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제는 언젠가부터 한국 사회의 ‘뇌관’이 됐다. 중요한 국면마다 역사문제가 불거져 나온다. 18대 대선을 앞둔 대통령 후보들에게 “5·16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인혁당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묻는 건 마치 너무도 당연한 수순처럼 여겨졌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 하나하나가 지지자들에게 중요한 ‘정보’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정부 고위급 인사나 검찰총장 후보를 검증하는 청문회에서도 “5·16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은 반드시 나온다. 그러면 답변자들은 좌와 우를 절묘하게 가로지르는 답변을 하기 위해 고심한다. 지혜로운(?) 답변에 성공하면 그게 마치 해당 직위에 대한 역량 검증을 갈음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한국에서 역사, 특히 현대사는 사회과학이 아닌 정치의 영역에 속해 있다.
일련의 상황을 감안할 때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갈등이 한국 사회에 국가적인 충돌과 혼란을 야기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사안인지도 모른다. 어떤 국가가 자국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결국 그 나라의 교과서 안에 집약되기 때문이다. 역사교과서를 입맛에 맞게 집필하는 데 성공한 진영은 향후의 투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게 되므로 교과서 문제는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역사교과서의 경우 국정이 아닌 검정 체제로 발간되고 있어 다양한 출판사들이 각자의 개성을 살려 교과서를 집필하도록 돼 있다.
일면 다양한 시각과 관점이 활발하게 상호작용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 드러난 결과는 ‘좌편향의 가속화’였다. 애초부터 한국 사학계가 놀라울 정도로 편향돼 있어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 자체가 차단돼 있다는 것이 주된 이유로 지목된다.
학생들에게 이승만은 ‘나쁜 할아버지’
결국 한국의 역사교과서들은 건국대통령인 이승만을 ‘독재자’로 묘사할 뿐 건국의 노력에 대해서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과소평가하는 채로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자유민주주의와 ‘그냥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차이를 배우지 못하면 이승만이 자신의 삶을 바쳐 어떤 노력을 했건 그냥 ‘나쁜 할아버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짓말도 반복하면 진실이 된다”고 말한 것은 나치 선전선동의 대가 괴벨스였다.
편향적 상황에 맞서 자유민주주의의 관점에 맞게 집필된 한국사 교과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물론 있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학 교수로 재임 중인 권희영 교수를 대표 집필자로 이명희 공주대 사범대 역사교육과 교수, 장세옥 부여고 교사, 김남수 대전외고 교사, 김도형 사단법인 통일미래사회연구소 박사, 최희원 서울세종고 교사 등 6인의 필자가 모여 집필한 ‘고등학교 한국사’가 바로 그 시도였다.
이들이 유명 출판사인 교학사와 함께 한국사 교과서를 집필할 때만 해도 이 문제가 국가적인 이슈 폭탄이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존재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교과서
교학사 교과서의 존재가 처음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공격자들의 외침’을 통해서였다. 작년 8월 30일 국사편찬위원회 검정심의에서 교학사 교과서가 통과되자 역사학계와 교육계, 정치권, 언론까지 발칵 뒤집히는 일대 혼란이 일어난 것이다. 그들은 교학사 교과서를 ‘친일 교과서’로 낙인찍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약 반년의 시간 동안 대한민국 사회는 親교학사와 反교학사로 나뉘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혈전을 벌였다. 하지만 전투가 치열했던 것과는 별개로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교학사 교과서의 완벽한 패배였다.
집필된 교과서는 우선 국사편찬위원회의 검인정을 받아야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다. 각 학교들에 의해 채택 받는 과정이 있어야만 실질적으로 교사와 학생들에게 읽힐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교학사 교과서는 검인정을 받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친일교과서’라는 맹렬한 폭격을 결국 이겨내지 못했다. 전국 고등학교 2352개교 중에서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곳이 사실상 한 곳도 없게 됐기 때문이다(※ 올해 3월 개교하는 파주 한민고의 경우 채택 철회 여부를 판단 중).
이로써 교학사 교과서는 ‘세상에 존재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교과서’가 돼 버렸다. 분노한 우파 성향 국민들에 의해 구매운동이 벌어지고 있긴 하지만 교과서의 본분인 학생 독자를 얻을 길은 요원해 보인다. 조선일보의 김대중 주필은 ‘2352 對 0’이라는 칼럼에서 일련의 상황에 대해 “보수우파의 존재감에 큰 상처를 줬다”고 표현했다.
읽지 않은 이들의 공격
학교들은 자유롭게 교과서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 2352개교가 교학사 교과서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학교들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2000개가 넘는 학교 중에서 교학사라는 대형 출판사의 교과서를 채택한 곳이 하나도 없다는 건 오히려 한국이 자유사회이기 때문에 이상하게 여겨지는 부분이다.
