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신, 이른바 ‘야신’으로 불리는 김성근 감독이 갖고 있는 남다른 점은 딱 하나다. 보통 감독들이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면 그건 다음 게임을 이기겠다는 의미다. 미시적인 승리를 반복하다 보면 최고가 돼 있을 거라는 마인드다. 김 감독은 다르다. 그가 말하는 ‘최선’은 연말의 우승이다. 다음 게임은 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근거가 있는 패배라면 관계없다.
말은 쉽지만 이기는 게임보다 지는 게임이 많아지면 구단과 팬들의 원성은 견디기 힘들어진다. 그래도 그는 훈련 강도를 낮추지 않는다. 선수들의 컨디션이 순환하는 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승리보다 패배가 많아지는 것도 예상했던 바다.
불안해 할 필요 없이 상승세가 다시 찾아왔을 때의 액션플랜을 조용히 되새기면 된다. 이렇듯 원칙이 확고했기에 김성근 감독은 숱한 비난과 핍박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결국 팀의 우승을 일궈낼 수 있었다.
‘야신’ 김성근 감독의 시대와의 불화
그의 태도는 민주적이지는 않았다. 소통과 합의,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선수들과 겸상도 하지 않는 그의 리더십은 폐쇄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김 감독이 독단적인 만큼 그가 창조한 야구의 예술적 지평은 깊어져 갔다. 절차적 정의라는 허울 좋은 핑계로 자신의 원칙을 포기했다면 사람 좋은 감독일 수는 있었겠지만 야신은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김성근 감독이 프로야구와 좋지 못한 결말로 이별했다는 사실은 요즘 한국 사회의 분위기를 정확히 표상한다. 민주주의가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양 그 가치를 무차별적으로 떠받들고 있는 게 21세기의 한국인들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민주주의가 ‘혁신’과 배치되는 개념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한국인들이 추구하는 것처럼 이 세상이 민주주의로만 가득 차 있었다면 다음과 같은 혁신들은 없었을 것이다. 아이폰, 페이스북, 상대성이론, 지동설,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 신화, K-POP 열풍 등등. 그 뿐인가? 보들레르가 <악의 꽃>을 써 냈을 때 당대의 사람들은 그가 미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비슷한 사례가 오스카 와일드와 프란츠 카프카에게도 있었다. 아무리 위대한 자질을 가진 작가라 해도 동시대 사람들의 ‘공감’과 ‘인기’와 같은 민주적 가치에만 천착했다면 문학의 비약적 발전은 없었을 것이다.
혁신은 불균형적이고 편향적이며 합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태동된다. 한 마디로 혁신은 비민주적이다. 민주주의는 가장 뒤탈이 없고 안정적인 대안에 필연적으로 수렴할 뿐 그 어떤 개성과 일탈도 배태하지 못한다. 직업으로 비유하면 공무원이요 음식으로 비유하면 무상급식 같은 맛이다. 이 넓은 세상에 그런 것도 분명 필요하긴 하겠지만 대세를 점한다면 사는 게 재미가 없어진다.
한국인들은 민주주의의 매력에 함몰돼 앞으로 갈 생각을 않고 있다. 그 대표적인 세대가 2030이다. 한국의 2030이 혁신에 취약한 이유는 매우 역설적이다. 가족과 대체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식구들의 조언에 과도하게 귀를 기울이는 ‘민주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은 스펙터클 그 자체였으면서도 부모세대들은 자식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안전해 보이는 길을 걷도록 한 표, 두 표 압력을 행사한다. 마음 약한 2030은 안정적인 미래가 언젠가는 다가올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부모의 방침을 따라 갈 길을 선택한다.
허나 그렇게 판단한 2030이 자기 혼자만은 아니었다는 게 함정이다. 사회가 정체되고 혁신은 멸종된다. 급기야 결국엔 ‘세상을 바꾼다’는 문장의 의미마저 변하기 시작한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서울특별시의 미담 하나는 박원순 시장에게 트위터로 동네 민원을 제보했더니 즉각 해결해 줬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니 감격”이라는 소리를 진심으로 하고 있는 게 요즘 2030의 세대정서다. 그건 세상을 바꾼 게 아니라 세금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는 진실은 아무도 말해 주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과잉이 몰고온 부작용
민주주의 과잉은 불황조차도 민주주의로 돌파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을 양산하기에 이르렀다. 복지국가며 경제민주화 같은 말잔치가 그 실증사례들이다. 허나 부자가 되자고 대화하고 합의하고 타협한다고 해서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선을 넘어야 한다. 누군가는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그 사람의 혁신적 사고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게 아니라면 나머지 사람들은 관용의 시선을 유지하면 그 뿐이다.
혁신과 자유의 접점에 대해 고찰하면 정부가 왜 시장개입을 최소화해야 하는지도 분명해진다. 정부는 국민들로부터 위임된 권력을 집행하면서 법 앞의 평등을 수호하는 민주주의의 영역에 어울리는 존재다. 반면 시장은 혁신의 영역이다. 전 세계를 움츠러들게 만들고 있는 불경기의 비극은 바로 이 영역 구분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촉발됐다. 전혀 무대 체질이 아닌 아이를 덜컥 가수로 데뷔시켜 놓았으니 거기에 감동이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건 혁신과 민주주의의 성격을 국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제대로 깨닫는 일이다. 뛰어난 정치인이 하늘에서 강림하사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며, 이 과업이 달성된다 해도 자원은 희소하고 미래는 불확실한 인간 사회의 각종 비극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근거 있는 패배’라면 감수할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언젠가 다시 찾아올 상승세를 기다리며 원칙을 되새기면 될 테니까 말이다. 인생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인생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 창조해 낸 혁신과 자유의 크기만큼 변화할 뿐이다.
이제 민주주의의 카드는 민주주의가 가장 힘을 잘 발휘할 수 있는 곳에 놓아두자. 대신 스스로를 감탄시키고 두근거리게 만들어 줄 자유와 혁신의 카드를 찾아 들자.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 어떤 위대한 정치인도 만들어 줄 수 없는 우리 인생 최고의 복지이자 불황의 타개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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