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의 대상이었던 탈북학생이 (사)물망초와 KOICA의 도움으로 스리랑카로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그 수기를 게재한다.
이아연(가명) 대학생·2003년 입국
학창 시절 대학생이 되면 꼭 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는 ‘해외봉사’였다. 배울 것이 많겠다는 믿음이 있었다. 마침 이번 한국국제협력단(KOICA) 디딤돌 해외 봉사단으로 스리랑카에 파견되는 좋은 기회가 생겨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무척 해보고 싶은 일이었기에 떠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우리는 2월 17일 저녁 8시 인천공항에 집결해 비행기를 타고 콜롬보로 떠났다. 콜롬보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4시. 숙소에 들러 잠깐 휴식을 취하고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우리 단원들은 현지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의원을 방문했다. 현지 한의원은 KOICA의 지원기관이다. 한국 한방 의료로 현지인들을 진료하는 한의원으로서 그 지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곳이다. 한의원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복도에 100명이 넘는 환자가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의학의 인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은 초조해 보이지도,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가난에도 그들의 얼굴은 평화로운 듯했다. 덕분에 나도 기다리는 그 긴 줄이 답답해 보이지 않았다.
스리랑카는 16세기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식민지였고 1790년 영국 식민지였다. 스리랑카에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싱할라족과 소수인 타밀족간의 인종 갈등으로 25년이 넘게 폭력이 반복됐다.
2008년 타밀 반군의 마지막 거점이 함락됨으로써 내전은 일단 종식됐다. 민족이 다르고 언어가 달라 소통이 없던 스리랑카는 현재 중등교육과정에서 2개 국어 교육을 제안함으로써 소통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곧바로 KOICA 스리랑카지부(콜롬보 위치) 사무실로 이동해 KOICA가 스리랑카에서 어떠한 일들을 하는지 스리랑카지부 소장님을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폴거허웰러 학교 학생들과의 첫 만남
이 기구는 스리랑카 국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한 시스템 구축 노력을 꾸준히 하고 있었다. 한국국제협력단이라는 말을 추상적이고 낯설게 생각했는데 조금이나마 그 역할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스리랑카를 이해하고 공부하면서 봉사활동을 준비했다.
우리는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콜롬보에서 4시간가량 떨어져 있는 쿠루네갈라 지역으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우리가 만날 학생들은 ‘폴거허웰러’ 특수학교 학생들이었다. 한국에서 장애학생들을 대상으로 봉사활동을 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언어가 통하지 않는 스리랑카 특수학교 학생들에게 계획했던 봉사를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삐뚤삐뚤한 길을 따라가니 한적한 곳에 학교가 있었다.
특수학교 학생들은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악기와 춤으로 환영해 줬다. 그리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만든 예쁜 꽃 한 송이를 주면서 두 손 모아 “아-유보-안(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는 학생들을 보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의 만남을 기다렸을 그 마음이 고마우면서 미안했고 그들의 예쁜 마음이 전해졌다. 전날 체육활동 등 계획을 세우며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족함을 많이 느껴 안타까웠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열심히 학생들과 가까워지려 노력했다.
스리랑카지부 봉사단원인 황 선생님이 하시는 종이접기 수업 보조를 하면서 힘들어하는 학생들을 도와줬다. 학생들과 함께 차근차근 따라하면서 우산 하나를 만들었다. 다 만들고 나서 선물로 주려는 학생도 있었고 머리에 얹는 학생도 있었다. 나는 그냥 학생들의 해맑은 웃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스리랑카 학생들과의 교감
종이접기를 통해 조금 가까워진 우리는 운동장에 나가 체육활동을 했다. 국민 체조를 시작으로 우리가 준비한 체육활동을 했다. 언어가 통하진 않았지만 학생들이 즐거워 보여서 다행이었다. 우리가 계획했던 신문지 게임, 풍선 터뜨리기 게임, 축구공 게임을 통해 많이 친밀해졌다. 맑고 큰 눈으로 해맑게 웃던 학생들의 얼굴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순수한 사람들을 만나 내 자신이 정화된 느낌이다. 부모님의 얼굴에 긴장과 삶의 고뇌가 녹아 있었다면 짠하거나 동정심 같은 마음이 나도 모르게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느낌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음악이 나오면 즐길 줄 알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면서 사는 ‘흥’을 아는 그들이 좋았다.
두 번째는 암반폴러 특수학교 학생들과의 만남이었다. 다음으로는 삼보디 루누윌러 장애인시설 사람들과도 체육활동을 했다. 첫날보다는 매끄럽게 진행이 돼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나는 그들을 보며 행복했다. 중간 중간 챙겨주시는 간식거리로 배를 든든히 채울 수 있었다.
학생들이 점심을 먹고 하교하자 우리는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의자 페인트칠도 했다. 강한 햇볕 아래 누구 하나 얼굴 찌푸리는 사람 없이 즐겁게 각자 할 수 있는 일들을 빠르게 했다. 다음날 학교에 왔을 때 얼룩진 벽이 아닌 예쁜 그림이 그려진 그림을 보고 좋아할 학생들을 생각하며 힘을 냈다. 페인트가 다 벗겨진 의자가 아닌, 예쁘게 색칠된 의자에 앉아 공부할 학생들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학생들에게서 받은 감동
나는 이번 봉사활동을 통해 봉사를 하러 간 것인지 받으러 간 것인지 모를 만큼 많이 배웠다. 디딤돌 해외 봉사로 보람이 크다. 그들과 비교해서 ‘나는 이만큼 건강하니 얼마나 감사합니까?’라는 비교 감사가 아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잠깐이나마 동심의 세계에 빠져 그들과 춤추고 뛰어 놀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지친 생활을 하다가 스리랑카에 가서 강력한 에너지를 받고 온 기분이다. 준 것보다 받은 게 많아서 미안하다는 것이 이런 것을 말하는 걸까? 해외 봉사는 동정심이 아닌 그들과 진심으로 소통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KOICA의 국제협력 개발에도 관심이 생겼고 뿐만 아니라 북한 개발에도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됐다. 통일 한국에서 북한 개발과 협력을 위해 어떻게 해야 되는지 더 알아보고 공부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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