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공산주의자 … 나는 확신한다”
“그들은 공산주의자 … 나는 확신한다”
  • 이원우
  • 승인 2013.12.13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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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부림(釜林) 사건 담당검사 고영주 변호사
부림(釜林) 당시 담당검사 고영주 변호사

영화 ‘변호인’이 곧 개봉한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고, 심지어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은 노무현이 아닌 송우석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부림이라는 실제 사건을 모델로 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부림 사건이 용공조작 사건이라는 전제 하에서 모든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다. 만약 부림 사건이 용공조작 사건이 아니라면, 명백한 공산주의 혁명운동의 다른 이름이었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여기에 ‘변호인’ 제작 이전부터 “부림은 공산운동”이라고 주장했던 또 다른 변호인이 있다. 다름 아닌 당시의 부산지검 공안부 검사이자 현재 법무법인 케이씨엘의 대표 변호사인 고영주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 위원장이다. 그의 말을 들어본다.

- 올해 초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애국시민사회진영 신년교례회에서 부림 사건에 대해 발언하신 적이 있는데요. 부림이 공산주의 운동이었다는 입장에 아직 변함이 없으십니까?

물론이죠. 저는 아직도 부림(釜林)이 공산주의 운동이었다고 확신합니다. 이건 ‘입장’의 문제가 아니에요. 제가 직접 겪은 건데 여기에 무슨 입장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부림에 대해 아무리 다른 얘길 해도 직접 수사한 제 경험을 바꿀 순 없잖아요?

- 당시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죠.

그 당시 저는 이상록이라는 제1피의자(1997년 사망)를 수사했어요. 당시 피의자는 제 앞에서 저를 굉장히 답답하단 듯이 쳐다봤습니다. 그러더니 대뜸 하는 소리가 이런 거였어요.

“검사님은 역사의 발전 법칙도 모르십니까? 역사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서 발전돼 나가는 것인데, 이에 의하면 현재의 자본주의를 거쳐 곧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하게 돼 있습니다. 역사가 변하면 주역도 바뀌는 법이고, 지금은 우리가 검사님에게 조사를 받지만 곧 도래하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우리가 검사님을 심판하게 될 겁니다.”

“우리가 곧 검사님을 심판하게 될 겁니다”

- 그래서 뭐라고 하셨나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제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했죠. 역사가 그렇게 공식에 의해서 발전하는 거라면 공산주의사회에는 모순이 없느냐, 공산주의 다음 사회에는 어떤 사회가 오냐고 했더니 발끈하더군요. “아직 공산주의도 안 왔는데 그 다음 사회를 논하는 건 언어의 유희 아닙니까? 장난하지 마십시오.” 이런 식이었어요.

그래서 나도 자네들하고 말장난할 생각이 없다, 그런데 나는 공산주의사회가 오면 살고 싶지도 않지만 만일 그때 살아 있다면 자네들 심판을 받아야지 어떻게 하겠냐, 그렇지만 지금은 자유민주주의체제고 나는 그걸 지키는 공안검사다, 그래서 당신을 조사하고 기소할 수밖에 없다, 그런 식으로 설명했습니다.

- 변호사님의 이 발언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말’을 들었으면 왜 그걸 공소장에 표현해서 그들의 죄과를 더 늘리지 않았느냐는 건데요.

그건 당연히 조서에 올리는 내용이 아니죠. 조서에 올리는 건 오로지 피의사실에 대한 내용으로 한정되는 겁니다. 피의자하고 나하고 흘러가듯이 한 얘기를 조서에 올리지는 않죠. 피의 사실에 대해서 검사가 묻고 피의자가 대답하는 것이 조서지 피의자가 검사에게 물은 걸 쓰는 게 아니잖아요.

- 당시 이상록 피의자의 경우 고문을 받은 흔적 같은 건 없었나요?

저하고 만났을 땐 전혀 없었어요. 와서 얘기하는 것도 아주 당당하게, 나중엔 거의 공갈협박 비슷한 조로 얘기를 했습니다. 고문당한 사람의 자세로는 생각할 수 없었어요. 고문을 당해서 진술을 했다거나 그런 말을 한 적도 없고요.

그때를 지금과 같은 시대로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 당시 경찰에서 조사받은 사람들은 몇 대씩 맞고 하는 게 혐의를 막론하고 무슨 범인이나 다 그랬습니다. 물론 그 시절에 폭행과 고문이 있었던 건 당연히 잘못된 일이지만 1차 기관에서 얻어맞는 경우는 허다했다는 거죠. 하지만 그것 때문에 있지도 않은 일을 말했다든지 그런 식으로 얘기하면 안 돼요. 그렇지 않습니다.

- 변호사님 발언 중에 “문재인 후보도 부림 사건에서 변호를 했다”는 내용이 있었는데요. 최근 문재인 의원은 자신이 그 사건을 변호한 적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시기적으로도 문재인 변호사는 부림 이후인 1982년 8월에 사법연수원을 수료했고요.

