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채가 한국 좌파 지식계에서 이토록 심원한 영향력을 획득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진리(眞理)를 말했기 때문인가? 그렇다고 속단하기 이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다. 박현채의 글은 ‘너무 어려웠다’는 사실이다.
박현채는 생전에 정말 많은 글을 썼다. 이는 2006년 6월 후배들이 출간한 ‘박현채 전집’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백과사전 사이즈의 책 일곱 권에 그가 집필했던 논문, 수기, 대담 등의 원고가 빼곡하게 집대성돼 있다.
워낙 많은 글에서 워낙 많은 논지를 펼쳤지만 박현채 사상의 핵심은 결국 60년대 정립된 ‘민족경제론’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이란 책에서 박현채의 사상을 분석한 김원의 요약을 참고해 보자.
“도식적인 위험이 있지만 (박현채의 사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저개발국가에서 양적 성장은 경제자립의 길이 아니다.
(2) 이는 식민지 초과 이윤의 수단으로 식민지 지배라는 외부 충격에 의해 자본주의가 전개됐던 역사적 단초를 갖기 때문이다.
(3) 도농 간의 균형 있는 사회적 분업이 아닌 ‘이중구조’가 고착화됐다.
(4) 계층 간 부조화의 경제적 조건은 식민지 이식형 자본주의의 ‘특수성’에 기초한 국민경제의 자율적 재생산 구조의 결여와 종속성 때문이다.
(5) 식민지 이식형 자본주의의 변형으로 전근대성과 매판성을 자기 속성으로 하는 ‘관료자본’의 형성.
(6) 대안으로서 식민지적 경제구조의 변혁적 극복, 상대적 자급자족 체제의 구축, 공업소도시를 기반으로 하는 촌락이 이룩하는 국지적 시장권 형성이 필요하다.”
포인트는 두 가지 정도다.
첫째, 국가경제의 자주적 속성을 강조하는 박현채의 사상은 21세기인 지금에 와서도 ‘FTA 반대’ ‘골목상권 보호’ 등의 논리로 변형·계승되고 있다는 점(자급자족은 빨치산의 기본정신이기도 하다).
둘째, 한 번 읽어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점.
김원의 요약본이 투박해서가 아니다. 박현채의 문장은 원래 이해하기 어렵기로 정평이 나 있다.
여기에 대해 박현채를 존경하는 많은 후배들은 ‘시대 탓’을 한다. 즉, 이승만에서 박정희로 이어지는 반공(反共)의 시대가 빨치산 출신 경제학자인 박현채로 하여금 드러내 놓고 자신의 신념을 말하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막시즘’이라는 표현을 대놓고 쓸 수 없었던 당시의 사정을 감안할 때 이는 일부 사실이다.
한편 다른 이유도 전해진다. 후배 경제학자 이대근의 증언에 따르면 박현채는 “정상적인 국어교육을 제대로 받을 기회를 갖지 못한 탓”이라는 이유를 대기도 했다. 황국신민서사를 외우며 국민학교를 다녔던 박현채 어린이는 끝내 자신의 문장에서 일본식 문체를 솎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박현채는 일제강점기의 비극을 끌어안고 일본식 어투로 ‘민족 경제’를 말한 셈이다. 이것은 작지만 의미 있는 아이러니다. 누구의 삶이 그렇지 않겠는가 만은, 박현채의 삶 또한 모순과 역설의 덩어리였기 때문이다.
不義에 맞선(?) 빨치산, 不義에 구원 받다
박현채의 삶에 깃든 미묘한 모순에 주목하기 위해 다시 시계를 그의 빨치산 시절로 돌려보자. 빨치산 돌격중대 문화부 중대장으로 활약했던 소년대원 박현채는 1952년 8월 4일 전라남도 화순 경찰에 체포됐다. 8월 5일 실시될 정·부통령 선거를 방해하기 위한 투쟁에 필요한 물건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경찰의 수사망에 적발된 것이다. 이중첩자에 의해 동선이 파악됐다는 점은 빨치산 조직의 순수성과 효율성에 심대한 의문을 갖도록 만들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다급해진 것은 그의 가족들이었다. 즉시 ‘박현채 구출작전’에 돌입했다. 온 식구들이 탄원서를 돌렸고, 특히 박현채의 아버지 박경모는 화순경찰서장에게 무릎을 꿇고 돈을 갖다 줬다는 후문이다. 어머니 오순희 역시 30~50가마니 상당의 쌀을 뇌물로 전달했다. 이승만 정권의 부패에 분노하며 세상의 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산으로 들어갔던 소년 박현채가 권력의 부패 덕분에 일신의 위기를 모면했다는 아이러니. 결국 박현채는 한 달여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박경모는 아들 박현채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입산했다는 사실은 아직 소문이 나지 않았다. 이 돈 갖고 고향을 떠나라. 앞으로 내가 오라고 할 때까지는 집에 오지 마라.”
