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안녕하다
나는 안녕하다
  • 이원우
  • 승인 2013.12.23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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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 하십니까’ … 이제 그만 물어 보세요
 

“니가 깜짝 놀랄 만한 / 얘기를 들려주마 / 아마 절대로 기쁘게 / 듣지는 못할 거다 / 뭐냐 하면 / 나는 별일 없이 산다 / 뭐 별다른 걱정 없다 / 나는 별일 없이 산다 / 이렇다 할 고민 없다”

장기하의 노래 ‘별일 없이 산다’의 첫 부분이다. 요즘 이 노래를 부르고 다니면 이른바 ‘대자보 청년’들이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 것 같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스타벅스 커피가 오늘도 변함없이 추위를 녹여주니까. 새벽 4시에 주문해도 자기 일처럼 달려오는 맥도날드가 나의 주린 배를 언제라도 채워주니까.

그 뿐인가? 우리는 대통령 더러 “몸이나 팔라”고 폭언한 여자 연예인의 초딩 같은 자필 반성문을 진지한 사과의 제스처로 받아들여주는 나라에 살고 있다. 장관을 지냈다는 사람이 장성택 처형과 이석기 사건을 동일선상에 놔도 그를 ‘자유주의자’로 치켜 세워주는 분위기에서 살고 있다. 후배에게 “여보 사랑해”라고 문자 보내다 걸린 국회의원이 민주당 원내대변인 자리에서 계속 점잖은 소리할 수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인가?

나는, 아니 지금 이 글을 읽으며 혀를 차고 있는 당신도 결국엔 별일 없이 살고 있는 거다. 연극은 그만 두자. 뱃속의 스타벅스 여신이 비웃는다.

북을 보고 얘기해 보라, 안녕들 하시냐고

공허한 질문을 멈추고 북쪽을 바라보자. 장성택 숙청이라는 거대 이슈를 목도한 평양에선 최근 “안녕들 하십니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살벌한 유행어가 스페인 독감처럼 퍼지고 있다. “다 죽여.”

날씨가 너무 춥다고? 다 죽여.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고? 다 죽여.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트릴 기세이던 장성택도 하루아침에 목이 날아가는데 사는 게 뭐 별건가? “다 죽여.” 그렇게 북쪽에선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사막처럼 메말라 간다.

적어도 북한 땅에 살고 있는 주민들 정도는 돼야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원망 섞인 한 마디를 세상에 날릴 자격이 있다. 아침이 지나면 점심을 걱정하고, 점심이 지나면 저녁을 걱정하고, 저녁이 지나면 내일 아침을 걱정해야 하는 삶. 군대에서 며칠 굶어본 정도로도 그 고통을 잊지 못하는 나로서는 도저히 낯 뜨거워서 힘들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왼손에는 휴대폰 오른손엔 마우스를 들고 태어나서 입혀주고 먹여주는 삶만 살아본 먹물 주제에 무슨 ‘세상에 안부를 물을 자격’ 따위를 탐낸단 말인가. 몰염치도 그 정도면 병이다.

고려대학교 대자보 '안녕들 하십니까'

북한에 대해 ‘김씨 왕조’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지만 요즘 상황을 보면 그 말은 비유법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서술 같다. 18세기쯤의 상황이라고 보면 적절할까. 양반과 상놈이 당원과 비당원으로 바뀌었고 이 씨가 김 씨로 바뀌었다는 차이만이 남았을 뿐이다.

이런 얘길 꺼내면 무슨 욕을 먹을지 이젠 안 봐도 패가 보인다.

“지금이 때가 어느 땐데 젊은 놈이 벌써부터 수구꼴통마냥 종북이 어떻고 안보가 어떻고….”

그렇게 말하는 그들에게 도리어 묻고 싶다.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아는가? ‘아직 통일이 되지 않은 때’다. 건국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때다.

100년 후, 1000년 후의 사람들은 2013년의 우리를 어떻게 기억할까. ‘반공 시대를 벗어나 완전히 달라진 한국을 살았던 사람들’로 기억할까? 천만에. 일단 우리부터도 과거 사람들을 그렇게 섬세하게 구분해 주지 않는다.

“지금이 때가 어느 땐데”

1000년 후의 국사책에서 우리는 결국 ‘대한민국 건국~통일 이전’ 카테고리에 분류될 거다. 삼성전자 영업이익이 아무리 올라가도 결국 우리 시대의 본질을 규정하는 건 북한의 존재라는 얘기다. 사실은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김정은은 ‘강남 스타일’ 없이도 국제적인 인지도를 획득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오직 우리 자신만 북한이 얼마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지를 모른 척한다.

후세의 사람들은 북한의 핵과 장사정포를 머리에 이고 살았으면서도 말춤을 췄던 우리를 신기하게 여길 것이다. 마치 우리가 전쟁이 한창일 때 “경성에 딴스홀을 허하라”고 외쳤던 이들을 완전 신기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고작 해야 팩트도 아닌 민영화 루머에 낚여서 짐짓 점잖은 척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물었던 에피소드는 해프닝 축에도 못 낄 거다. 그러니 “때가 어느 땐데”는 내가 해야 할 말이다. 무식(無識)에도, 그리고 외면(外面)에도 정도가 있다.

북한 문제에 관심을 갖는 청년들의 손길 

1948년 건국 이후 65년이 지났다. 한 사람의 인생으로 보면 엄청나게 긴 세월이지만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65년 동안 정말로 많은 것들이 달라졌지만 놀라울 정도로 바뀌지 않은 것도 있다.

상황이 그대로인데도 대응이 바뀐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북한의 상황을 외면하는 게 세련된 태도로 인정받는 분위기 속에서 ‘사람이 먼저’라는 헛소리는 자제하기로 하자. 우리는 북한 문제를 계속해서 거론해야 한다. 더 이상 그러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청년들은 조금만 더 영리해졌으면 좋겠다. 언젠가 무너질 북한에 대해서 미리부터 관심을 가져두는 건 본인의 비전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다. 먼 훗날 언젠가, 이 문제를 끝끝내 외면했다 결국 설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야말로 우리는 물어야 할 것이다. 그때 그렇게 남쪽만 바라보더니, 지금 안녕들 하시냐고.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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