비밀은 ‘친일 괴담’에 있다. 교학사 교과서가 ‘친일을 미화하는 교과서’라는 공격이 성공적으로 먹혔기 때문에 학교 입장에서는 채택에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하는 순간 ‘친일 학교’ ‘친일 재단’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정작 내용을 읽어 보면 교학사 교과서를 친일 교과서로 봐야 할 부분은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본지 <미래한국>을 비롯한 수많은 언론사들이 지적한 바 있다. 일례로 “교학사 교과서는 ‘한일협정으로 일본의 배상은 일단락됐다’고 표기했으므로 친일적이다”라는 비판에 대해 대표 집필자 권희영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교학사 교과서는 무조건 친일 교과서가 돼야 한다는 식으로 덮어씌우는 것입니다. 야당과 학생이 굴욕적이라고 저항했고 민간인 피해보상, 일본군 위안부, 일본 역사왜곡, 야스쿠니 참배 문제를 모두 언급하면서 미완의 과제임을 자세하게 서술했어요. 교학사 교과서를 왜곡해서 선전선동 해보자는 것일 뿐입니다.”
왜 비판자들은 교학사 교과서가 하지도 않은 얘기를 근거로 친일 교과서라는 프레임을 씌운 것일까. 이 단순한 의문은 중요하다. 실질적으로 교학사 교과서에 가해진 비판은 교과서를 읽어보지도 않은 사람들에 의해 감행된 바 크기 때문이다.
한때 인터넷에서는 교학사 교과서에 대해 “김구 선생을 테러리스트로, 유관순 열사를 여자깡패로, 5·18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내용의 괴담이 급속도로 유포됐다. 이른바 ‘루머폭탄’과 함께 알려졌기에 국민들에게 안 좋은 첫인상을 남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괴담’ 최초 유포는 민주당 의원들부터
아무리 익명의 인터넷 공간에 쓴 글이라 해도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했다면 그에 대한 처벌을 받는다. 그렇다면 교학사 교과서의 명예를 훼손한 괴담의 최초 유포자는 누구일까. 놀랍게도 우리는 이 국면에서 대한민국 최대 야당인 민주당의 국회의원들을 만나게 된다.
부산일보 기자 출신 비례대표 배재정 민주당 의원은 교학사 교과서에 대해 작년 6월 2일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는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를 테러활동을 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5·16 쿠데타를 혁명으로 미화하고 있다.”
이 중 어느 것도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교학사 교과서는 324페이지에서 “5·16 군사 정변은 헌정을 중단시킨 쿠데타였다”고 기재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배재정 의원과 동일한 주장을 했던 한겨레신문은 작년 9월 13일 정정보도까지 했다. 바른역사국민연합은 배재정 의원, 그리고 그와 비슷한 요지로 발언한 우원식 의원을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비단 국회의원들의 발언만이 아니라 교육부가 교학사에 내린 수정지침 또한 공격의 빌미가 됐다. 대표적인 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을 옹호하는 서술로 오해할 소지가 있음”이라는 수정지침을 교학사 교과서에 내린 부분이다.
이와 같은 수정지침을 내린 것 자체는 사실이기 때문에 ‘교학사 교과서=친일 교과서’라는 공식에는 더 탄력이 붙었다. 하지만 똑 같은 수정지침이 다른 교과서에도 내려진 바 있으므로 교학사에만 비판을 가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다. 애초에 단어선택이나 표현상의 사소한 뉘앙스를 수정하기 위한 지침이었다는 의미다.
‘새로운 역사투쟁’ 시작하려면
새롭게 집필된 교과서인 만큼 교학사 교과서에도 문제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근현대사 부분의 편견을 수정하는 것에 주력한 나머지 고대사 부분이 세심하게 집필되지 못했다는 점, 오탈자가 지나치게 많아 누가 봐도 급하게 집필된 흔적이 역력하다는 점 등 교학사에 가해진 비판 중 새겨들어야 할 것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한국인들은 교학사 교과서의 내용을 알기도 전에 ‘괴담’부터 먼저 들었기 때문에 이성적인 논쟁을 할 기회 자체를 원천적으로 상실 당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민족사관’의 가면을 쓴 좌편향 일색의 역사관은 누구든 나서서 수정을 시도할 필요가 있는 분야다. 교학사 교과서가 총대를 메고 나섰지만 결과는 통렬한 패배였다. 상처받고 돌아온 ‘대한민국의 진짜 역사’를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보수우파가 받은 상처를 말하기 이전에, 교학사 교과서가 맹폭을 받는 동안 한국의 보수우파는 무엇을 해야만 했는가?
한국 사회에서 절대적 소수인 자유민주주의의 지지자들은 이번 패배를 치열하게 복기하고 새로운 고민을 시작할 때를 맞고 있는지 모른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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