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참전, 세계대전(World War)을 만들다
일본 참전, 세계대전(World War)을 만들다
  • 이춘근 박사
  • 승인 2014.09.12 10: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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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 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 ⑨
 

1914년 유럽에서 시작된 전쟁은 그 이름이 애초부터 ‘세계대전’은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었을 리는 더더욱 없다. 1914년 여름, 유럽인들 그 누구도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 이 전쟁이 크게 번지리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치열해지고 장기적으로 지속됨에 따라 이 전쟁은 ‘대 전쟁’(Great War)이라 불리게 됐다. 만약 전장이 유럽으로 한정됐다면 이 전쟁은 결코 ‘세계대전’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1939년 또 다른 ‘대전’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1914년부터 1919년에 걸쳐 일어난 이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전쟁을 명실 공히 세계대전이라고 불릴 수 있게 한 것은 동양 국가인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 편이 아니라 연합국 편에 서서 전쟁에 가담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유럽에 한정됐던 전쟁은 일본과 차후 미국의 참전으로 그 규모면에서나 지리적인 측면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계대전(The First World War)이 됐다. 전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세계대전이라는 용어 대신에 지구대전(Global War), 패권전쟁(Hegemonic War) 혹은 일반전쟁(General War)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유럽의 전쟁에 일본은 왜 참전했을까

그렇다면 아시아 한 구석에 있어서 지리적으로는 유럽과 상관없어 보이는 일본이 영국, 프랑스, 미국의 편에 서서, 독일을 적국으로 삼아 전쟁을 벌이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이 문제는 20세기 초반에 형성된 ‘강대국 국제정치’의 구조를 살펴봄으로써 잘 설명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 1900년이 시작될 무렵 세계의 강대국은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미국 등 7개국이었다.

당시 세계의 패권국이었던 영국은 유럽 대륙에서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영국의 패권과 세계 방방곡곡에 걸쳐 있는 대영제국(British Empire)을 유지하는 관건이라고 생각하고 유럽 대륙의 어느 나라와도 동맹을 맺지 않는 ‘영광스러운 고립정책’ 혹은 ‘유연한 균형자 정책’을 대외 정책의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이 무렵 급격히 부상하고 있는 나라들은 러시아, 미국, 일본 등이었다. 미국은 1889년 스페인을 격파한 후 태평양 지역으로 뻗어나가는 세력이 됐고 러시아 역시 동아시아로 그 세력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세력은 반드시 막아야 할 힘이라고 생각했던 영국은 극동을 향한 러시아 팽창을 일본을 통해 막으려 작정하고 1902년 일본과 동맹을 체결, 영광스러운 고립 정책에 종언을 고했다.

당시 영국과 일본이 동맹을 체결한다는 것은 일본에게는 황송한 일이었다. 영일동맹을 ‘달님과 두꺼비의 결혼’에 비유하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로 영국과의 동맹 체결은 일본이 세계 강대국으로 나가는 지름길이 됐다. 영일동맹을 통해 세계 외교무대에서 발언권을 가지게 된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의 여세를 몰아 1904년 러시아마저 격파, 1905년부터는 자타가 공인해 주는 세계 강대국의 반열에 올랐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일본은 제국주의적 팽창의 길을 추구했지만 일본의 팽창 야욕은 다른 제국주의 열강의 이익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일본은 능수능란한 외교정책을 제국주의 팽창정책과 병행해서 추구했다. 현재 일본 대외정책의 핵심축이 미일동맹에 있는 것처럼 1902년 이후 수십 년간 일본 외교정책의 기본 축은 영일동맹이었다.

영국 군함

연합국의 미묘한 입장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일본의 팽창을 억제하던 국제질서에 한시적이나마 파란이 생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일본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들은 이 기회를 통해 중국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고자 했다. 일본 메이지 시대의 정치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하늘이 일본을 도운 기회’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당시 연합국의 일본 참전에 대한 입장은 미묘했다. 중국의 중립을 유지하려는 견해가 있었던 한편 영국은 중국에 있던 영국의 식민지, 특히 홍콩이 독일의 침략 대상이 될 것을 우려했다. 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군사력이 필요했다.

영국의 요구에 너무나 적극적으로 호응했던 일본의 모습을 보며 영국은 오히려 일본의 의도를 의심했다. 중국은 중립을 선언했고 독일도 교주만(膠州灣) 일대를 중국에 반환했으며 미국 역시 중국이 중립지역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영국은 일본의 참전을 취소하라고 요구했을 정도다. 일본은 영국에게 전쟁 참여를 요청했고 영국은 일본의 전투지역을 일본의 해상무역 보호에 필요한 지역으로 국한한다는 조건으로 일본의 참전에 동의했다. 물론 영국의 전투제한 조건은 지켜지지 않았다. 전쟁의 속성상 애초부터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이었던 것이다.

