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들의 신혼여행지 1위는 어디일까? 태국이다. 통계에 따르면 태국 푸켓이 전체 신혼여행 지역 중 23.6%를 차지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부담 없는 것이 이유다. 하지만 최근 태국으로 여행을 가려는 신혼부부들에게 걱정이 생겼다. 태국의 정국이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근하고 따뜻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시위대와 군부가 들어찼다. 전문가들도 앞으로의 사태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태국은 왜 이런 사태를 맞게 됐을까? 시계를 작년 가을로 돌려보자
2013년 11월 1일 ‘포괄적 정치사면법안’이 태국 하원에서 통과됐다. 이 법안은 정치적 사건이나 시위와 관련돼 유죄를 선고받거나 기소된 정치인 등을 포괄적으로 사면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태국 야당인 민주당은 부정부패로 해외 망명중인 탁신 친나왓 前 총리를 사면하려는 것이라며 반발했다. 反정부 세력 ‘옐로셔츠’도 이에 반발하며 시위를 벌일 것을 예고했다.
12월 9일 시위 규모가 커지자 잉락 총리는 정국안정을 위해 하원 해산을 선언하고 2월 2일 조기총선을 실시할 것을 발표했다.
2014년 1월 21일 시위대가 공무원들의 출근을 막고 주요 도로를 점거하는 ‘셧다운’ 집회를 2주째 벌이자 정부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22일부터 60일간 시행되는 국가 비상사태로 정부는 언론 검열과 집회 및 통행금지, 영장 없는 구금을 할 수 있게 됐다.
3월 21일 헌법재판소가 2월 2일 실시된 조기총선은 무효라고 결정했다. 헌재 대변인은 “당시 선거가 같은 날 전국적으로 실시되지 않아 헌법의 관계조항에 위배됐다”며 재판부가 찬성 6, 반대 3으로 무효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지난 2일 실시된 조기총선은 ‘옐로셔츠’와 민주당의 방해와 선거거부로 전체 선거구 중 18%인 69개 선거구에서 투표가 무산된 바 있다. 여당인 푸어타이당은 “헌재의 조기총선 무효 결정으로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됐다”고 비난했다.
잉락 총리 해임되다
5월 7일 태국 헌법재판소가 잉락 친나왓 총리를 해임하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2011년 잉락 총리가 결정한 타윌 플리엔스리 국가안보위원회(NSC) 의장의 인사이동이었다.
헌재는 잉락 총리가 자신이 속한 집권당에 유리하도록 권력을 남용했다는 야당의 제소에 잉락 총리의 결정은 권력남용이라고 판단했다. 이날 인사이동에 관련했던 부총리 4명을 포함한 장관 9명도 같이 해임됐다.
장관 9명 중에는 수라퐁 또위짝차이꾼 외교부 장관, 아누딧 정보통신부 장관, 차렘 유밤룽 노동부 장관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헌재는 인사이동에 관련하지 않았던 관료에 대해서는 다음 내각이 선출될 때까지 임기를 수행할 것을 허락했다. 잉락 총리가 해임되고 7월 20일 재총선 전까지 니와툼롱 분송파이산 상무 장관이 과도총리 대행직을 맡게 됐다.
그러나 反정부 시위대 지도자 수텝 터억수반 前 부총리는 니와툼롱 과도총리 대행이 정부를 이끌 권한과 지위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중도 성향의 새 총리로 과도정부를 구성하고 선거 시스템을 재정비한 후 선거를 치르자고 주장했다.
이대로 재총선이 실시된다면 다시 親탁신계 정부가 들어설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태국 유권자 4300만명 중 친정부 성향이 강한 북부 지역과 동북부 지역의 유권자 수가 전체의 50%에 달하고 이 중 80%는 현 정부를 지지하고 있다.
5월 9일 1만 명이 넘는 反정부 시위대 옐로셔츠가 다시 거리로 나왔다. 잉락 총리의 실각에도 푸어타이당을 중심으로 親탁신계 내각이 유지되자 벌인 행동이다.
시위대는 “과도총리 대행을 포함해 집권 푸어타이당 내각이 3일 안에 퇴진해야 한다”며 정부 청사와 방송국 등으로 나뉘어 행진했다. 이 와중에 태국 경찰이 시위대를 막는 과정에서 물대포와 최루탄을 발사해 부상자 5명이 나왔다. 親정부 시위대 ‘레드셔츠’는 헌재 결정을 인정할 수 없다며 거리로 나설 것임을 예고했다.
