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후보의 서울 노원병 출마선언과 함께 4·24 재보궐 선거의 열기가 서서히 고조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 출범 2개월 만에 치러지는 재보선이기는 하지만 안철수라는 중량급 대선후보의 등장으로 인해 현 정부에 대한 초반 ‘중간평가’가 될 수 있다는 다소 섣부른 분석까지 제기되고 있다.
최근 10년간 한국 정치사를 돌이켜 보면 재보선 결과로 인해 정국이 요동쳤던 사례가 많다. 큰 선거를 앞두고 민심의 흐름을 가장 효율적으로 판단하는 수단이 된다.
뿐만 아니라 재보선 결과가 민심의 흐름을 확인하는 ‘중간평가’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민심이 야당 쪽으로 더 쏠리게 하는 ‘밴드왜건(band-wagon)’ 효과를 내기도 한다. 이런 사례는 대통령의 인기가 그다지 높지 않았던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에서 두드러졌다.
한나라당, 재보선 압승으로 기사회생
2004년 6월은 당시 한나라당과 보수우파 진영에 ‘잔인한 계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나라당은 그해 4월 열린 총선에서 대통령 탄핵 역풍을 극복하지 못하고 121석을 얻는 데 그쳤고,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은 153석을 얻으면서 원내 단독 과반의석을 확보했다. 11석을 얻은 민주노동당과 의석수를 합치니 164석의 초대형 좌파연합이 탄생한 것이다.
2004년 6월 5일 이런 압도적인 분위기 하에서 재보선이 있었다.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이 선거에서까지 패배할 경우 거대 여당 앞에서 저항할 힘을 완전히 잃게 될 입장이었고, 열린우리당으로서는 총선에 이어 한나라당을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을 절호의 찬스였다.
그러나 결과는 한나라당과 민주당(당시 열린우리당에 흡수되지 않았던 정통 민주당) 등 야권의 압승이었다. 한나라당은 부산시장과 경남-제주지사 등 광역단체장 3곳에서 승리한 것은 물론 수도권인 서울과 경기의 기초단체장 5곳을 독식했고, 광역의원에서도 수도권 전체 19석 가운데 17석을 가져갔다.
민주당도 전남지사 보선에서 승리,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반면 열린우리당은 광역단체장 4곳을 모두 야당에 내준데다 기초단체장도 충청지역에서만 3명을 당선시키는 데 그쳐 완패했다.
총선 승리 이후 하늘을 찌를 듯했던 열린우리당의 기세가 꺾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총선 당시 정당지지도 50%를 넘나들며 한나라당을 압도했던 열린우리당이었지만 6·5 재보선 완패 이후 민심 이반은 가속화됐고, 그해 여름부터는 정당지지도에서 한나라당이 열린우리당에 앞서가기 시작했다.
2005년 4월과 10월에 각각 있었던 재보궐 선거는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에 더 큰 치명타를 가했다.
그해 4월 30일에는 경기 포천, 경기 성남 중원, 충남 아산, 충남 공주-연기, 경북 영천, 경남 김해갑 총 6곳에서 국회의원 재보선이 있었다. 개표 결과 한나라당이 5명의 당선자를 내고 무소속 1명이 당선됐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단 한석도 건지지 못했다. 1년 전 총선 당시 한나라당이 참패했던 성남과 아산에서까지 야당이 압승했다는 사실은 여당에 더욱 충격적이었다. 특히 이 재보선 결과로 인해 열린우리당의 원내 단독 과반의석이 붕괴됐다는 의미도 무시할 수 없었다.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뒀는데 한나라당은 경기 화성시장, 경북 경산시장, 영덕군수, 영천시장, 부산 강서구청장 등 일곱 곳 가운데 다섯 곳을 차지했다. 목포시장에는 민주당 후보가, 경북 청도군수에는 무소속 후보가 각각 당선됐다.
盧정권에 사형선고 된 재보선
한나라당의 재보선 압승 이후 민심은 박근혜 당시 대표가 이끌던 야당으로 급속하게 기울어졌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재보선 이후인 2005년 5월 10일 여론전문조사기관인 TNS에 의뢰해 전국 성인남녀 7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도는 30.7%로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도 23.2%보다 무려 7.5%p나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관은 4월 26일자 조사와 비교하면 한나라당은 4.8%p 상승한 반면, 열린우리당은 5.7%p 추락했다.
6개월 후에 있은 2005년 10월 재보선 결과는 노무현 정부와 집권 여당에 대한 사실상의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었던 강정구 동국대 교수에 대해 헌정 사상 처음으로 수사지휘권을 발동하며 불구속 상태에서의 수사를 진행했다.
여기에 여권 인사들이 강 교수의 이적성 발언을 노골적으로 두둔함에 따라 여당에 대한 민심은 더욱 악화됐다. 당시 강정구 교수는 “6·25 당시 미군이 참전하는 바람에 통일에 실패했다”는 칼럼을 기고하면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었다.
이 재보선은 경기 부천 원미갑, 대구 동구을, 경기 광주, 울산 북구 총 4곳에서 있었다. 역시 한나라당은 4곳에서 모두 승리하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완전히 잡았다. 박근혜 당시 대표가 선거 직전 대국민 기자회견을 통해 “현 정권이 국가정체성을 뒤흔들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한 것이 주효했다.
