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한○○ 할아버님은 만나셨죠. 이○○ 할아버님도 할 말이 많으신데 만나시겠어요?”
“이메일 주소 알려주세요. 제가 사진 보내드릴게요. 현판 옆에서 찍은 거요.”
박선영 전 자유선진당 의원이 기자들과 했던 전화통화 내용이다. 지난해 탈북자북한송환 반대를 외치며 중국대사관 앞에서 78일 동안 집회를 하고 12일 간 단식을 했던 박 전 의원. 국회의원 임기를 마친 후에는 동국대 법대 교수로 복귀해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그런 그가 국회의원 때부터 온 정성을 기울여온 사단법인 물망초가 5월 22일로 1주년을 맞는다. 물망초는 탈북민인권보호에 이어 최근에는 국군포로신고센터를 설치해 국군포로문제를 해결하는 데 발 벗고 나섰다.
사단법인 물망초의 이사장인 박 전 의원은 때로는 직원으로서 인터뷰 섭외부터 보도자료 작성, 배포까지 ‘1인 다역’을 하고 있다.
물망초 1년, 전력질주로 달리다
- 사단법인 물망초가 발족한 지 1년이 됩니다. 많이 바쁘셨죠?
네. 그동안 정말 100m 달리기를 하듯이 정신없이 달려왔어요. 물망초 출범하고 두 달 만에 대학생 2명을 미국 뉴욕에 연수 보냈고, 두 달 후 탈북자대안학교를 열었어요.
그리고 두 달 후에는 물망초 치과를 열었죠. 올해 4월과 5월에 인권연구소, 국군포로신고센터를 시작했으니 정말 1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어요.
- 경기도 여주에 세우신 탈북자대안학교는 이제 자리가 좀 잡혔나요?
아직도 초기 단계에요. 학생 전부가 탈북자이거나 자녀인데, 5세부터 22세까지 있어요. 모두 15명의 학생들이 학교에서 먹고, 자고, 배우고 다 해결하죠.
저희는 우리말을 처음부터 배우는 학생도 있으니, 다른 학교와는 많이 달라요. 다른 대안학교에서도 받아주기 어려운 아이들을 저희 학교에서 가르친다고 생각하면 돼요.
- 대학 교수 일도 바쁘실 텐데, 직접 여주 학교에 가셔서 아이들을 돌보기가 어렵지는 않으신가요?
그렇지 않아요. 1주일에 3일은 아이들 밥해주러 내려가요. 지난해 9월부터 했으니 8개월 정도 됐죠. 금토일 3일은 제가 꼭 가서 밥도 하고 배식도 하고 그래요. 선생님, 자원봉사자, 손님들이 있으니 토요일은 25인분, 일요일엔 한 45인분 정도 하죠. 밥 푸는 데는 이제 완전 선수라니까요.
치매에 걸린 친정어머니도 저랑 같이 가서 도와줘요. 콩나물 다듬고, 쌀도 씻어 주시고요. 그런 게 치매에도 좋다 그러더라고요. 어머니랑 같이 밥하고 배식하고, 아이들이랑 얘기하고 그러면, 이런 게 정말 사는 것이구나 싶어요.
- 최근 시작하신 국군포로신고센터는 기존 탈북자돕기 사업의 연장선인가요.
국군포로는 탈북자 문제와는 또 달라요. 이것도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에요. 나라를 지키려고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로 잡힌 사람들에 대해 정부가 외면한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 정부 차원에선 국군포로를 찾기 위한 활동이 없나요?
그런 게 없다고 보시면 돼요. 국군포로에 대한 신고조차 안 받는 나라죠. 가족들이 국군포로인 아버지를찾아 달라고 신고를 하려 해도 정부 어디서도 받아주질 않았어요. 적십자, 보훈처, 국방부, 총리실 모두 떠넘기기 바빠요. 북한을 자극하기 싫은 것이죠.
“전 배식 담당이고, 치매 어머니는 쌀 씻어요”
- 많은 일을 하시는 데 국회의원 신분이실 때에 비해 힘들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지금이 마음이 더 편해요. 특히 이런 일들을 하려면 자금을 마련해야 하는데 국회의원 신분이면 정치자금법 위반이 될 수도 있거든요. 다만 발언의 파장과 효과를 생각하면 국회의원 할 때 좀 더 언론이 주목해줘 효율적이긴 했던 것 같아요.
- 그래도 혼자서 감당하시기에는 절대적 시간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네. 그런 건 있어요. 옛날 같지 않아 요새는 교수 일도 어렵거든요. 논문, 연구, 강의, 학생지도 같은 일들이 빡빡하게 돌아가죠. 그래서 물망초 일을 병행하기가 시간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들긴 합니다. 아직 시작하는 단계여서 제가 일일이 다 챙겨야하거든요.
- 가장 큰 어려움은 역시 비용 문제겠죠?