5월 15일 잉락 총리 해임 이후 처음으로 사망자가 발생했다. 새벽 2시50분 경 방콕에 있는 ‘민주화 성지’ 민주주의 기념탑 인근에서 총격이 발생, 반정부 시위대 경비요원 2명이 사망하고 21명이 부상당했다.
경찰 관계자는 “반정부 시위대가 모여 있던 바리케이드 인근에서 총격이 발생해 1명이 숨졌다”며 “이후 민주화 기념비 인근에 있던 반정부 시위대로 M79 수류탄이 날아들며 추가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에 따라 반정부 시위가 시작된 지난해 11월부터 지금까지 발생한 사망자는 27명으로 늘었다.
옐로셔츠는 군부, 상원, 헌법재판소, 대법원 등 국가 주요 권력기관에 16일까지 새 총리를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현 정부가 완전히 물러나야 하며 향후 선거 없이 지금의 의회를 대신할 국민정부와 국민의회를 꾸려 정치개혁을 실시할 것을 피력했다.
프라윳 찬 오차 육군 참모총장은 이날 성명을 발표해 “무고한 민간인에게 폭력과 전쟁 무기를 사용하는 이들을 비롯해 모든 집단에 경고한다”며 “폭력이 계속되면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군이 나설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이 와중에 선거위원회는 준비 부족 때문에 오는 7월 20일 재총선을 예정대로 치르기 어려울 전망이라고 밝혔다.
5월 20일 군부가 계엄령을 선포했다. 하지만 태국 군부는 이날 군 TV 방송을 통해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며 “쿠데타는 아니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5월 22일 군부가 쿠데타를 선언했다.
최근 6개월 간 태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2011년 8월 총리직에 오른 잉락 총리는 3년만에 해임됐고 27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親정부 세력 레드셔츠와 反정부 세력 옐로셔츠 간의 대립도 점점 심화되고 있다.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경제 부문도 타격을 받고 있다. 태국 자동차업계의 1분기 판매가 51만6000대로 전년 대비 26% 감소했다. 2분기에도 계획보다 20~30% 감소할 전망이다. 또 올해 태국의 예상 경제성장률이 4%대에서 2.6~3%로 떨어졌다. 올해 1분기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2%를 기록했다.
親탁신과 反탁신의 갈등
레드셔츠와 옐로셔츠의 갈등의 골을 따라 가면 그 끝에는 탁신 前 총리가 있다. 탁신은 2006년 쿠데타로 실각했지만 아직도 태국 내 중요 인물로 거론되고 있다. 지난 7일 해임된 잉락 前 총리의 친오빠이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잉락은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중요한 인사인 만큼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탁신을 따르는 레드셔츠는 그를 태국의 국부(國父)급 지도자로 여기는 반면, 싫어하는 옐로셔츠는 그를 부패에 찌든 포퓰리스트라고 말한다. 실각한 지 8년이 지난 지금도 親탁과 反탁 사이에서 태국 정국을 뒤흔드는 탁신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탁신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화려하게 태어나 처참하게 끝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49년 부유한 비단 판매상의 아들로 태어난 탁신은 1973년 경찰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美 이스턴켄터키대와 휴스턴주립대에서 형사행정으로 각각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태국으로 돌아와 경찰로 일하던 탁신은 1987년 경찰을 그만두고 사업가로 변신한다. 컴퓨터와 이동통신 사업을 시작한 탁신은 뛰어난 사업 감각으로 ‘친 그룹’을 태국 최대의 재벌기업으로 올려놓았다. 개인적으로도 1조6000억원 대의 막대한 부를 쌓았다.
탁신은 1994년 막대한 부를 엎고 외교 장관으로 공직에 입문한다. 1998년에는 타이락타이(TRT)당을 만들어 정치에 뛰어든다. 당시 태국 국민들은 외환위기 때문에 경제난을 겪고 있었다.
탁신은 그 점을 파악해 저소득층의 민심을 모으는 공약으로 당 창당 3년만인 2001년 1월 총선에서 하원 500석 중 248석을 확보해 제1당으로 올라섰다. 저소득층의 지지를 기반으로 탁신은 총선 한 달 후 태국 총리가 됐다.
