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Crazy’ 발언 이렇게 나왔다
‘노무현=Crazy’ 발언 이렇게 나왔다
  • 이상민 기자
  • 승인 2014.01.28 09: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게이츠 전 美국방장관 회고록 긴급 입수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장관의 회고록이 지난 14일 출간되면서 그가 회고록에서 한반도 이슈에 대해 언급한 내용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책에서 소개된 한반도 관련 내용을 발췌·소개하면서 게이츠 장관의 언급을 보다 정확하게 전달한다. <편집자 주>

2009년까지 이란과 북한을 ‘깡패국가’ 혹은 ‘악의 축’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들은 실제로 그런 것처럼 행동했다. 2009년 3월 두 명의 미국 여성 기자가 도보로 중국에서 북한으로 들어갔다가 스파이 혐의로 붙잡혔다.

몇 달 뒤인 7월 3명의 다른 미국인 등산객들(여성 1명, 남성 2명)은 이라크에서 이란으로 들어갔다가 붙잡혔다. 솔직히 나는 그들을 보며 참을 수 없었다.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북한이나 이란의 국경 근처에서 그렇게 돌아다닐 수가 있는가. 어쨌든 우리는 그들을 빼내오기 위해 노력했다.

북한 정권은 전임 미국 대통령이 그들을 데리러 올 경우에만 두 여인을 풀어주겠다고 말했다. 힐러리(국무장관)는 카터 전 대통령에게 가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카터 전 대통령은 자신이 북한에 가면 두 여성을 풀어내는 것 뿐 아니라 미국과 북한 관계에 대한 광범위한 면을 의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힐러리가 카터 전 대통령에게 북한으로부터 여성들을 풀어준다는 사전 보장이 없이는 북한에 갈 수 없다고 하자 그는 “당신은 조건을 강요할 수 없다. 그들은 주권국가다!”라고 응수했다.

나는 카터나 클린턴 전 대통령이 북한에 가는 것을 반대했다. 전임 대통령에게 심하게 창피를 주거나 조건을 강요하도록 북한에 기회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클린턴 전 대통령이 북한에 가서 두 명의 여성을 데리고 왔다. 이란은 1년 뒤에 여성 등산객을 풀어줬고 3년 뒤에 2명의 남성 등산객을 풀어줬다. 이 모든 것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었다. (p329~330)

2009년 10월 26일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제1부주석인 쉬차이 허우 장군이 마침내 미국에 왔다. 나는 워싱턴에서 몇 마일 떨어진 여름 별장에서 그와 대표단을 접대했다. 나는 그 옆에 앉게 됐고 그것은 그와 개인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나는 북한 주제를 꺼냈다. 북한 불안정의 위험과 북한이 붕괴할 경우 중국과 한국에 미칠 위험 등 세부적인 위험을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의 핵무기와 핵물질을 어떻게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솔직한 대화를 하는 것이 상호 이익이 된다고 말했다.

이런 주제를 꺼내는 것으로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이 분명했다. “북한에 대한 당신의 의견에 고맙다”가 그가 내게 말한 응답의 전부였다. (p. 414)

싱가포르에서 내게 가장 중요한 개인적 만남은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이었다. 나는 그를 정말 좋아했다. 그는 정신이 강인하고 현실적이며 매우 친미적이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전임자와 비교되는 것이었다. 나는 2007년 11월 서울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는데 그는 반미였고 아마도 약간 미쳐 있었다. 그는 내게 아시아에서 가장 큰 안보 위협은 미국과 일본이라고 말했다.)

 

천안함 이후 바뀐 한국의 태도

두 달 전인 3월 26일 북한은 한국의 천안함을 격침시키는 뻔뻔한 도발을 했다. 이 대통령은 중국 최고지도층에게 북한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경고했다고 내게 말했다. 나는 행동하지 않으면 김정일의 후계자가 군부에게 자신은 거칠고 그렇게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꼴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 대통령도 동의했고 UN은 북한에 대한 경제적, 외교적 제재를 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이를 포기할 때까지 6자회담은 열릴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동의했다. (p. 416)

힐러리와 나는 중요한 상징으로 판문점의 휴전선을 방문했다. 휴전선 너머 북한쪽을 망원경으로 보았던 언덕 정상으로 갔다. 보이는 것은 나무 뿐이었다. 판문점에서 우리는 휴전선 위에 있는 작은 건물에 들어갔다. 그곳은 북한과 UN사의 군사 대표들이 만나는 곳이었다.

설명을 듣고 있을 때 매우 크고 위협적인 북한 군인이 창문 밖에서 힐러리와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고개를 바르게 세우려 했고 나는 창문에 가서 매우 비외교적인 뭔가를 하고 싶은 유혹을 참느라고 힘들었다. (p. 418)

북한이 한국의 연평도에 포격을 가한 11월 23일 우리는 매우 위험한 상황을 다뤄야 했다. 한국은 30년 동안 이런 도발을 인내하며 당해왔다. 하지만 그해 3월 북한이 천안함을 격침시키자 한국에서 태도의 변화가 있었다. 특히 이번 포격으로 무고한 한국시민들이 죽자 보복해야 한다는 요구가 한국에서 컸다.

한국의 원래 보복 계획은 전폭기와 포격 등 대규모 공격이었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우리는 그런 보복이 사태를 위험하게 악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대통령, 클린턴, 멀렌(합참의장)과 나는 며칠 동안 한국측 정부 관계자들과 전화로 계속 논의했다.

결국 한국은 이 사태를 촉발한 북한의 포대가 있는 곳을 대응 포격하는 것으로 끝냈다. 중국도 북한 지도자들에게 상황을 종료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한국과 우리는 황해에서 조지 워싱턴 항모가 이끄는 해상훈련을 실시하기로 동의했다. (p. 497)

중국 외교부장이 1월 9일 나를 중국으로 초대했을 때 나는 매번 중국과 미국 군대 간 관계 강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나는 또한 중국에 북한의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과 관련, 오바마 대통령이 그들은 미국에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고 결론을 내릴 정도의 수준이 됐다고 경고했다. 우리는 그들이 멈추지 않으면 상응하게 행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북한의 치명적인 도발들에 한국인들은 30년 넘게 인내하며 참았지만 천안함이 격침되고 연평도가 포격을 받으면서 여론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한국인들은 미래에 그런 도발에 강경하게 대응하려고 한다며 한반도에서 교전사태가 가속화될 위험이 커졌다고 경고했다. 그래서 중국은 북한이 잠잠하도록 힘을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p. 525)

애틀란타=이상민 기자 proactive09@gmail.com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