맞습니다. 학교만 해도 저희는 기숙사 비용을 포함해 전혀 돈을 받지 않거든요. 학교에만 한 달에 1,000만 원 이상 드는데 물망초 전체 후원회비가 많이 들어올 때가 650만 원 정도 되거든요. 완전 적자죠. 사실 돈 문제가 가장 힘든 부분이에요. 100% 회원들 후원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요즘 경제가 어렵잖아요.
- 지난해 중국대사관 앞에서 하신 탈북자북송반대 집회와 단식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탈북자 31명이, 그것도 갓난아기까지 북한에 잡혀간다는 데 가만히 있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요. 북한과 중국이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고, 우리 정부와 국민은 침묵과 방조로 일관했죠. 그게 계기고, 가만히 있으면 심장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 결과적으로 북한인권 문제가 국내와 국제사회에 공론화가 된 것 같습니다. 최근에 UN북한인권조사위가 설치되기도 했죠.
많은 사람이 같이 노력한 결과죠. 그런 노력들이 모여서 국내외에 북한인권 문제가 심각하다는 공감대가 생겼어요. 일단 중국이 변했잖아요.
지금은 북한인권 문제 해결에 대해 반대하지 않아요. 특히 요즘에는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체포하는 강도가 많이 줄었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지금은 북한군이 중국에 직접 가서 잡아가는 것은 없어진 것 같아요.
죽을 고비 단식, 욕하는 사람 많았다
- 뻔한 질문이긴 한데, 단식이 어렵진 않았나요?
죽는 줄 알았죠. 저 원래 한 끼도 못 굶거든요. 가톨릭 신자인 제가 한 번도 금식기도를 해본 적이 없을 정도에요. 단식 둘째 날이 제일 힘들었어요. 머리가 너무 아프고, 일어날 수가 없었어요. 머릿속이 따끔따끔하고 피가 머릿속으로 안 가는 느낌이 드는 게, 이러다 죽겠다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때 첫 번째 든 생각이 너무 ‘쪽 팔린다’였어요. 주변에서 ‘아니 벌써 누우면 어떡하냐’고 말하기도 했고요. ‘야 단식 이틀 하고 죽었다고 하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12일이 지나갔어요.
- 그렇게 힘들고 싫은 일을 왜 하셨어요?
그것 밖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탈북자 가족들이 저한테 우리 아들, 엄마, 동생 살려 달라고 울면서 전화하는데 외교부, 통일부, 국정원에 아무리 전화하고 도움을 요청해도 ‘기다려라’ ‘알아본다’는 말밖에 돌아오지 않았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당신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침에 출근할 때만 해도 단식하겠다는 생각을 전혀 안했는데 갑자기 결심한 것이에요.
- 단식하면서 시민들의 지지도 많이 받으셨죠.
웃기는 얘기지만, 단식하면서 항의를 더 많이 받았어요. 우리 사회에 항상 있던 얘기 있잖아요. 이러면 ‘탈북자가 더 어려워진다’ ‘국경이 더 삼엄해진다’ 이런 항의 전화를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목소리 큰, 노조 한다는 사람들 있죠.
제 앞을 지나면서, ‘한진중공업에 한번 와보지도 않는 년이 뭐 눈에 보이지도 않는 탈북자래?’ 아예 제 앞에서 ‘년’ 자를 붙여서 얘기하더라고요.
그리고 탈북자에 대해 얘기하기 싫은 사람들 있잖아요. ‘한국에도 노숙자가 많은데 그 애들 걱정한 적 있어요?’ 라고 하더라고요. 참 슬픈 현실이죠.
- 사실 총선 전이라서 출마용이라는 얘기가 있었던 사실입니다.
저는 4년 내내 총선에 출마할 생각 없다고 말했어요. 학생들과 약속했기 때문에 학교로 돌아간다고 한 것이죠. 당에서는 저와 상관없이 서울 어디에 나가라는 식으로 했지만 단 한 번도 귀를 기울여 본 적도 없어요.
- 그럼 앞으로 정치를 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네. 없어요. 탈북자를 위해 일한다고 하면 주민들이 좋아하지도 않을 것이고요. 그냥 묵묵하게 지금의 물망초 일을 할 것입니다.
윤창중 사건은 미국이 가장 곤혹스럽다
- 전직 국회의원으로서 한국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구체적으로 정당의 전직 대변인으로서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사건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일부 정치인이 영혼이 없고, 직업적 양심이 없다는 게 문제에요. 윤창중 씨도 직업적 양심이 좀 부족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대변인이 대통령 방미에 따라가서 매일 저녁에 술을 먹을 수 있죠? 그럴 시간이 돼요? 대변인은 그럴 수가 없거든요. 대통령 바로 옆에서 모든 회의, 행사에 다 참가하려면 정말 바쁜데, 어떻게 술 먹을 시간이 있나요?
