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오샨칭~ 첸수이란~”(高山靑, 澗水藍)
대만에 관심이 없는 한국인이라도 한번쯤은 간드러진 아가씨의 이 대만 민요 ‘아리산의 꾸냥’ 노래를 들어 봤을 것이다. 아리산의 꾸냥(처녀)은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의 부인인 가수 펑리위안(彭麗媛)이 불러 양안(중국-대만)관계의 화해를 암시하기도 했다.
한때 우리 대한민국과 함께 분단의 비극이라는 동병상련을 앓았던 대만.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를 지키자고 우리와 서로 다짐했던 대만은 그러나 1992년 우리와 공식 외교관계가 단절됐다. 대만인들은 슬퍼하고 분노했으나 우리는 담담했다. 중국이라는 거인이 죽의 장막의 깊은 잠에서 깨어났기 때문이다.
기자는 대만을 지난 11월 20일부터 나흘간 방문했다. 방문의 목적은 대만대표부의 문화행사 초청이었지만 사실 대만인들의 양안관계에 대한 생각과 그들의 비전에 대해 알고 싶었던 동기가 컸다. 동아시아 질서가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인천공항에서 타이베이 국제공항까지는 약 두 시간의 거리였지만 심리적인 거리는 뉴욕이나 LA, 심지어 베이징과 도쿄보다 훨씬 멀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어를 아주 조금밖에 못하는 기자로서는 영어로 그들을 중국인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타이완 사람이라고 불러야 할지 솔직히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타이베이시에서 이내 편해졌다. 대만인들 자신도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 한국인 당신이 모르는 건 당연하다는 대답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타이베이시는 우리 서울과 아주 닮았다. 누가 누구를 베꼈는지 아리송한 버스 정류장 시스템과 수많은 편의점들, 그리고 사람들의 표정은 처음에 가졌던 미묘한 이질감을 한 순간에 지워버렸다. 다만 대만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검소해보였고 실용적이었으며 친절하고 배려심이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서울과 닮은 타이베이시
일단 타이베이시에서 받은 첫 인상은 거리들이 마치 우리 용산이나 장충동의 어딘가와 착각할 만큼 닮았다는 것인데 인도마다 즐비하게 세워 놓은 오토바이들 때문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도시의 신발장’같다. 오토바이는 타이베이 시민들의 발이라 할 정도로 대중교통의 수단이 된다. 젊은 여성이 남자를 태우고 달리는 오토바이도 있고 중년의 여성이 다른 중년의 여성을 뒤에 태우고 달리기도 한다.
“오토바이 사고가 많겠군요.”
내 말에 가이드는 손사래를 친다. 대만 인구 2400만에 오토바이가 약 1000만대인데 그 사고율이 10만대당 한 건 꼴이라고 한다. 이유는? 오토바이가 대중교통이 되면서 오토바이만의 운전질서가 사람들에게 자리잡은 거다.
자유주의 경제학자 하이예크는 그런 것을 ‘자생적 질서’라고 했다. 관습적 질서가 법보다 잘 지켜지면 사고가 적어진다. 오토바이가 소수의 교통수단이었다면 오토바이 사고가 더 많이 났을 것이다.
자유중국, 대만의 사회 질서는 매우 잘 자리잡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택시들이 인상적이었는데 타이베이시의 택시기사들은 매우 친절했다. 그런데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택시들이 너무나 많고 빈 택시들이 대부분이라는 것. 그렇다면 경쟁이 치열해서 택시기사들이 악에 받치는 게 정상이 아닐까. 우리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자생적 질서의 현장
“대만에는 택시업이 완전 자유예요. 그래서 부업으로 택시 한 대를 가지고 퇴근 후 나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이 많죠. 심지어 자가용 대신 택시를 가지고 자기 업무 보면서 손님도 태우고 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자신도 택시 한 대를 갖고 있다는 가이드는 일이 없을 때는 택시기사를 뛴다고 했다. 누구나 하기 싫으면 그만두면 된다는 이야기다. 우리로 치자면 길가의 노점상이나 같다. 당연히 대만의 택시시장은 무한공급자와 무한수요자가 만나는 규제 없는 완전경쟁이어서 오히려 안정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택시로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사람들이 택시업을 한다는 이야기다.
