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는 없는 反지성 이야기
교과서에는 없는 反지성 이야기
  • 미래한국
  • 승인 2013.02.0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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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역사이야기


 
중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학자가 아니라도 들어는 봤어야 하는 이름이 있다. 진인각(陳寅恪)이다. 1890년 태어나 1969년 사망한 중국의 역사학자다. 대학자라는 말로도 형언이 부족한 인물이다. 근현대 중국의 4대 역사학자라고 일컬어진다. 하지만 ‘몇 대’ 등은 그렇게 모아서 일컫기 좋아하는 중국인의 버릇이고 실제로는 추종을 불허하는 태산북두 급이다.

우선 실력이다. 그는 16년간 3차례에 걸쳐 구미는 물론 일본까지 해외유학을 했다. 그러나 학위는 없다. 말 그대로 주유천하를 하며 공부했다. 그런데 영어, 독어, 불어, 일어는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모두 자유자재였다. 여기에 라틴어, 그리스어, 러시아어는 물론 티베트어, 몽골어, 만주어, 한국어,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페르시아어, 히브리어, 돌궐어, 등등 고금 20여 종 언어의 독해 능력이 있었다.

중국 大학자 진인각과 홍위병

그뿐이 아니다. 유교에는 13경(經)이라는 게 있다. 역경(易經) 서경(書經) 시경(詩經) 주례(周禮) 예기(禮記) 의례(儀禮)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논어(論語) 효경(孝經) 이아(爾雅) 맹자(孟子)의 13가지를 묶어 칭하는 것이다. 진인각은 사서삼경(四書三經) 정도가 아니라 이 13경 모두를 외우고 있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관롱집단(關集團)에 관한 연구다. 수당제국을 건설한 세력은 순수 한족(漢族)이 아니라 호한융합(胡漢融合) 세력인 관롱집단이라는 학설이었다. 이에 관한 연구가 ‘수당제도연원략논고(隨唐制度淵源略論稿)’인데 저술 당시 진인각은 난리 통에 참고할 만한 장서의 대부분을 잃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거의 기억에 의존해 기념비적인 저작을 남겼다. 항일전쟁과 국공내전 끝에 新중국이 들어섰을 무렵, 그는 시력을 거의 상실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처지에서도 많은 저술을 남겼다. 암기한 것을 인용해가며 구술로 저서를 완성했던 것이다.

이런 대학자임에도 그의 마지막 무렵은 항일전과 국공내전기 이상의 고난이었다. 홍위병(紅衛兵) 때문이었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음에도 대만으로 가지 않고 대륙을 택했었다. 그러나 어린 홍위병들이 그의 이런 애정을 헤아릴 리가 없었다. 책을 불태우고 그의 제자를 끌어내 린치를 가했다. 눈이 먼 그에겐 귀를 괴롭히는 고통을 가했다. 침상 앞에까지 스피커를 걸어놓고 ‘반동적 학문의 권위자’라고 비판의 소리를 질러댔다. 만행은 그가 1969년 죽기 전까지 계속됐다.

‘386 노무현’이 모택동을 존경했던 이유

조반유리(造反有理)! 반항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인데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의 홍위병의 구호였다. 문혁은 1966년 모택동이 자신의 정적을 제압하려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일으킨 것이었다. 그의 선동에 따라 조직된 수백만의 학생들이 모택동 어록을 흔들어대며 중국 전역을 휩쓸고 다니기 시작했다. 일체의 구시대적 유물과 부르주아적 잔재를 청산한다며 때려 부수고 불사르고 심지어 죽이고 다녔다.

홍위병의 소동은 1968년을 고비로 다소 진정국면에 들어갔다. 정치적 승리를 확보했다고 판단한 모택동이 수습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혁의 진통은 1976년까지 10년간 중국을 수렁에 빠뜨렸다.

재앙이었다. 모든 면에서 그랬지만 특히 학문의 영역에선 더욱 그랬다. 교수들이 모욕과 구타를 당하고 도서관은 홍위병들의 공동숙소로 전락했다. 실어낸 책들은 헛간에 쓰레기처럼 쌓여 있다 썩어가고 불태워졌다.