그리고 누군가 윤창중 씨가 국내에 들어오는 것에 개입했다면, 청와대 조직은 정말 말이 안 되는 것이죠. 호텔에 가서 경찰조사를 받았어야 해요. 성추행으로 미국 현지에서 체포된 스트로스칸 전 IMF 총재를 보세요.
미국이 어떤 나라고, 성추행이 어떤 건데요. 지금 아마 가장 당혹스러운 건 미국일 거에요. 세계전략 차원에서 한국을 대우하는데 윤창중 사건이 터진 것이죠.
- MBC에서 기자를 하시다가 대학 교수, 그리고 정치인으로 변신하셨습니다. 혹시 일관되게 지키는 목표가 있으신지요.
제가 유일하게 하고 싶었던 것은 공부고, 교수였어요. 그런데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아서 돈을 벌기 위해 기자 일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결혼하고 정말 힘들게 살아서 내 집이라도 가질 수 있게 되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때 늦은 나이지만 MBC에 사표 내고 공부를 시작했어요.
1989년에 그만둔 후에 석사 마치고 1995년에 박사학위를 땄으니 5년 반 만이죠. 서울대 법대 역사상 제일 빨리 땄대요.
- 그렇다면 앞으로 물망초 일에 집중하실 텐데 좀 더 설명해 주시죠.
물망초는 탈북자, 국군포로만을 위하는 단체가 아니에요. 저희는 역사에 의해서 조난을 당한 사람들, ‘역사의 조난자’들을 위해 일합니다. 1900년대부터 지금까지 약 100년 넘게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나라가 힘이 없어서 피해를 본 개인들이 많아요.
저희는 그분들을 돕는 일을 할 것이에요. 일단 탈북자, 국군포로부터 시작했고 앞으로 사할린 한인, 위안부 할머니, 731부대 희생자들, 카자흐스탄 등에 떠도는 카레이스키들 문제들에 나설 것입니다.
- 탈북자나 국군포로 모두 정부의 대북정책과 관련돼 있습니다.
북한통치자와 할 수 있는 일, 북한 주민을 위한 일을 구별해야 해요. 통치자하고는 정치적 협상, 지원은 북한 주민을 위해서 시행해야죠. 그러니 주민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대북지원의 투명성이 담보돼야 하죠.
- 본명이 박운희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이름이 촌스러워서 개명하신 건가요.
원래 어렸을 때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은 박연희였어요. 그때는 동사무소 서기가 수기로 이름을 올렸는데 한자를 잘못 써서 운희가 된 것이에요.
웃기는 건 이걸 고치려면 재판을 해야 했다는데 당시 어머니가 29세에 청상과부가 돼서 딸 셋 키우셨으니 그런 여유가 있었겠어요. 그래서 연희로 9년 살고 그 후엔 운희로 살았죠.
그런데 이름만 보면 괜찮은데 성이랑 이어서 부르면 ‘바구니’로 들려요. 그게 너무 싫었고, 게다가 이름에 ‘계집 희’ 자가 들어간 게 정말 싫어서 어려서부터 이름을 꼭 바꾸겠다고 생각했어요.
베풀고 비추라고 ‘宣’ ‘映’이라 했어요
- 어렵게 바꾼 이름 치곤 좀 흔한 이름 아닌가요.
그렇게 바라던 박사학위를 딴 직후인 1995년 여름이었어요.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서 죽을 고비를 넘겼어요. 제차는 폐차됐고, 자칫하면 충주호에 떨어질 뻔했죠. 다들 죽는 줄 알았대요.
그렇게 한 달 반 정도 누워서 가만히 생각했죠. 그렇게 원했던 박사학위를 받고 죽을 고비를 넘기니 이건 하나님이 앞으로 남을 위해 살라고 하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착할 선이 아니라, 베풀 ‘선’ 자에 비출 ‘영’ 자를 썼어요. 베풀고 비추면서 살자는 것이었죠. 그리고 개인적으로 방 한 칸에서 어머니와 동생들과 살면서 힘들었지만 축복받은 삶이었다고 생각했어요.
- 부군인 민일영 대법관께선 박 교수님의 일을 많이 도와주시는 편인가요.
그 남자 지난해에 단식한다는데 한 번도 말리지도 않대요. 그런데 국회의원 하는 것은 끔찍하게 싫어했어요. 저하고 1년 동안 말을 안했을 정도에요. 원래 눈이 선한데, 도끼눈을 하고 보는 것이에요. 하늘에 부끄럽다고 자기 홈페이지를 닫아버렸을 정도에요. 지금 하는 일은 많이 도와줘요.
- 부군과는 어떻게 만나셨나요.
대학교 1학년 첫 미팅 때 만났어요. 그냥 알고 지냈는데 그 사람이 무지하게 따라다녔어요. 10년 따라다녀서 결혼했는데, 그러면서 도끼눈이나 뜨죠.
인터뷰 / 정재욱 기자 jujung19@naver.com
사 진 / 이승재 기자 fotolsj@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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