“저도 택시를 처음 할 때는 힘들었어요. 타이베이에 와서 처음 택시일을 하는데 지리를 모르니… 그래서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영업을 했어요. 그래도 누구 하나 짜증을 내는 손님들이 없더라고요. 다들 자기 사정처럼 여기고 길을 가르쳐 줬죠.”
1982년에 울산에서 대만으로 이주했다는 화교 출신의 가이드는 대만 사람들에 대해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내게 들려줬다. 모택동과 국공합작 이후 공산당에 패한 장개석과 그의 세력은 대륙을 떠나 대만에 이주했다.
그 과정에서 장개석의 군대만이 대만으로 건너온 것이 아니라 250만명의 대륙 중국인들이 함께 대만으로 넘어왔던 것. 그들은 대부분 모택동의 민족 공산주의의 파멸성을 깨달았던 지식인들과 기업인들이었다.
한마디로 중국의 엘리트들이 대만으로 옮겨 왔다는 것인데, 그들은 대만에서 반공의 중요성과 자유 사회의 원리를 일찍이 깨닫고 ‘자유중국’이라는 체제이념을 채택했던 것이다. 그러한 문화적 선진성이 오늘 대만인들의 의식구조에서 개인의 가치와 자유주의 정신을 발현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의 친절함과 배려정신은 그런 관습의 질서로 형성된 것이라는 이야기다.
대만은 1인당 국민소득면에서 우리와 비슷하지만 사회와 질서의식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고 개인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인식도 우리보다 더 성숙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면모는 대만의 택시기사로부터 재래시장통의 상인들 사이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손님을 속이지 않았으며 부당한 바가지는 볼 수 없었다.
대개 외국인에게 바가지를 씌우기 마련인 재래시장에서도 대만 상인들은 정가에 쓰인 가격에서 내국인에게 할인해 주는 가격을 내게 꼬박꼬박 적용해 줬다. 다만 내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점에 좀 섭섭해 하는 것 같기는 했다.
대만인들이 일본을 좋아하는 이유
“왜 대만인들은 일본을 그렇게 좋아하죠?”
“일본이 대만을 청나라의 핍박에서 해방시키고 문명화시켜줬기 때문이지요.”
가이드의 설명이다. 명나라 때 대만으로 이주했던 내성인들은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대만을 청으로부터 넘겨받으면서 청의 수탈지배로부터 벗어났다. 그리고 일본의 근대화에 힘입어 교육과 기술, 경제가 발전했다. 그러한 내성인들이 장개석을 따라 건너온 외성인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아 그 비율은 8:2에 이른다.
대만인들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없다. 그것이 일본의 투자유치와 경제협력에 중요한 동기가 돼 왔다. 일·중관계가 악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는 그런 대일본 우호 분위기가 대만·일본간의 경제 문화 교류에 더 큰 중요성을 부과하고 있다.
재래시장에 와서 물건을 사는 기자가 일본인이었기를 대만인들이 바라는 것도 그런 까닭이라는 이야기다. 대만은 중국의 경제성장으로 인해 많은 산업체가 중국 본토로 이주했고 산업화의 공동화가 진행됐다. 그것이 대만 경제를 힘들게 해왔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대만에서는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다. 문화산업의 진흥이다.
대만 정부는 2010년부터 매년 국내외 8만여 명이 관람하는 대만 국제문화창의산업박람회(Taiwan International Cultural and Creative Industry Expo)를 타이베이시에서 개최해 왔다. 올해 2013년 행사는 지난 11월 21일부터 시작해 24일까지 성황리에 개최됐다.
대만 정부는 이 행사를 홍콩, 마카오, 상해 등 광동어권 지역 도시들과 함께 개최한다. 행사의 여러 부분에서 대만이 중국문화의 정수를 승계하려 한다는 느낌을 여러 차례 받았다. 실제로 이 행사에 초청된 언론사들 가운데 베이징쪽의 메이저들은 없었다.
이것은 대만 문화부가 광동문화권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토대로 중국 문화 전통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사실 이번 행사에 참여한 문화사업체들의 면모 역시 북방의 장엄한 분위기와는 달리 밝고 화려하고 섬세한 남방 문화의 성격들이 두드러졌다.
행사에서 단연 주목을 끈 주인공은 룽잉타이 대만 문화부 장관.