고향을 뜬 박현채는 전주로 거처를 옮겨 전주고등학교 3학년으로 편입했다. 이때가 1954년,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의 일이다. 전쟁 직후라 학교편제도 어수선했던 모양이지만 이 무렵의 박현채에게 전주행은 상당한 충격이었을지 모른다. 그의 원래 목표는 ‘김일성대학’이었기 때문이다.
“(빨치산 시절) 나는 심사를 받았고 해방 후의 업무를 김일성대학 경제학과에의 진학이라는 형태로 배정받는다. 나는 내가 고등학교 1학년 곧 중학교 4학년이라는 것을 강조했으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김일성대학에 가면 개별적으로 지도원이 배속돼 나를 지도함으로써 학력의 격차에서 오는 어려움은 당 지도의 차원에서 극복될 수 있고, 대학 과정은 충실하게 이수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의 우리의 모든 활동은 해방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박현채 <회고록> 中)
화장실에서 재연된 ‘동족상잔의 비극’
평양까지 뻗어 있었던 그의 꿈은 전주에서 멈추고 말았지만 지식인으로서의 삶은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전주고에서 1년을 수학한 박현채는 1955년 서울대 상대에 합격했다. ‘산사람’으로 총을 들었던 2년의 세월도 그의 우수한 두뇌를 퇴색시키진 못했던 걸까. 빨치산으로서는 첩자에게 놀아나 어리숙하게 검거당한 박현채였지만 펜과 칼을 들자 물 만난 고기처럼 상황은 순조로워졌다. 안병직 전철환 정윤형 등과 학술동아리 후진국연구회를 만든 것은 하나의 시발점에 지나지 않았다.
박현채는 대학생들을 데리고 농촌 봉사활동을 떠나며 이른바 ‘농활’의 시금석을 닦았다. “대학생들이 농촌으로 봉사활동을 간 것은 3·1운동 직후 이래 처음”이라고 ‘박현채 평전’의 저자 김삼웅은 말한다.
한국 경제학계의 대표적인 농본주의자(農本主義者)였던 박현채에게 ‘농활의 원조’라는 닉네임만큼 잘 어울리는 스펙도 없을 것이다. 물론 그 이후 대한민국의 대학생들 수백만 명이 바로 그 농활을 통해서 극도로 편향된 민족사관을 ‘정의’랍시고 답습했음을 상기하면 가슴이 답답해질 노릇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박현채는 학자로서 이론을 다뤘을 뿐 아니라 대학생 시절부터 일종의 ‘문화 형성’에도 기여한 바가 큰 셈이다. 게다가 교실에선 ‘자본론’을 근거로 들어가며 학과 교수들을 골탕 먹이기도 한 모양이다. 김일성대학만큼 마음에 들진 않았겠지만 서울대에서의 생활은 꽤나 견딜 만 했던 것 같다.
그의 유일한 불안요소는 빨치산 경력이 남들에게 알려지는 것뿐이었다. 서울대 화장실에서 자신의 빨치산 경력을 알고 있던 후배를 마주친 박현채가 다짜고짜 그의 멱살을 붙잡고 “나를 보았다는 사실을 입 밖에 내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한 일화는 꽤 유명하다.
화장실 한 번 잘못 갔다가 목숨의 협박을 받은 후배는 겁에 질려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위기를 모면한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대 화장실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이 재연될 뻔했던 셈. “민족이 곧 민중이고 민중이 곧 민주주의”라는 삼위일체의 등식을 가히 종교적 반열에까지 끌어올린 대(大)학자, “민족은 인류가 만든 최고의 인종공동체”라고 말했던 민족주의자도 청춘의 피는 끓었던 것일까. 그러나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1964년 발생한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에서 당을 조직한 혐의로 검거되고 1979년 발생한 임동규 간첩사건에 연루돼 구속됐을 무렵 그의 빨치산 경력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주홍글씨가 돼 있었다.
인혁당에 대한 현재의 평가는 극명하게 갈리지만 증언자들은 남아 있다. 1962년 당시 서울대 대학원생이었던 안병직 교수가 대표적이다. 현재 우파로 전향한 안 교수에 증언에 의하면 당시 박현채는 안병직의 ‘공산주의 교육 멘토’였다. “인혁당은 남한에서 자발적으로 생긴 공산혁명을 위한 조직”이었다는 게 안병직 교수의 고백이다.
