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검열하는 사회
마음을 검열하는 사회
  • 이원우
  • 승인 2013.08.02 18: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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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용 페이스북’과 ‘스타벅스 변태남’ 논란을 보며
 

몇 년 전 영화 <도가니>를 보면서 생각했다. 내 앞에 저렇게 답답하고 억울한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까. 떠오르는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묵묵히 글을 쓰는 것.

감사하게도 내겐 꾸준히 글을 써서 발표할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는 어떨까.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글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이 있는 건 아니다. 혼자 보는 일기장에 쓰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역시 글은 ‘읽히는 맛’에 쓰는 면이 크다.

그래서 대안이 되는 게 미니홈피나 페이스북 같은 SNS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있었던 마음 상하는 일을 솔직하게 적어보는 거다. 쓰는 과정에서 약간의 뻥과 허세가 가미될 수는 있겠지만 그거야 읽는 쪽에서도 어느 정도 감안할 수 있는 부분이다.

친구들의 댓글과 ‘좋아요’로 작게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푸는 현명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최근 개인적인 공간에서조차 글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기성용을 ‘처벌’했다면 제2의 강용석 됐을 수도

첫 번째 케이스는 국가대표 축구선수 기성용이다. 그는 이번 달 초 시쳇말로 가루가 되도록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최강희 前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을 조롱하는 글을 SNS에 올렸기 때문이다.

비공개 계정이었지만 한 축구 칼럼니스트에 의해 내용이 공개되면서 일파만파 사태가 커졌다. 문제가 된 글의 논조는 매우 경박해 누구라도 인상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다음부터다. 인터넷에서 엄청난 난리 굿판이 벌어졌음에도 대한축구협회는 기성용에 대한 징계 없이 ‘엄중 경고’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그러자 십자포화가 기성용에서 축구협회로 옮아갔다. “한국 축구의 행정 대리인으로서 책임을 방기했다”는 것이다.

무슨 책임을 어떻게 방기했다는 걸까? 비판자들은 기성용이 국가대표라는 공인(公人)임을 강조한다. 그러니 SNS 활동도 조심했어야 한다는 논리에는 일말의 타당성이 있다. 최 前 감독이 국민들에게 그다지 인기를 얻은 감독이 아니었음에도 그를 조롱한 기성용 선수에게 비난이 빗발친 것은 이 문제에 한국인들이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말해준다.

다만 이번에 밝혀진 기성용의 페이스북은 분명 여러 가지 접근 제한이 걸려 있는 이른바 ‘서브 계정’이었다. 소속사조차도 몰랐는지 논란 초반에 ‘사칭 계정’ 가능성을 제기했다가 더 심하게 얻어맞기도 했다. SNS의 뜻은 ‘Social Network Service’이지만 이 계정의 경우 ‘소셜 네트워크’를 최소한으로 하려는 의지가 분명히 있었다.

우리가 대답해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공(公)과 사(私)의 경계는 어디인가? 공인은 감정을 가져서도 표출해서도 안 되는가?

문제가 이렇게 커질 줄 알았다면 어떤 바보도 그런 글을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분노한 어느 칼럼니스트의 집요한 취재력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몰랐을 수도 있는 일이다. 세상이 시끄러워졌다는 이유만으로 협회의 징계까지 받아야 하는 거라면 지나친 게 아닐까. 축구협회에게는 선수를 보호해야 할 책임도 있다.

일련의 사태는 술자리에서 ‘아나운서 발언’을 했다가 법원에서까지 유죄 판결을 받은 강용석 前 의원의 사례를 연상시킨다. 기성용이 축구협회의 징계를 받았다면 그를 제2의 강용석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죄(罪)가 아닌 해프닝의 주인공일 뿐이다. 우연히 그 해프닝이 세상에 알려졌다면 잘못한 만큼 도덕적인 비난을 받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반드시 목숨을 끊어 놓아야만 정의의 실현인가?

누가 누가 ‘뻘짓’을 했나

다음은 공인조차 아닌 평범한 대학원생의 사례다. 이른바 ‘이대 스타벅스 변태남’ 사건이다. 이화여대 대학원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이 지난 20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한 장의 사진을 올렸다. 내용은 ‘이화여대 다니는 사람은 다 아는 스타벅스 변태남을 광화문 스타벅스 앞에서도 봤다’는 것이었다.

그가 변태인 이유에 대해서는 “특별히 하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학생도 아닌 것 같은데 만날 노트북 가지고 굳이 이대 학교 안에 있는 스타벅스에 온다. 7~8년은 된 듯하다”라고 적었다.

이 과정에서 여학생은 해당 남성(그리고 그의 일행)의 사진을 얼굴까지 공개해 올림으로써 역시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았다. 그가 ‘변태’라는 판단의 근거도 단지 학교에서 자주 봤다는 것밖에 없었다.

논술 강사들이 자주 쓰는 표현을 빌리면 ‘학생의 논리적 근거는 매우 빈약했다.’ 결국, 그냥 뒀으면 그대로 묻히고 넘어갔을 시시껄렁한 일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집 귀한 자식을 변태로 지칭한 것, 얼굴까지 공개하며 조롱한 건 분명 분별력 없는 행동이지만 근거가 약한 만큼 공감을 받을 소지도 적다. 중대한 사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그 남자를 아는 친구들끼리 웃고 넘어갈 생각으로 별 뜻 없이 올린 글인 것이다.

오히려 이 일을 전 국민적인 ‘사건’으로 만든 건 이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양 심각한 논조로 보도한 쪽이 아닐까? 몇몇 이대생들에게만 유명했던 ‘스타벅스남’을 전국구 관심 대상으로 만들어준 일등공신도 굳이 꼽자면 이 뉴스를 보도한 쪽이 아닐는지.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게 언론의 여러 본분 중 하나이긴 하지만 누가 누가 ‘뻘짓’을 했는지 찾을 시간을 아껴서 조금 더 생산적인 곳에 써 줬으면 좋겠다. 이런 뉴스로 대체 누가 득을 본단 말인가?

90년대에만 해도 인터넷은 선구자(early adapter)들의 공간이었다. 그렇기에 언론은 색다른 견해를 들어보고 싶을 때 ‘PC통신의 의견’을 인용하곤 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네티즌들의 견해’라 해봐야 저자거리 농담 수준이다.

세상에는 별의 별 인간이 다 있고 별의 별 SNS가 다 있다. 그 메시지 하나하나에 천지가 개벽할 듯 대응하는 건 ‘마음을 검열하는 사회’로 가는 티켓을 끊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법과 도덕을 구분하자. 사소한 문제에 온힘을 쏟지는 말자. 지혜로운 무관심은 현대인의 에티켓이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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