그런데 중국 바깥의 좌익 지식인들은 엉뚱하게도 문혁을 찬양했다. 프랑스의 사르트르를 비롯한 수많은 서구 지식인들이 그랬다. 그런데 한국에도 그런 인물이 있었다. 리영희라는 자가 대표적이었다. <전환시대의 논리> <10억 인의 나라> 등 그가 1980년대 전후 내놓은 책들은 모택동과 문혁을 찬양하는 글이 가득했다. 그런데 이게 이른바 386세대의 필독서였다. 정신적 386을 자처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모택동을 존경한다고 했던 게 우연이 아니었다.

논리적 찬양에 그쳤으면 그마나 다행이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386세대를 시작으로 한국에도 홍위병적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사파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운동권에는 적어도 지적 풍토는 살아 있었다. 토론과 논쟁으로 날밤을 지새웠고 제법 행세를 하려면 마르크스와 레닌을 읽지 않으면 안 됐다. 좌익편향이긴 했지만 어쨌든 이론과 지성이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주사파가 대학가를 휩쓸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변했다.

토론과 논쟁이 사라지고 교시가 자리를 메웠다. 지적인 탐구가 소부르주아적 속물근성으로 매도되고 품성과 대중성이 강조됐다. 反지성주의였다. 지성은 내팽개쳐지고 남은 것은 싸구려 선동과 구호뿐이었다. 한국판 홍위병 문화였다.

2001년 이문열 작가의 책을 반환한다는 이른바 ‘책 장례식’ 소동이 있었다. 일부 시민단체들을 비판한 때문이었다. 그런데 2008년에는 더한 일이 벌어졌다. 광우병 촛불시위를 비판하자 광우병 주동자들이 그의 책을 불태우는 행사를 벌인 것이다. 분서(焚書)! 이문열 작가는 홍위병적 행태를 우려했는데 그들은 그 행태를 실제로 보여주었다. 거리낌 없이!

중국사에 대규모 분서 사건은 두 번 있었다. 2천 수백 년 전 진시황 그리고 현대의 홍위병, 한 번은 폭군에 의해 또 한 번은 폭도에 의해서였다. 진시황의 분서(焚書)에 유학자를 생매장하는 갱유(坑儒)가 뒤따랐듯이 홍위병의 경우에도 폭력과 살상의 난행이 함께 했다.

킬링필드, 홀로코스트, 그리고 광우병 소동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는 중국 밖에서 벌어진 홍위병적 만행의 극악의 사례였다. 만행의 주역 폴 포트는 모택동주의자였다. 그는 지식층들은 새로운 캄보디아 건설에 방해가 된다며 모두 살해하려 했다. 지성에 대한 저주가 킬링필드로 이어졌다.

그런데 모택동과 홍위병의 선배는 가까운 시대에도 있었다. 히틀러와 나치였다. 1933년 총통에 취임한 히틀러는 바로 그해 ‘非독일적’으로 지목된 책들을 불태우는 대대적인 분서사건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 나치판 갱유, 홀로코스트가 이어졌다. 유대인 6백만을 학살한 것이다.

주사파 등장 이후 한국에는 종북세력이 급격히 확산돼 갔다. 반역의 암세포가 퍼진 것이다. 하지만 홍위병적 행태의 사회 전반적 확산도 그에 못지않은 큰 문제였다. 이것은 일종의 정신질환인데 종북 암세포에 의해서 더욱 부채질되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우리 사회가 어느덧 지성적 개인보다는 反지성의 떼거리가 언제나 우위를 점하는 분위기가 돼 버렸다. 노조와 학생 데모대만이 아니라 노사모 같은 ‘빠’들이 말썽 리스트에 추가됐다. 발작이 이어졌다. 몽매의 떼거리들이 기승을 부리면서 광우병 소동을 일으키고 책을 불태웠다. 이런 행태가 홍위병, 폴 포트, 나치와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가?

유토피아적 희망은 인간의 본능일 수 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그 열망을 진보라는 이름으로 존중한다. 그러나 지성의 긴장이 있을 때 그나마 존중이 있다. 지성을 팽개치면 희망은 환상으로 전락하고, 환상이 일으킨 열정은 결국 광기로 귀결된다. 광기의 결말은 자멸이다. 대한민국이 그래야 하나? 反지성의 떼거리 놀음, 이제는 그치게 해야 한다.

이강호 편집위원·전 서울대 총학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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