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익과 공익의 변론
사익과 공익의 변론
  • 미래한국
  • 승인 2014.07.04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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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문명의 탁월함은 무엇보다 개개인의 자유의 소중함을 존중하고 이를 현실의 삶에서 구현하려 애썼다는 점이다. 세계 어느 문명에서도 볼 수 없었던 특이한 현상이다. 자유는 남에게 예속 받지 않으려는 의지의 작용이다. 자유는 자신의 생각과 선호를 구현하는 것 못지않게 소유권의 정당한 행사에도 투영된다.

고대 그리스에서 자유는 나와 가족, 나아가 도시국가를 지키는 가치관이자 공동체의 보이지 않는 이념 역할을 했다. 자유의 확보와 유지, 확대를 위해 그리스인들은 스스로를 변호하고 타인을 설득하는 수사학을 공부했다. 변론의 전문 교육자인 소피스트들이 인기를 끌었던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수사학은 그리스의 민주주의의 산물이자 민주주의를 더 꽃피게 한 방편이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민주주의에 기초한 시민들의 자유가 무한정으로 확대돼 충돌이 빚어질 때 치밀한 법률로 조정하고 제어했다. 자연스럽게 법률 다툼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법정 소송이 증가함에 따라 변론을 도와주는 법정 변론가가 나타났다. 변호사와 유사한 역할이다.

이사이오스(Isaios, BC 420?-BC 350?)는 기원전 4세기 아테네의 대표적인 법정 변론가였다. 특히 상속권 소송의 전문가였던 것 같다. 그는 당대 최고의 사상가였던 플라톤과 쌍벽을 이루던 철학자이자 교육자이던 이소크라테스의 제자였고, 최고의 웅변가였던 데모스테네스의 스승이었다.

<변론>은 당대 아테네의 법률과 소송의 진행방식, 개인들의 권리 의식, 재산권의 상속에 대한 구체적인 법조항은 물론, 사회적 관습과 인식 등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사료다. 특히 2400여년전 그리스 법정에서 벌어진 치밀한 논리와 증거 제시, 감성적 설득의 수사에 감탄하게 된다.

중국에서도 법가 사상은 나왔다. 하지만 전제군주가 백성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통치의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상앙, 한비자 등 법가의 학자들은 절대군주에 대해 신상필벌(信賞必罰)과 중형주의(重刑主義)를 주장했을 뿐 백성들이 삶 속에서 부딪히는 권리의 충돌을 해소하고 부당한 억압을 구제하고 조정해 주는 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통치자에 대한 조언만 무성할 뿐 백성 간의 쟁송과 변론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중국 고대기에 법률의 해석과 적용을 둘러싼 쟁송의 과정, 또는 전문적 변론의 제도나 문화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대 그리스에서 재판 청구의 절차가 정립되고, 전문적 변론가가 필요할 만큼 시민들의 쟁송이 일상화돼 있었다는 점은 놀라운 문명적 성취가 아닐 수 없다.

변론가들은 승소하기 위해 무엇에 중점을 두었을까? 아테네에서는 시민의 사유재산권 보호를 중시했다. 재산 상속 분쟁에선 사실관계의 증명과 정황 증거가 중요하게 다뤄졌다. 특히 사실 관계 못지않게 소송 제기자의 과거의 비행과 부도덕성은 배심원들에게 중요한 판단기준이 됐다. 또 소송 제기자가 평소, 또는 전시에 레이투르기아(Leitourgia), 즉 공적 의무를 얼마나 성실히 수행했는가도 중요한 정황 증거로 활용됐다.

배심원을 설득하는 데 있어서 법률적 증거 못지않게 소송 당사자들이 공동체에 기여한 정황 증거가 공동체의 시민, 또 한 인간으로서의 품성과 자질을 평가하고 주장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잣대가 됐던 것이다. 사유재산권을 중시하면서도 공동체의 시민으로서의 책무 이행을 함께 고려한 합리적 변론 및 재판 제도였던 것이다. 오로지 개인 전속적 특성과 증거주의에 매달리는 현대 쟁송제도에 시사하는 점이 많다.


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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