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은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데 있어서 국민 여론을 염두에 둔다. 정책에 따라서는 그 지지도 및 파급효과에 따라 민심이 요동치고, 선거에서 심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찬성 여론이 높은 정책을 우선적으로 추진하고, 반대 여론이 높은 정책은 신중하게 재검토를 하는 게 정치인의 일반적인 생리다.
그러나 정책에 따라서는 단순히 찬성-반대 여론의 추이만 보고 접근하는 게 위험한 경우도 있다. 눈에 보이는 여론조사 결과 찬성 여론이 높다고 하더라도 이에 도취돼 이 정책을 강행했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2009년 가을부터 2010년 상반기까지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 내부의 뜨거운 감자였던 세종시 수정 문제가 이런 대표적인 사례다. 세종시 건설은 지난 2005년 여야가 합의해 통과시킨 ‘행정수도특별법’에 의해 결정됐으며 2010년 착공을 앞두고 있었다.
포화된 서울지역 인구를 분산시키고 지방 균형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국무총리실 및 일부 정부 기관들을 충청도로 내려보내 ‘행정도시’를 건설한다는 게 세종시 건설의 골자였다.
역풍 맞았던 세종시 수정안(2009년)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2대 총리로 임명된 정운찬 전 총리는 2009년 9월 세종시 건설이 수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총리 내정자 신분이던 2009년 9월 3일 청와대의 개각 명단 발표 직후 서울대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세종시 건설 추진과 관련해 “아주 효율적인 것은 아니라고 본다”며 “원안보다는 수정된 안대로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그는 “경제학자의 시각에서 봤을 때 (행정복합도시 추진 계획은) 아주 효율적인 것은 아니라고 본다”며 “벌써 발표했고 많이 진행돼 원점으로 돌리는 건 어렵지만, 원안대로 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복합도시를 부분적으로 하되, 대신 충청도 분들이 섭섭하지 않을 정도로 나머지 계획을 추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인사청문회를 거쳐 총리로 임명된 그는 실제로 세종시 수정에 박차를 가했다. 정부부처 이전을 백지화하는 대신에 대기업들을 대거 유치하며 기업 중심 도시로 건설하자는 게 세종시 수정안의 요지였다.
수정안 발표 이후 전국적인 여론은 수정안 지지가 우세했다. 동아일보와 코리아리서치(KRC)가 세종시 수정안 발표 직후인 2010년 1월 13일 공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수정안대로 교육과학중심 경제도시를 해야 한다’는 응답이 54.2%로 나타나 ‘원안대로 행정중심복합도시를 해야 한다’는 응답률 37.5%보다 16.7%p 높았다.
반면 세종시 건설의 당사자였던 충청권에서는 원안 찬성이 53.0%로 수정안 찬성 40.7%보다 12.3%p 높게 나왔다.
이쯤 되면 이명박 정부로서는 그해 지방선거를 5개월 앞두고 ‘충청도를 포기하더라도 수도권 민심을 잡았다’는 자신감을 얻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었다.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지지 여론이 높기는 했지만, 수도권과 영남권에 집중돼 있던 수정안 찬성론자들이 세종시 수정으로 인해 직접적으로 얻게 될 이익은 없다시피 했다.
반면 충청권 유권자들로서는 자신들의 고향인 충청도에 행정도시로 건설될 예정이던 세종시가 수정된다는 데 대한 반감이 컸다. 행정도시 건설이 무산될 경우 지역 부동산 시장의 붕괴 등 경제적인 타격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즉, 세종시 수정안은 충청권을 ‘절대적 비토층’으로 전환시킨 반면 수정안에 찬성한 수도권 유권자들은 ‘느슨한, 일시적 지지층’이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수도권 유권자들에겐 세종시 수정안과 무관하게 이명박 정부와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에 반대할 이유가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당은 그해 6월 지방선거 당시 수도권에서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오세훈 전 시장이 민주당 한명숙 후보에게 1% 격차로 신승했으나, 서울지역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는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구)와 중랑구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민주당에 헌납했다.
충청권에서는 예상대로 세종시 수정안의 역풍을 거세게 맞으면서 대전시장, 충북도지사, 충남도지사 선거를 모두 야당에 내줬다. 결국 세종시 수정안은 충청권을 ‘反한나라당’ 성향으로 전환시킨 반면 수도권에서도 반사이익을 보지 못한 ‘실패한 정치적 승부수’가 된 셈이다.
朴대통령이 ‘군복무 단축’ 찬성한 이유
제18대 대선 하루 전날인 2012년 12월 18일.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선거 유세에서 군복무를 18개월로 단축시키겠다는 공약을 긴급 발표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먼저 내걸었던 공약에 동의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젊은층의 표심을 공략한 것이다.
군복무 단축과 관련해서 과거에 실시됐던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결코 찬성 여론이 우세하다고 할 수 없었다. 지난 2007년 12월에 ‘리얼미터’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군복무를 18개월로 단축시키자는 공약에 대해 반대한다는 의견이 49.9%로 나타났으며 찬성 의견은 27.2%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박근혜 대통령이 당시에 군복무 단축을 찬성한 이유는 세종시 수정안과 같은 맥락이었다. 입대를 앞둔 청년들 및 그 가족들에겐 군복무 단축이 자신들의 인생과 직결된 직접적인 문제였지만 안보 공백을 이유로 군복무 단축을 반대하는 일반 국민들에겐 수많은 현안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즉, 군복무 단축 찬성론자들은 ‘절대적이고 적극적인 지지층’이 된 반면에 군복무 단축 반대론자들은 ‘느슨한 비토층’에 불과했던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이를 감안했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 김재원 새누리당 의원은 담배값을 2천원 인상하는 법안을 발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담배로 인한 국민들의 건강 악화를 우려하는 대승적인 관점에서는 찬성 여론이 높지만 담배값 인상으로 직격탄을 맞게 될 애연가들로서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주목된다.
만약 후자가 이번 법안을 계기로 정부 여당의 ‘절대적 비토층’이 된다면 새누리당은 다가올 재보선과 지방선거에서 고전할 공산이 크다.
김주년 기자 anubis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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