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는 어떻게 기억되는가
병사는 어떻게 기억되는가
  • 미래한국
  • 승인 2012.07.12 09: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강호의 영화산책] 챈스 일병의 귀환(Taking Chance)
 

이 영화를 굳이 전쟁 영화라고 분류한다면 아마도 가장 특이한 전쟁 영화일 것이다. 전투신이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제목 ‘Taking Chance’도 특이하다. 얼핏 무슨 작전상의 기회를 그린 영화쯤으로 느끼기 딱 알맞다. 그러나 여기서 Chance는 보통명사 ‘기회’가 아니다. 한 미국 병사의 이름이다.

영화의 제목 ‘Taking Chance’는 그래서 일단은 ‘챈스를 데려가기’라는 정도의 뜻이 되겠다. 그런데 젊은 병사를 왜 누군가가 데려다 준다는 것인지? 이유는 이 병사가 전사자이기 때문이다. ‘Taking Chance’의 정확한 실제 의미는 ‘챈스의 운구’다.

영화의 줄거리는 매우, 아니 지나치리만큼 단순하다. 그냥 챈스 일병의 시신을 고향으로 운구하는 과정이 전부다. 길지도 않다. 러닝 타임이 겨우 77분이다. 할리우드의 그 흔한 블록버스터 대작 영화들에 비추어보면 너무 소품이다.

그도 그럴 게 이 영화는 극장용 영화가 아니라 ‘TV 영화’다. 제작사 HBO는 한국에도 유명 미드 제작사로 꽤 알려져 있지만 극영화 제작 전문이 아닌 유료 영화 케이블 채널 중의 하나다. ‘TV 영화’란 일반 극영화와 마찬가지로 필름으로 촬영은 하지만 영화관 상영이 아니라 TV 프로그램 방영을 전제로 제작한 영화를 말한다. 그래서 70mm 필름을 사용하는 극장용 영화와 달리 대개 16mm 필름을 사용한다. 그런 만큼 화면도 아담하고 소박하다. 이 영화의 영상도 당연히 그에 걸맞게 적절한 수준에서 담담하게 절제돼 있다. 그런데 무게감은 극장용 대작을 넘어선다. 묵직하게 다가와 가슴이 먹먹해지게 만드는 영화다.

19세의 챈스 일병

영화를 보다 보면 ‘Taking Chance’에는 한편으로는 ‘기회를 갖기’라는 의미도 함께 있음을 느끼게 된다. 때는 이라크전이 한창이던 2004년 4월이다. 참전한 미군 병사들의 사상자가 급증하고 있던 상황이다. 전장이 아닌 미 본토에서 전략분석 일을 하고 있던 미 해병대의 마이클 스트로블(Michael Strobl) 중령은 자괴감에 빠져 있다. 위험한 전쟁터는 젊은 병사들에 맡긴 채 자신은 안전한 곳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전사자 명단에서 자신과 출신지가 같은 챈스 펠프스 일병의 이름을 발견하고 그의 유해를 유족이 있는 곳까지 운구하는 임무에 자원한다. 챈스를 귀환시키는 기회를 통해 자신을 추스르는 기회를 갖기를 원한 것이다.

하지만 이 기회는 영화 안에서만의 기회가 아니라 영화를 보는 시청자의 입장에서도 어떤 기회임을 알게 된다. 보통 사람들이 일상의 안전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국가가 실제로 어떻게 지탱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하는 기회다. 영화의 구체적인 내용을 너무 많이 풀어놓으면 스포일의 결례가 될 것이니, 더 밀도 있는 감상은 직접 보고 하시기 바라면서 몇 가지 팁만 더 덧붙이겠다.

한국전 참전을 자랑스러워하는 노병사

이 영화는 실화다. 2004년 9월 이라크에서 전사한 미 해병대의 챈스 펠프스(Chance Phelps) 일병의 유해를 실제로 운구했던 마이클 스트로블 중령이 신문에 기고한 글이 계기가 돼 HBO사가 2009년 제작 방영했다.

챈스 일병의 전사 당시 나이는 19세, 당연히 지원병이었다. 미 중서부 콜로라도 주 출신이다. 콜로라도는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미국에서도 ‘전통이 살아 있는’ 지역의 하나다. 학교에서 체벌이 허용돼 있는 주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스포일성 팁을 하나 더 덧붙이겠다. 스트로블 중령은 챈스 일병의 고향에서 한국전에 참전한 노병사 한 명을 만나게 된다. 백발의 한국전 참전용사는 안전한 후방의 자괴감을 토로하는 스트로블 중령에게 “전투에 직접 참전하는 것만이 옳은 게 아니라 당신에게도 나름 자신의 책무가 있다”고 질책성 격려를 한다. 이 노병사가 쓴 모자에는 태극기 배지가 자랑스럽게 달려 있다.

요즘 미국 영화에서 특징적인 것 중의 하나가 한국전과 관련한 일들의 묘사방식이다. 한결같이 당당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식으로 그려진다. 베트남전과는 사뭇 다르다. 대한민국의 발전과 성공은 미국(뿐만 아니라 모든 참전국) 참전용사들의 자랑이 되고 있다. 스트로블 중령을 자괴감에서 구원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바로 그 자랑스러운 한국전 참전용사다.

19세의 챈스 일병과 한국전에 참전한 노병사! 이 오버랩이 던지는 메시지가 간단치 않게 다가온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 극장 개봉은 하지 않았지만 2010년 4월 26일 KBS에서 ‘챈스 일병의 귀환’이라는 제목으로 방영한 바 있다. 천안함 희생 장병의 넋을 기리는 의미에서 특별 편성한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병사를 추모하기 위해 틀어 줄 만한 감동적인 우리 영화는 왜 없는 것인가?

좌익 흉내를 멋으로 여기고 반전평화를 뇌까리며 혐전주의적 영화를 만드는 걸 격조 있는 작품 활동이라 생각하는 자들이 목청을 높이는 게 우리 영화판의 현재 상황이다. 그런데 어떻게 ‘챈스’ 같은 영화가 나올 수 있겠는가?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