‘불온한 경제학자’의 아성
일생을 통틀어 박현채는 한 번도 자신의 공산주의적 신념을 부정하거나 오류를 시인하거나 반성한 적이 없다. 그랬으니 소련 붕괴가 그의 인생 말년에 들이닥친 최악의 재앙이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다. 타고난 강골이었던 박현채는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갑자기 기운을 잃은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2년 뒤인 1993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1995년 8월 17일 사망하게 된다.
소설가 조정래의 증언에 따르면 박현채는 “사회주의가 몰락하지 않으려면 다당제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양당제는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사회주의의 ‘미래’를 고민했던 셈이다.
물론 이 무렵 그토록 치열하게 논변을 개진했던 박현채의 펜 끝은 많이 무뎌져 있는 상태였다. 특히 박정희 경제의 눈부신 성공은 아무리 박현채라 해도 차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계획이 모든 반대자들의 예상을 뛰어넘어 폭발적 성공을 거두자 박현채조차도 일말의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박정희가 없었다면 한국이 현재와 같이 될 수 없었을 것이란 대목에서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을 인정했다. 또한 박정희 정권의 독재는 문제가 있지만 경제를 일으키고 국민의 의지를 하나로 모은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김원)
하지만 박현채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박해지고 있었다. “박현채가 ‘한국농업의 구상’에서 제안한 대로 실행했으면 지금쯤 북한이 돼 있을 것”이라는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여전히 “공산주의도 틀렸지만 자본주의도 글렀어”라고 말하는 시인 신경림이 박현채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를 보자.
“지금 읽어보면 마르크스 이론은 오류 판이야. 공산당 선언도 오류투성이고. 인간에 대해 아주 잘못 파악하고 있어. (…) 공산주의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가치가 없어. 이제 와 보면 박현채 씨 생각, 리영희 씨 생각도 다 오류잖아. 문화대혁명에 대한 리영희 씨 판단은 틀렸다기보다 웃긴 거지.” (신동아 2014년 4월호)
이와 같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좌파들 사이에서 박현채의 아성은 여전히 굳건하다. 그의 삶에 대해 얘기하는 후학들의 문장에는 경외심과 존경심이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스스로 직업을 ‘강사업’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보따리 강사 생활을 하며 한평생 학교를 떠나지 않았던 학자의 이론적 오류가 명백해졌는데도 면면히 이어지는 이 존경심의 정체는 뭘까.
고평가, 혹은 특수평가
두 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첫 번째는 박정희로 대표되는 일련의 시대로부터 그가 끊임없이 견제를 받았다는 사실 그 자체다. ‘끊임없이 공격받는 순결한 선구자’의 이미지는 이론의 허위성과 관계없이 박현채의 가치를 높여 놓았던 것이다.
이를 증명해 줄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젊은 시절 후배의 목숨까지를 위협해가며 숨기려고 애썼던 빨치산 경력을 말년의 그가 자랑스럽게 생각, 아니 심지어 ‘신성시’했다는 사실이다(중학교 시절 친구 최창학의 증언). 산행을 하다가 싸리나무 가지를 발견하면 “저게 빨치산들한테는 얼마나 귀한 것인 줄 아느냐”고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에 물었다는 일화도 있다. 하얗게 말라 죽은 싸리나무는 태워도 연기가 나지 않기 때문에 빨치산들이 밥 짓는 데는 그만큼 소중한 연료가 없다는 것이었다(소설가 송기숙의 증언).
빨치산 경력을 자랑스러워하는 그에게 있어 시련의 과거는 이미 하나의 ‘훈장’이었던 게 아닐까. 굴곡진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냈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박현채는 후배들에게 감히 쉽게 폄하될 수 없는 아성을 획득했다.
물론 이러한 감성적 측면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수많은 오류에도 불구하고 박현채가 지금까지 일군의 세력으로부터 존경받을 수 있는 데에는 그의 연구에 커다란 빚을 지고 있는 한 거물 정치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비록 둘의 학문적 교류는 한때의 공동 작업으로 그쳤고 시간이 흐를수록 박현채는 이 사람을 비판하게 되지만 오히려 그럼으로써 박현채의 아성은 더 공고해질 수 있었다. 학자는 때때로 적(敵)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박현채에게 빚을 진 한편으로 그의 학문적 위상을 담보해 줬던 이 거물 정치인의 이름은 무엇일까.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이다. 이제 와서 박현채를 부정하면 김대중의 초기 경제관을 전부 부정해야 한다. 이것은 곧 한 시대를, 그리고 그 시대와 싸우며 키워온 자신의 커리어까지를 송두리째 부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한국의 좌파 지식인 후배들은 과연 그럴 수 있는 용기와 진실성을 가졌을까. (계속)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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