이 재보선은 2006년 5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열린 마지막 선거로 열린우리당의 승산을 완전히 봉쇄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이듬해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호남과 제주도를 제외한 전 지역의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모두 승리했다.
이후 대선을 앞두고 패색이 더욱 짙어진 열린우리당은 당명을 ‘대통합민주신당’으로 교체하며 정계 개편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결과는 2007년 12월 대선에서 사상 최대 격차인 580만표 참패였다.
MB정부, 재보선 패배로 정국운영 고전
재보선 참패로 인해 곤욕을 치른 것은 뒤이어 출범한 이명박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출범 직후 치러진 2008년 4월 총선에서 압승한 한나라당은 한달 뒤인 5월부터 미국산 쇠고기 수입으로 인한 촛불정국을 맞이했다. 한때 20만명의 시위대가 광화문을 가득 메울 정도로 촛불시위의 위력은 거셌다.
2008년 6월 4일 재보선은 이런 촛불정국 하에서 치러졌다. 전국 9곳에서 실시된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무소속과 민주당이 각각 5곳(대구 서구, 경기 포천, 강원 고성, 경남 거창·남해)과 3곳(서울 강동, 인천 서구, 전남 영광)을 석권한 가운데 한나라당은 경북 청도에서만 승리했다.
노무현 정권 중반부터 각종 재보선과 대선 및 총선에서 압승해 온 한나라당에게는 충격적인 패배였다. 이는 촛불시위로 인한 민심 이반을 더욱 부채질했고 결국 이명박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2008년 10월말에 있었던 재보선에서는 여당인 한나라당이 의외로 선전하면서 사실상 촛불정국의 종료를 알렸다. 그해 10월 29일 전국 14개 선거구에서 치러진 기초단체장(2곳)과 광역(3곳)·기초의원(9곳)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은 기초단체장 1명, 광역의원 2명, 기초의원 2명을 각각 당선시켰다.
촛불시위를 주도했던 민주당은 단독출마로 무투표 당선된 전북 임실 선거구 기초의원을 제외하곤 이날 재·보선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2009년 4월과 10월 연달아 있었던 재보선에서 쓴맛을 톡톡히 봤다. 4월 재보선에서는 공천 잡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인천 부평을, 울산 북구, 경북 경주 3곳의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모두 패했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이후 치러진 2009년 10월 재보선에서는 경남 양산과 강원 강릉에서만 승리했을 뿐 경기 안산 상록을, 경기 수원 장안, 충북 음성-진천-괴산-증평에서 민주당이 승리했다. 결국 한나라당은 재보선에서 나타난 민심 이반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듬해 6월 지방선거에서도 패배했다.
안철수-박원순 등장시킨 2011년 재보선
2010년 6월 지방선거 직후 치러진 7·28 재보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이 의외로 압승을 거뒀다. 한나라당은 서울 은평을에서 이재오 후보를 당선시킨 것을 비롯해 충북 충주, 인천 계양을, 충남 천안, 강원 철원-양구-인제 5곳에서 승리했다.
반면 민주당은 텃밭인 광주 남구를 비롯해 강원 원주, 강원 태백-평창-영월-정선 3곳에서 승리하는 데 그쳤다. 예상을 깬 참패의 후폭풍으로 인해 정세균 당시 민주당 대표는 자진 사퇴했다.
2011년 4월 재보선은 7·28 재보선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잡는 듯했던 한나라당이 다시 휘청거린 계기였다. 경기 분당을과 전남 순천, 경남 김해을에서의 국회의원, 강원도지사, 서울 중구청장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경남 김해을과 서울 중구청장 선거에서만 승리했다.
한나라당의 오랜 텃밭이던 경기 분당을에서는 민주당의 대선주자 중 한명인 손학규 후보가 강재섭 한나라당 후보를 꺾고 당선되면서 파란을 일으켰다. 이 선거 이후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는 자진 사퇴했다.
이 같은 ‘야권 우세’ 분위기는 2011년 10월 재보선까지 고스란히 이어졌다. 한나라당 소속인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관련 주민투표 이후 사임하면서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치러지게 됐고, 당시 대선주자급의 인기를 끌고 있던 안철수 서울대 교수가 출마 의사를 밝히면서 대선 구도까지도 요동쳤다.
이어 안 교수는 박원순 후보에게 후보직을 양보했고 이에 힘입어 박 후보가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를 여유 있게 누르고 당선되면서 현재까지 서울시장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
박원순 시장은 야권의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로도 거론되고 있어 오세훈 전 시장의 사임으로 인해 발생한 보궐선거가 차기-차차기 대선 구도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셈이다.
그러나 이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은 비록 서울에서는 패배했지만 박근혜 전 대표의 지원유세에 힘입어 강원, 충청, 영남 등의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는 대부분 승리했다. 총선을 6개월 앞두고 ‘선거의 여왕’ 박근혜의 위력을 미리 과시하면서 이듬해 총선 승리를 예고한 셈이다.
김주년 기자 anubis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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