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진실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지혜와 과학기술은 전쟁을 통해서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는 라이트 형제가 처음 하늘을 난 지 겨우 11년 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지만 인간은 이미 비행기를 전쟁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발명되기 이전까지 전쟁의 영역은 2차원의 면(面)에서 이뤄지는 일이었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아니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기 오래 전부터 서기 1900년에 이르기까지, 전쟁은 육상과 해상이라는 2차원의 면에 국한된 일이었다.
전쟁이 2차원의 면 위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전선이라는 것이 형성됐고 전쟁은 주로 군인들의 일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늘을 전쟁의 공간으로 사용하게 됨에 따라 전쟁은 3차원의 영역에서 이뤄지게 됐고 전선의 개념도, 민간인과 군인의 구분도 모호하게 됐다. 비행기를 탄 양측의 병사들은 지상의 전선을 넘어 적국의 하늘 깊숙이 날아 들어가 후방의 군사시설은 물론 민간인 거주지 및 산업시설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할 수 있게 됐다.
전투용으로 개발됐던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전쟁은 이제 전선의 군인들 뿐만 아니라 비행기가 날 수 있는 하늘 아래 있는 그 누구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일이 됐다. 비행기의 등장은 후방의 민간인이 느끼는 전쟁의 공포가 전선의 병사가 느끼는 전쟁의 공포보다 결코 덜하지 않은 시대를 열었다. 전쟁은 전쟁에 참여한 나라의 모든 국민들이 함께 참여해야 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 비록 1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비행기를 사용한 군사작전이 있었지만 전쟁 당사자 양측이 모두 본격적인 전쟁 수단으로 비행기를 사용하게 된 계기는 1차 세계대전이었다.
풍선과 비행선을 통해서 하늘을 난 적이 있었고 비행기 발명 이전 서유럽 강대국들은 하늘을 전쟁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풍선부대를 만들어 두기도 했었지만 동력을 이용해서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를 하늘에 띄우고 이를 ‘조종’하며 날았던 첫 번째 사람들은 미국의 오빌 라이트와 윌버 라이트 형제였다. 라이트 형제가 결정적으로 기여한 부분은 비행을 ‘통제’(control) 할 수 있는 기술의 측면에서였다. 인간은 이제 날고 싶은 곳으로 날아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1903년 12월 17일 미 노스캐롤라이나주 키티호크에서 12초 동안 120피트(37m)의 거리를 날았던 라이트 형제는 두 번째 비행에서는 53m를 날았고 세 번째 비행에서는 61m, 그리고 4번째 비행에서는 260m를 날 수 있었다. 라이트 형제는 자신들의 발명품이 ‘군사적 용도’를 위해 널리 쓰이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사실 그들은 비행기를 개발하기 시작할 때부터 자신들의 발명품을 전 세계 각국의 군대에 팔고자 했다.
미국과 영국은 최초에는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비행기 성능이 대폭 개선된 1908~1909년 프랑스 국방부가 큰 관심을 보였고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를 7대 구입했다. 이후 영국과 미국 국방부도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비단 라이트 형제들 뿐 아니라 초기 비행기 개발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대개 비행기의 유용성을 ‘군사적 용도’에서 찾았다. 비행기는 애초부터 전쟁 그 자체를 변화시킬 중요한 무기 체계로 고안되고 발전됐던 것이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가 최초 비행한 후 10년 8개월이 지난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당시 비행기들은 이미 유럽 강대국들이 보유하고 있던 무시할 수 없는 군사력의 일부가 돼 있었다. 전쟁 발발 당시 독일 230대, 러시아 190대, 프랑스 160대, 영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는 각각 50~100대를 보유, 유럽국가들은 약 1000대 정도의 작전 가능한 비행기를 전선에 배치해 놓고 있었다.
비행기의 최초 역할은 정찰
비록 오늘의 비행기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1차 세계대전 당시의 기준으로 비행기는 정찰 및 정보 수집에 탁월한 장점이 있었다. 지형에 관계없이 넓은 지역을 짧은 시간 동안 정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비행기들은 기병대가 24시간 동안 정찰해야 할 만큼 넓은 지역을 4시간 정도면 정찰할 수 있었다. 항공기가 다른 수단보다 정보 수집 능력이 탁월했던 이유는 아군과 적군이 대치하고 있는 전선을 훌쩍 넘어가서 적의 후방지역을 정찰할 수 있었다는 데 있었다. 비행기들은 정찰 능력을 통해 1차 세계대전의 진행 방향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힌덴버그 원수는 “조종사들이 없었더라면 탄넨베르크 섬멸전의 승리도 없었을 것”이라며 정찰 임무의 중요성을 찬양했다.