여류작가 출신의 룽잉타이 장관은 개막식에서 흔히 한국과 중국에서 볼 수 있는 관료적인 개회사가 아니라 마치 TED를 연상케 하는 강연으로 매스컴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왜 문화가 산업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는지를 아주 설득력 있게 설파했다. 그러면서 대만은 이제 중소산업국에서 창조적인 문화예술 산업국으로 도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기에는 5천년 역사를 가진 중국문화의 정통성이라는 두텁고도 묵직한 대만인들의 자부심이 있었다.
룽잉타이 장관은 한국 기자들과도 인터뷰를 했다. “한국과 대만은 단교의 역사를 가졌지만 문화가 둘 사이를 엮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이 통찰력 깊은 여성 장관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룽잉타이 장관은 “한국 정부의 문화정책을 항상 눈여겨보고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실제로 이번 행사에 대만 문화부는 한국의 전통공예업체들과 연구소들을 초청했다.
한국 문화를 중요시하는 이유
문화박람회의 전략을 살펴보면 중국의 전통 공예와 디자인 기술을 상품으로 개발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과거 플라스틱 돼지 저금통은 남송시대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도자기 공예품으로 선보였다. 입체감을 살린 화려한 도자기들과 천연 소재를 활용한 염색 직물들은 전통적인 중국문화의 어딘가에 닿아 있으면서도 그것을 초월해 보편적인 느낌을 준다.
특히 대만에서 유일하다는 오일 글라스 작품들은 매우 독특하고 희귀한 느낌을 줬는데 작가는 프랑스 파리전에서 전문가들 사이에 깊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러한 예술적 모티브를 가진 작품이 어느 날 상품과 결합하면 그것이 창조경제를 이끌게 된다. 대만의 창조산업은 디자인과 예술성에 기반하는 전략인 것으로 여겨졌다.
사실 대만은 중소기업 강국이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개방화, 세계화 시대에는 글로벌 기업을 배출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탄탄한 기술의 대만 중소기업들이었지만 글로벌 시장 진출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 그 이유는 대만문화 특유의 실용주의에 있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훌륭한 기술에도 불구하고 미적 감각을 유발하는 디자인면에서 대만의 제품들은 글로벌 기업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런 약점을 중국 문화의 계승 발전으로 돌파하겠다는 것이 이번 국제문화창의산업박람회의 의지인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의아한 생각이 든다. 왜 대만이 한국 문화와의 관계를 중요시 한다는 말일까. 이 점은 우리 정부로서도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재 대만은 마잉주 총통의 의지로 중국과 서비스무역협정을 강력하게 추구하고 있다. 이는 중국과 대만간의 방어적 안보 노력 외에 경제적 교류라는 방점을 하나 더 찍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도 결국 중화경제권이라는 큰 틀에 참여하게 될 것이며 이때 문화코드의 상품과 서비스의 주류를 대만이 잡는다면 한국은 대만에 새로운 시장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 의도가 어찌됐든 이는 좋은 현상이다. 자고로 국가간에는 서로 무역 거래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해와 평화가 증진된다.
아울러 대만은 한국에 있어서 동아시아 질서에 중국을 상대로 외교안보에 목소리를 같이 낼 수도 있는 파트너다. 그런 나라와는 민간에서 문화와 경제교류를 높이는 것이 도움이 된다.
한없이 넓은 전시장을 둘러보다 다리가 몹시 아파질 무렵 한 젊은 여성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하니 꼭 자기 부스의 상품을 소개해 달라고 한다.
이른바 ‘뷰티 마스크’라고 불리는 미용팩인데 인기 드라마의 모티브를 차용해 그 주인공의 얼굴처럼 아름다워지는 프로그램을 적용한 미용 상품이다. 홍콩에서 대박을 냈다며 한국 드라마와 제휴를 원했다. 제품에 의문이 들어 물었다.
“미용효과를 장담할 수 있나?”
아리산의 꾸냥 같은 아가씨는 자신의 얼굴을 보라고 한다. 자신이 실험 테스트 베드였단다. 그런데 정말 피부가 곱다. 내가 “믿겠다”고 말하자 그녀는 내가 홍콩에서온 바이어인 줄 알았다고 했다. 홍콩사람 같다고? 하긴 늘 해외에서 듣던 소리다. 그런 점에서 대만인들과 한국인들은 아주 먼 옛날 같은 조상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