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잘 알려지지 않은 저작 중에 ‘토론의 38가지 법칙’이라는 책이 있다. 고상한 내용이 담겨 있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책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이기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말꼬리 잡고 늘어지기’는 기본이다. 확대해석하기, 상대방이 말할 때 딴청하기, 인신공격하기 등이 테크닉이랍시고 소개돼 있다. 대학생 시절 이 책을 읽고 나서 느낀 것은 실망감이었다. 실존주의 철학의 거장으로 알려진 사람이 고작 이런 시시껄렁한 얘기나 하고 앉아 있다니. 하지만 이유가 있었다.
책의 제목을 ‘TV토론의 법칙’으로 바꿔서 생각해 보자. 그러면 이 책은 한 순간에 ‘소중한 지침서’가 된다. 그렇지 않은가? TV토론에서는 목소리 큰 사람이 장땡이다.
TV토론을 통해 기존에 몰랐던 논리가 발견된다거나 서로 간의 이해와 공감의 폭이 넓어지는 장면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가? 없다. 우리가 토론의 스타로 기억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상대의 허점을 붙잡고 늘어져서 그를 우스운 존재로 만드는 데 성공한 이들이다. 중요한 것은 순발력이지 결코 지성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TV토론은 어쩌면 예능 프로그램보다 훨씬 더 해로운 존재인지도 모른다.
‘싸움꾼 성재기’를 보며
이제는 고인이 된 성재기 남성연대 대표에 대해 그다지 우호적인 감정을 갖지 못했던 건 그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 때문이었다. 직구 밖에 던지지 못하는 투수처럼 그는 언제나 막말을 했다.
한국에 태어난 남자의 하나로서 내심 그의 말에 공감한 부분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여자보단 남자로 사는 게 재밌지 않나’ 생각하는 사람으로선 그를 선뜻 지지하기가 망설여지기도 했다.
남성연대에 후원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다만 지켜볼 뿐이었다. 쇼펜하우어의 법칙을 온몸으로 체득한 듯 매번 목에 핏대를 올리는 그 남자를. 따지고 보면 누구하고나 잘 섞이는 성격을 가지고 모두가 좋아하는 말을 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었다면 애초부터 남성운동 자체를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처음으로 그에 대한 글을 쓴 것은 예의 ‘투신 예고’ 때문이었다. 지난 7월 25일 검색창에 그의 이름이 등장했기에 나름대로는 깊게 생각하고 글을 썼다. 의도나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투신은 좀 아닌 것 같다는, 다들 하는 이야기였다. ‘좀 더 유쾌하고 지적으로 고난을 돌파해 나가는 남성연대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도 했다.
개인 블로그에 그 칼럼을 올렸더니 방문자 수가 폭증하면서 수십 개의 댓글들이 또 다른 토론을 파생시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 대표가 진짜로 투신을 할 거라 생각한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평생 반성하겠습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그가 뛰어내린 7월 26일은 마침 <미래한국> 마감일이었다. 이 사람은 정말로 중간이 없구나 생각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소식이 들리자 그때부턴 다들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그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투신 예고를 비판했던 내게도 비난의 화살이 날아오는 건 아닐까. 놀랍게도 그런 치졸한 계산 역시 나는 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더 불편해졌다.
격렬했던 싸움의 끝, 그 다음은…?
2주의 시간이 지난 지금 성 대표의 죽음도 어느덧 사람들의 뇌리에서 조금씩 잊혀 간다. 놀라운 일이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면 기억은 산 자의 스토리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이미 가고 없는 사람들의 빈자리에 새로운 기억을 얹어가며 살아갈 것이다.
다만 그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의 매듭은 중요하다. 그의 죽음을 자살로 보는 단순함은 너무나 많은 손실을 야기한다. 일단 그가 투신 직전 했던 인터뷰가 설명되지 않는다.
거기에서 그는 분명히 ‘퍼포먼스’라는 단어를 썼다. 그리고 투신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바짓단을 묶는 등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자살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위험한 퍼포먼스를 “이미 공언한 내용이기에 실천에 옮기지 않을 수는 없다”며 강행하다 사고사한 것이다.
그가 죽음 이전까지 해 왔던 싸움의 방식은 어떻게 기억돼야 할까. 만약 누군가 다시 故 성재기 대표와 비슷한 방식으로 활동한다면 그에 대해서도 100% 호의적인 판단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실시간 검색창에 그 사람의 이름이 올라온다면 다시금 그의 언사에 대해 비판적인 칼럼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
다만 그가 그렇게까지 해서 바꾸고자 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이전보다 진지한 시선으로 보게 될 것 같다. 성재기의 남성연대는 ‘주적’인 여성가족부의 관리 감독을 받게 되는 아이러니를 피하기 위해 철저히 독립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또한 성 대표는 자신이 내뱉은 무모한 한 마디를 지키려고 무리하다 사고사 했다. 그는 무모한 사람이었지만 또한 책임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사실은 이 부분이야말로 내가 그에 대한 칼럼을 다시 한 번 쓰기로 결심한 이유다. 방식과 각도의 차이는 있었을지언정 그는 자기 방식대로의 자유주의자였다. 그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한밤중에도 신호를 지키려 애쓰다 유명을 달리한 한 사람의 화난 싸움꾼이었다. 한 판의 싸움이 이렇게 끝났다. 허무하지만,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드는 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으로 남았다. 그의 명복을 빈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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