1914년 9월 마른느 전투(Battle of Marne)를 기점으로 프랑스 정찰기들은 독일군의 진격 방향을 알아내는 데 기여했고 그럼으로써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독일군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포병은 항공기를 이용, 적군의 배치 상태를 알아내고 이 정보를 활용해 포 사격의 목표로 삼을 수 있었다.
공중전(Dog Fight)
1차 세계대전 중 비행기끼리 하늘에서 전투를 벌이는 사상 최초의 공중전이 시작됐지만 공중전(air to air combat)은 사실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었다. 조종사끼리 하늘에서 만나다 보니 자연스레 나타난 결과였다. 공중전은 인간 대 인간, 기계 대 기계의 대결이었고 다른 종류의 항공작전에 비해 과대평가됐으며 오늘날에도 과대평가돼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공중전을 통해 하늘을 장악한다는 것은 지상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것으로 판명됐다. 1916년 유럽 서부전선에서 행해진 베르뎅 전투와 솜 전투는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늘을 장악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만들었다. 전투 현장에서 적국의 군사력을 폭격하는 항공기의 작전을 전술폭격(tactical bombing)이라고 부르며 이는 개념상 근접 공중 지원(Close Air Support)이라고 한다. 근접 공중 지원 작전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우선 전투지역의 하늘을 아군 항공기들이 장악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하늘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공중전(aerial fighting)이 선행돼야 했다.
공중전의 출현은 수많은 영웅을 배출했다. 적의 비행기를 많이 격추시킨 조종사들이 영웅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독일 조종사 오스발트벨크는 40대의 적기를 격추시킨 후 아군기인 독일 공군기와 충돌 사고로 전사하고 말았다. 역시 독일인 리히트 호펜은 전사할 때까지 80대의 적기를 격추시킨 1차 세계대전 최고의 전투조종사가 됐다. 그러나 조종사들의 인생은 비참하고 짧았다.
영국의 한 조종사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조종사들의 평균 수명이 6주라고 계산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조종사들은 중세시대의 기사처럼 행동했다. 정정당당하게 하늘에서 싸우자고 했으며 조종사들이 적국의 지상에 추락했을 때 인격적인 대우를 받았으며 전사한 적국의 조종사에게 예의를 갖춘 장례식을 치러줬다. 자국의 시민이 추락한 적국의 조종사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도 취해졌다.
각국의 조종사들은 비슷한 무기, 비슷한 조건에서 정정당당하게 남자 대 남자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으로써 잔인한 공중전에 작은 낭만이 부여됐다.
1차 세계대전을 통해 발달한 항공전략 이론
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도중 비행기 기술 발달은 더 빠른 속도로 이뤄졌으며 항공력에 관한 관심 역시 폭발적으로 불어났다. 1차 세계대전 기간 중 프랑스는 6만7897대의 비행기를 생산했고 영국은 5만8144대, 독일은 4만8537대의 비행기를 생산했을 정도다. 비행기 생산 대수는 적었지만 산업 능력이 제일 앞서는 나라는 독일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헝가리는 항공기 디자인과 개선 능력이 뛰어났지만 생산량은 적어 5431대였다.
이탈리아는 약 2만대를 생산했다. 산업 능력이 뒤진 러시아는 프랑스로부터 엔진을 수입해서 자국형 비행기를 만들었다. 1차 세계대전 기간 중 항공산업을 가장 크게 확대시킨 나라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1차 세계대전 참전 기간이 1년여에 불과했지만 그 기간 동안 무려 1만5000대의 비행기를 생산했다.
항공력은 1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결정’한 무기체계는 아니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을 통해 항공력은 지상군을 지원하는 필수적인 무기체계임을 증명했다. 1차 세계대전 중 전략 폭격도 아직은 큰 역할을 담당하지 못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젊은 조종사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각국의 주요 공군 지휘관으로 성장해 있었다. 이들이 경험한 1차 세계대전의 항공전은 2차 세계대전 항공전의 전조가 될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을 통해 항공전략 사상의 전성기가 시작됐다.
특히 이탈리아의 두헤(Douhet)가 주장한 ‘전략 폭격이론’은 항공전략 사상 가장 중요한 이론으로 자리 매김했다.
1918년 가을 1차 세계대전이 전쟁이 종료될 무렵 미국의 빌리 메첼 장군이 세인트 미히엘(St. Mihiel) 공격작전을 위해 동원한 항공부대는 무려 1400대의 비행기로 구성될 정도로 항공력의 규모도 커졌다.
1차 세계대전을 통해 급속히 발달한 비행기와 항공전략이론은 20년 후 발발한 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끝을 장식했다. 독일의 스투카(Stuka) 급강하 폭격기가 개시한 2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B-29기의 핵폭탄 투하로 종료됐던 것이다.
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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