부림 사건이 공산주의 운동이었다는 반발이 나오니까 발을 빼려는 것 같기도 한데, 제가 그 당시에 문재인 변호사를 알 턱이 없는 상황이었어요. 심지어 노무현 변호사도 그 위 쟁쟁한 선배들에 묻혀서 진짜 거기 변호인을 했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어요.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후보가 부림 사건을 변호했다는 얘기들을 하니까, 만약 그렇다면 이런 내용(부림이 공산주의 운동이었다는 내용)을 모를 리가 없다는 취지로 한 얘기죠. 그들이 부림 사건 인맥들하고 같이 정치를 해온 것도 사실이고요. 그렇다면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는 거죠.

부림 사건이 ‘과거사 진상규명’에서 빠진 이유

- 노무현 정권 때도 검사 생활을 하셨는데요. 그 당시 부림에 대한 인식은 어땠습니까.

부림 사건이라는 게 참여정부 때 굉장히 성역시 된 사건이에요. 노무현 대통령이 부림 사건 변호인을 하면서 인권을 알고 사회를 알고 정치를 알고 결국 대통령이 되게 한 사건이었다는 거거든요. 그래서 노무현 정부 때 과거사 진상 규명을 하면서 부림 사건을 가장 첫 사건으로 놨었어요.

- 그때는 부림 사건에 대한 변호사님의 견해를 피력하시진 않았나요?

그 당시 김승규 법무부 장관께서 격려차 오셨을 때 식사 자리에서 제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림 사건이 민주화운동이나 되는 줄 알고 이걸 과거사 규명에 넣는다고 하는데,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부림은 공산주의 운동이었다, 이걸 민주화운동으로 과거사 진상 규명을 하다 보면 공산주의 운동인 게 밝혀져서 대통령에게 오히려 누가 될 수도 있다고요.

그 이후 결국은 부림이 과거사 리스트에서 빠졌어요. 다른 간첩사건을 조사한 검사들이 많이 조사를 받았지만 저는 부림 사건 가지고 과거사위원회 가서 조사를 받거나 한 적이 없어요. 부림 사건 피의자들이 재심 청구를 해서 일부 무죄를 받고 한 모양인데, 그건 당시에 수사를 진행했던 저도 모르게 이뤄진 일이에요.

(※ 2009년 법원은 부림 사건 피의자들에 대해 일부 무죄 판결을 내렸지만 국가보안법 위반 등 전체 혐의사실에 대해서는 기존 판결을 뒤집지 않았으며 지난 3월부터 부산지법이 유죄 부분에 대한 재심을 진행 중이다.)

민주화는 위장일 뿐 … 위헌적 민보상위

- 지금의 인식은 부림 사건이 민주화운동이었다는 걸로 돼 있습니다. 백과사전도 용공조작 사건으로 아예 확정하고 있고요.

부림 사건 공판 당시 사용된 용어가 뭐였냐면 ‘민중민주주의’였어요. 인민민주주의라고 하면 금방 공산주의라는 것을 알아차릴 테니까 민중민주주의라고 한 거죠. 나중에 보니 민중민주주의는 공산주의 이론의 변종이라고 볼 수 있겠더군요. 심지어 민중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를 가짜 민주주의로 규정했고요. 그래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했고 유죄판결이 확정됐습니다.

부림이 민주화운동이 돼 버린 건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민보상위) 때문인데, 그들이 한 일은 과거의 용공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바꿔놓은 것밖에 없어요.

(※ 민보상위가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사건 간부들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하자 일부 우파단체 간부들은 민보상위 위원들을 국가보안법상 편의제공죄 등으로 검찰에 고발했으나 아직도 처리되지 않고 있다.)

- 그 이후에 검찰을 나와서 변호사가 되셨는데요. 여기에도 사연이 좀 있다고 들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제가 검찰 내에서 ‘제거 대상 10걸’에 들어갔다는 말이 있었어요. 7명은 당시 검사장급이었고 검사장이 아닌 사람 3명(고영주, 이상형, 함귀용) 중에선 제가 맏이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저를 제외한 9명은 전부 나갔죠. 저만 행운이 따라서 간신히 5년을 보냈는데 다음으로 노무현 정권이 들어섰어요.

그때부터는 제가 청와대에 유일한 비토 대상으로 남았죠. DJ 정부 때 내보낼 사람은 대충 다 보냈으니까요. 게다가 저는 부림 사건이라는 연(?)까지 있었고요. 검찰에선 사람을 내보낼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인사(人事)를 통해 간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후배들 밑에 갖다 놓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저도 여러 가지 일을 겪었죠.

그러는 와중에 고검장으로 승진될 일이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제 발로 걸어 나왔습니다. 검찰에선 거의 없는 일이어서 정상명 당시 검찰총장께서 “검찰에 참신한 충격을 줬다”는 얘기까지 하셨어요.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인터뷰 /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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