 라면을 수출하는 롯데식품이 파악한 각국의 라면요리의 형태를 보면 러시아 사람들은 도시락 라면에 마요네즈를 풀어먹는 것이 유행이었다.

홍콩인들은 한국 라면에 치즈를 넣어 먹는 것을 즐긴다. 뜨거운 태양 아래 아프리카 세네갈에서는 매운 컵라면을 즐긴다는 보고도 있다.

식품 전문가들은 라면이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비결에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다름 아닌 ‘모디슈머(modi-sumer)’ 즉 스스로 라면을 이렇게 저렇게 입맛에 맞춰 여러 형태로 응용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라면은 세계 인스턴트 식품 가운데 최고의 ‘하이테크 대박’이라는 찬사가 붙기도 한다.

라면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기원이 일본이 아니라 중국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과거 청나라에서는 ‘이부면’이라는 마른 국수가 있었다.

이를 닭고기나 돼지 뼈 삶은 육수에 말아먹었는데 중일전쟁 과정에서 일본군들이 한 번 그 맛을 보고는 잊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일본에 들어왔던 이부면은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라미엔’이라는 이름의 중화풍 국수로 중국인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다.

이를 인스턴트식품으로 개발한 사람도 사실 일본인이 아니라 대만계 일본인인 안도 모모후쿠였다. 당시 일본에는 미군 구호품으로 밀가루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안도는 이를 이용한 새로운 식품을 고안하게 됐다.

안도는 사업에 실패해 자살을 결심하던 차에 마지막으로 라면 개발을 했다고 한다. 초기의 라면은 양념이 면에 더해진 형태였으나 이후 1962년에 스프를 분말로 만들고 따로 첨부한 형태의 봉지면이 인기를 끌게 됐다.

 


“섬유야, 플라스틱이야?”
라면의 ‘컬쳐 쇼크’

라면이 한국에 처음 선을 보인 것은 이듬해인 1963년이었다. 삼양식품이 일본 묘조식품의 치킨라면을 벤치마킹해 국내에 10원에 출시한 것이 그 첫 출발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라면이 한국인들에게 인기를 끈 것은 아니었다. 라면은 출시되던 시점에 한국인들에게는 섬유나 플라스틱으로 인식됐다고 한다.

당시 한국에는 쌀이 부족했고 밀가루는 비교적 풍족했다. 미국이 무상원조로 일본에서처럼 한국에도 밀가루를 공급해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밀가루로 만든 칼국수나 수제비만으로는 성인에게 필요한 한 끼 열량과 단백질, 지방을 공급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니 먹고 돌아서면 허기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라면이 한국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 수 있던 배경에는 그 당시 120그램 한 봉지 라면에 담긴 열량과 맛이 주효했다.

기름에 튀긴 라면은 칼국수나 수제비보다 열량과 단백질이 더 많았다. 가격도 당시 5원하던 꿀꿀이죽과 50원 짜장면 사이인 10원이어서 부담이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부족한 식량과 쌀 수입으로 인한 외화절약 가능성으로 라면을 주목했다. 그래서 혼분식을 장려하며 본인 스스로도 라면을 즐겨 먹었다.

흥미로운 일화도 있다. 일본 라면을 벤치마킹했던 삼양라면이 최초 출시를 앞뒀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시식을 해보고는 ‘한국인들 입맛에 맞게 좀 더 매웠으면 좋겠다’고 한 충고가 바로 제품에 적용돼 한국 라면의 특징인 얼큰함의 기원이 됐다는 이야기. 한국 라면사(史)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에피소드이다.

그러한 라면은 60년대 중반 배고픈 국민의 ‘위로품’이 됐다. 가난한 예술인과 문인들의 ‘벗’이었으며 산업 역군이었던 여공들의 친구였고, 학생들과 고달픈 군인들의 낙이었다.

배고팠던 60년대 라면에는 ‘제2의 주식’이라는 광고가 붙었다. 1963년 처음 국내에 선을 보였던 삼양라면의 광고문구는 ‘오늘의 화제-이제 식생활 문제는 해결됐다!’였다.

 


“라면 먹고 갈래?”

거기에는 한국인들의 눈물과 애환이 담겨 있다. 그러나 성장하던 70년대에는 한 그릇의 라면을 두고 ‘형님먼저, 아우먼저’라는 광고 카피가 유행을 탔다. 라면에 국민들의 희망과 웃음이 담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 오늘에도 라면은 여전히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다. “라면 먹고 갈래?”라는 어느 영화 속 대사는 청춘남녀가 사랑을 확인하는 메시지로 유행을 탔다.

무엇보다 라면은 한국의 어린이들이 처음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보는 음식이다. 그러한 라면의 역사는 그 자체로 한국 경제와 산업의 역사를 읽는 코드가 된다.

그러한 라면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자못 크다. 한국의 라면이 그 원조국이었던 일본을 제치고 세계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삼양라면과 농심라면의 대결은 그 자체로 건곤일척의 경쟁이었으나 이로부터 소비자들은 더 나은 제품과 짜장면, 냉면, 비빔면 등 다양한 인스턴트 라면의 출현이라는 선택의 기회를 갖게 됐다.

70년대를 지나 80년대에 이르면 한국야쿠르트와 빙그레가 라면 사업에 진출해 춘추전국시대를 이뤘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경쟁의 배경에는 역시 ‘삼양라면’이라는 선구적 제품이 있기에 가능했다.

97년 공업용 쇠기름이라는 우지(牛脂) 파동을 6년간 법정싸움으로 이겨내고 부활한 삼양라면의 스토리는 단순히 한국 라면사의 에피소드로 끝날 문제는 아니다.

오늘날 한국 라면의 대성공에는 삼양식품의 창업자 故 전중윤 회장의 기업가 정신과 철학을 빼고는 말하기조차 어렵다는 사실이 담겨 있다. (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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