탁신 정부는 본격적으로 ‘탁신표 경제정책’을 편다. 이른바 ‘탁시노믹스’다. 탁시노믹스는 저소득층과 농가를 위한 정부지원이 골자다. 대표적으로 저소득 가정의 정부 보조금 지급 및 저리자금 융자, 세금 삭감, 농가 부채 탕감, 빈곤층을 위한 30바트(900원) 의료혜택 등이었다. 실제로 이런 정부주도형 정책들은 효과를 보여주는 듯했다.
경제성장률이 2004년 약 6.5%를 달성했고 무역흑자는 17억달러에 달했다. 하지만 케인즈식 정부주도 경제정책의 한계가 보여주듯 탁시노믹스는 순간적인 현상이었다. 태국은 2005년 85억달러의 적자를 기록하고 인플레율도 7년만에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그럼에도 탁신은 멈추지 않고 재집권을 위해 2005년 2월 총선을 앞두고 농민 금고 확대, 값싼 주택 공급 등 더 파격적인 공약을 내놨다. 덕분에 TRT는 총선에서 4년 전보다 129석이나 많은 377석을 차지했고 탁신은 가볍게 재집권할 수 있었다. 하지만 늘어나는 재정적자와 함께 그의 부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2006년 1월 탁신 일가는 친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친 코퍼레이션’의 주식 49.6%를 싱가포르 국부펀드 테마섹에 팔았다. 약 20억달러(약 2조1200억원)의 막대한 차익을 얻고도 한 푼의 세금도 안 낸 사실이 밝혀지자 민심이 동요했다. 이때 反탁신 세력이자 옐로셔츠의 전신인 국민민주주의연대(PAD)가 생겼다.
PAD는 황실의 상징인 노란색 옷을 입고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다. 자신들의 세금을 정치권력을 위해 쓰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그해 9월 탁신이 미국 유엔 회의에 참석한 사이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났고 실각한 탁신은 영국으로 도피했다. 그렇게 탁신의 정치는 막이 내린 듯했다.
쿠데타 이후 민주당 정부가 들어섰지만 민심을 얻지 못했다. 오히려 레드셔츠의 전신인 ‘독재반대 민주연합전선(UDD)’과 탁신 향수에 시달리던 빈민층이 빨간 옷을 입고 등장했다. 2011년 7월 총선에서 탁신은 정치 경험이 없는 막내 여동생 잉락을 내세웠다. 잉락은 탁신의 향수에 시달리는 저소득층을 자극하며 자신의 프어타이당을 제1당으로 만들었다.
심상치 않은 군부의 움직임
잉락은 탁신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특히 쌀 수매 정책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쌀 수매 정책은 정부가 고가로 쌀을 수매해 농민의 삶을 안정시키겠다는 것이 골자다.
하지만 잉락의 이 정책은 44억달러(약 4조4000억원)의 국가 재정 손실을 입혔다. 태국 국가반부패위원회(NACC)는 잉락을 직무태만으로 기소했다. 이렇게 잉락은 직무태만과 권력남용으로 3년 만에 총리직에서 해임됐다.
지금 태국 사태에서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점은 ‘군부’의 움직임이다. 22일 군부는 쿠데타를 선언했다. 언론과 SNS가 통제되고 주요 기관들도 군부의 아래 들어가게 됐다. 이로써 군부의 색깔은 확실해졌지만 아직 모든 것을 재단하기는 어렵다. 앞으로도 여러 변수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이병도 한국외대 태국어통번역학과 교수는 군대의 잦은 개입의 원인을 태국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고 밝혔다. 1932년 입헌군주제 도입을 당시 군부가 주도했기 때문에 군부의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것이다. 이후 1973년 학생 혁명으로 군부가 잠시 물러났지만 76년 군부 쿠데타로 다시 주도권을 군부가 잡았다. 92년 방콕민주화운동이 있기 전까지 군부가 태국 정국을 좌지우지 했다.
이 교수는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예측할 수 없지만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첫째, 군부가 양측 중재를 맡아 타협안을 유도하는 것이다. 둘째, 군이 계엄령 명분을 내세운 평화통치를 하면서 다음 총선까지 과도총리를 내세우는 방법이다.
마지막은 군이 추천하는 제3의 임시총리를 상원에 추천해서 임시총리를 임명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 교수는 많은 가능성이 있는 만큼 어떤 전망도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둘째 방법으로 갈 가능성은 커졌지만 어떤 카드를 꺼내들지는 아직 미지수다.
정용승 기자 jeong_f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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