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F. 케네디 대통령 사망 50주년을 맞아 미국에서 그의 일대기를 조명하는 책들이 발간되고 있다. 그 가운데 베스트셀러로 팔리는 책 2권이 있다.
버지니아대 정치학센터 소장인 래리 사바토가 쓴 ‘The Kennedy Half-Century’(케네디 50년)와 언론인 크리스토퍼 앤더슨이 쓴 ‘In These Few Precious Days’(이 소중한 날들) 이 책들에서 공통적으로 소개되는 케네디 대통령의 모습은 성적으로 방탕한 바람둥이다.
래리 사바토 교수는 “케네디 대통령은 거의 만족하지 않는 성욕을 갖고 있었다. 그는 모든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을 성적인 대상으로 취급했다”고 말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결혼 후에도 백악관 인턴, 여배우, 언론담당 비서, 자기 아내의 비서 등 다양한 여성들과 성관계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섹스의 심벌로 알려진 여배우 마릴린 먼로다.
크리스토퍼 앤더슨은 지난 8월에 출판된 자신의 저서에서 마릴린 먼로가 퍼스트 레이디 재키 케네디에게 전화해 케네디 대통령과 성관계를 했다며 곧 당신의 남편은 가정을 버리고 자기와 새 가정을 꾸릴 것이라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이 통화 내용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재키 케네디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마릴린, 너는 잭(케네디 대통령)과 결혼할 것이다. 그러면 너는 백악관에 들어올 것이고 퍼스트 레이디의 책임을 질 것이다. 나는 이사를 나갈 것이고 그러면 너는 모든 문제를 갖게 될 것이다.” 그 ‘모든 문제’는 케네디 대통령이 결혼 후 계속하고 있는 방탕한 혼외정사들이다.
케네디는 미국에서 가톨릭 신도로 대통령이 된 첫번째 인물이다. 유럽 가톨릭의 종교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 배경을 가진 미국인들 사이에서 과거 가톨릭은 환영의 대상이 아니었다.
특히, 교황 등 위계질서가 분명한 가톨릭을 종교로 가진 사람이 미국 대통령이 되면 교황의 말에 좌지우지되는 것은 아니냐는 우려가 컸다.
정교분리 선언한 케네디
1960년 민주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한 케네디는 그해 9월 12일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문제삼는 분위기를 정면 돌파하기 위해 정교 분리를 분명히 하는 연설을 한다.
“나는 가톨릭 신도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종류의 교회를 믿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종류의 미국을 믿느냐다. 나는 정교분리가 분명한 미국을 믿는다. 어떤 가톨릭 성직자도 대통령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할 수 없고 어떤 기독교 목사도 교회 성도들에게 누구에게 투표하라고 말하지 않는 미국을 믿고 있다.”
케네디의 이 연설은 자신의 가톨릭 신앙에 대한 비판을 잠재웠고 그는 미 역사상 가톨릭 신도로는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케네디의 이 연설은 미국에서 정교분리 원칙을 확립, 1963년 공립학교에서 기도하는 것이 금지되고 공공건물에 있던 십계명 조각이 제거되는 등 이른바 ‘세속주의’가 미국에서 자리잡는 근거가 됐다.
이후 미국에서는 이 세속주의를 타파하려는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과 이를 유지·확대하려는 무신론자들 간의 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무신론자들은 지금도 케네디 대통령의 이 연설을 인용하고 있다.
1961년 1월에 취임한 케네디 대통령은 그해 4월 17일 피델 카스트로 쿠바 공산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망명한 쿠바인들로 구성된 1개여단이 쿠바에 침투하는 공격을 승인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훈련을 받은 이들은 미국의 지원 약속 하에 쿠바 남부 피그만으로 침투했다.
하지만 작전 계획이 새어나가면서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의 개입을 은폐하고 소련과 전면전으로 치달을 것을 우려해 약속했던 미군의 지원 공습을 취소했다. 결국 계획은 실패했다. 쿠바에 침투했던 무장 망명 쿠바인들 중 118명이 사망하고 1200여명의 생포됐다. 쿠바계 미국인들은 케네디 대통령의 배신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고 이때부터 이들은 민주당에 등을 돌렸다.
쿠바 피그만 공격 실패는 1년 뒤 쿠바 미사일 사태를 가져왔다. 소련은 미국이 터키에 소련을 겨냥한 핵미사일을 배치하고 망명 쿠바인들을 통해 쿠바의 카스트로 공산주의 정권에 대한 전복을 시도하자 이를 억지하겠다며 소련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했다. 미국은 이 사실을 포착했고 케네디 대통령은 1962년 10월 22일 쿠바 봉쇄를 밝혔다.
케네디와 쿠바, 그리고 흐루시초프
이에 따라 미 해군이 소련 선박을 정지시켜 무기 탑재 여부를 검색하도록 해 경우에 따라 심각한 무력 충돌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군에는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10월 26일 쿠바를 향해 항진하던 소련 선단이 속도를 늦췄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같은 날 TV 뉴스에서는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만 한다면 소련은 기지 건설을 그만둘 것이라는 소련 정부의 비공식적 발표가 보도됐다.
뉴스 방영 2시간 후 소련의 흐루시초프 총리로부터 케네디 대통령 앞으로 전보가 날아들었다. 그는 미국이 쿠바의 항구 봉쇄를 해제하고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한다면 소련도 쿠바로부터 손을 뗄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다음날 두번째 전보가 도착했다. 소련이 쿠바에서 철수하는 조건으로 미국이 터키 내 나토 군사기지를 철수시켜야 한다는 새로운 요구조건이 포함돼 있었다.
케네디는 그런 소련의 압력에 굴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쿠바 봉쇄와 미사일 기지에 대한 정찰 활동을 강화했다. 이 와중에 미 정찰기 한 대가 쿠바 상공에서 격추되고 핵무기를 탑재한 것으로 믿어지는 소련 선박이 봉쇄망을 치고 있던 미 해군함정들의 코 앞에까지 다가왔다.
소련과의 전면전을 우려한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과 최후의 담판을 시도했다. 미국의 입장은 두개의 전문 중 오직 첫번째 전문에서 제시된 조건만을 미국이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내용을 담은 케네디 대통령의 전문이 흐루시초프에게 전달됐다. 결국 흐루시초프가 굴복했다.
10월 28일 흐루시초프는 쿠바 미사일 기지의 폐쇄와 소련무기의 철수를 약속하고 미국 관리들이 기지 폐쇄 상황을 감시하도록 허용하는 내용의 발표를 했다. 약속대로 기지 내 미사일 시설이 제거됐고 미국의 쿠바 해상 봉쇄도 해제됐다. 이렇게 해서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2주간의 핵전 위기는 무사히 해소됐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해결한 것은 케네디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애틀란타=이상민 기자 proactive09@gmail.com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