일본은 1914년 8월 15일 독일에 최후 통첩을 한 후 8일 23일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8월 25일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일본은 곧 중국 침략의 길로 들어섰다. ‘21개조 요구’라는 것을 중국에 제시했던 것이다(1915년 1월 18일).

이는 중국 대륙 전역에서 일본의 우월한 지위를 확립하기 위한 방대한 요구 사항들이었다. 중국은 당연히 이를 거부했고 일본은 이를 핑계로 중국에 최후 통첩을 보냈다(1915년 5월 7일). 중국은 결국 2일 후인 5월 9일 일본의 요구를 수락했다. 중국은 이 날을 국치기념일로 삼아 기억하고 있다.

1917년 초 일본은 연합국의 요구로 해군을 지중해에 파견한 바 있다. 물론 대가를 바라고 한 행동이었다. 일본은 영국,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등으로부터 중국 산동성(山東省)의 독일 권익과 적도 이북 태평양 지역의 독일 식민지를 일본이 획득할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일본이 1차 세계대전 참전을 통해 얻은 이득은 일본이 생각했던 것보다 크지는 않았다. 특히 일본의 야욕은 일본을 서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는 ‘아시아의 희망’으로 생각하던 다수의 아시아국가 국민들을 절망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1차 세계대전을 통해 더 강력한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고 일본 현대사의 권위자인 마리우스 젠센(Marius Jensen) 교수는 러일전쟁 이후 20여 년간 일본이 세계 5대 강국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고 평가한다.

1차 세계대전에 사용된 일본 군함 '와카미야'

덩치 커진 일본, 요구사항을 말하다

일본은 1차 세계대전을 종결하는 1919년 베르사유 강화회의에 전승국 대표로 참석, 전쟁 중 연합국들이 일본에게 약속한 바의 실천을 요구하고 나섰다. 일본의 요구는 1차 세계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끈 미국의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하는 것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민족 자결의 원칙을 강조하는 데 반해 일본은 식민통치의 확대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의 압제 하에 있던 조선 국민들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한국을 독립 시켜줄 것이라는 기대에 들떠 있었으며 이와 같은 기대는 3·1 독립운동의 배경 중 하나가 됐다.

일본의 요구에 윌슨 대통령이 난색을 표하자 일본은 강화회담에 불참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 무렵 일본의 덩치와 위세는 그만큼 커져 있었던 것이다. 이미 이탈리아가 퇴장한 상황에서 일본마저 퇴장할 경우를 우려한 미국은 결국 일본의 요구를 들어줬다. 윌슨은 자신이 설정한 이상주의적·도덕적 국제정치원칙을 스스로 포기했던 것이다. 일본이 자신의 요구를 거부당해 강화회의에서 퇴장할 경우 일본은 독일, 소련 등 1차 세계대전의 결과에 불만인 나라들과 연합해 국제정치를 파탄낼지도 모른다는 ‘현실 국제정치학’은 윌슨의 이상주의를 그대로 파탄 내 버렸다.

좌절된 이상주의, 국제정치는 ‘현실’이었다

윌슨은 훗날 이렇게 변명했다.
“원칙을 위반했다고 비난 받을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무정부주의와 군국주의의 부활에 대항해 세계 질서와 국제기구를 위해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국제정치가 도덕이 규율하는 영역이 아니라 힘과 국가이익이 규율하는 영역이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계기였다. 1919년 봄 조선인들의 희망적인 기대는 일본이 전승국에 포함되는 나라였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국제정치는 힘의 정치라는 사실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1차 세계대전 기간 중 일본은 강대국 국력의 상징인 해군력의 대폭적인 증강을 이룩했다. 1921년 일본의 해군 예산은 일본 국가예산의 25%에 이를 정도로 증액됐다. 1차 세계대전 종료 후 3년째인 1922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세계 해군 군축회의에서 일본 해군은 영국, 미국에 이어 ‘세계 3대 해군’으로 대접 받았다.

오늘날 일본은 또 다시 움직이고 있다. 현재 일본의 움직임은 거의 전적으로 중국의 부상(浮上)으로 인한 것이다. 지난 7월 30일 미군과 일본군이 하와이에서 상륙작전 훈련을 함께 벌이고 있다는 뉴스가 전송됐다. 피아 구분이 복잡해지게 된 오늘날의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나라는 과연 100년 전의 운명을 피할 수 있는 올바른 국가 대전략을 가지고 대처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도무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걱정이다.


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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