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구성원들의 관심사와 가치관, 나아가 뇌구조를 알고 싶을 때에는 그곳의 베스트셀러 차트를 살펴보면 된다. 요즘 한국의 베스트셀러 차트는 종교인으로부터의 치유, 그리고 정의를 부르짖는 학자들의 고담준론으로 가득 차 있다. 다들 조금 쉬었다 가라고, 내려놓으라고, 성찰하고 돌아보라고 말하는 중이다. 한가로운 말을 누가 더 매끈하게 빚어내느냐의 희한한 경쟁의 장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런 가운데 현재의 인기 도서들과는 완벽하게 상반된 주장을 펼치는 한 권의 책이 번역됐다. <죽은 경제학자들의 살아 있는 아이디어>로 경제학도들에게는 이미 유명인사인 토드 부크홀츠의 <RUSH!>다. 마이클 샌델과 마찬가지로 하버드에서 강의한 적이 있지만 둘의 견해는 등을 맞댄 듯 반대를 보고 있다. 인간은 가만히 앉아 명상을 할 때가 아니라 숨이 턱밑에 차오를 때까지 달리면서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 부크홀츠의 주장이다. 성찰이 없는 삶은 의미가 없지만 과도하게 성찰하는 삶도 의미는 없다. 행복은 바쁘게 움직이며 경쟁하는 데서 비롯된다.
인간이 격렬한 경쟁에 대한 일종의 동경을 품고 있다는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스포츠에 대한 열광이다. 경기가 불황일 때에도 경기장은 붐빈다. 2012년 한국의 프로야구는 31년 역사상 최초로 상반기에만 400만 관중을 끌어 모았다. 승부조작이며 제10구단 창설의 시시비비도 크게 보면 대중 열광의 편린에 지나지 않는다. 이 대중들이 집으로 돌아와서는 성찰과 치유에 몰입한다고 생각하면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나는 뛰기 싫지만 너는 뛰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가한 성찰 vs 치열한 경쟁
파탄 난 유럽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이미 오래 전부터 무기로 할 수 없는 말을 축구공으로 대신 해 왔던 그들이다. 라호이 스페인 총리는 나라가 구제 금융을 받기로 결정된 바로 다음날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2012) 경기장으로 찾아가 빈축을 샀다. 그라운드에서는 돌파구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는 스페인 경제를 상징하듯 스페인 축구 대표팀이 전담 공격수 없는 ‘제로톱’ 시스템을 선보여 전략상의 파란을 일으켰다. 이는 스포츠가 현실을 독특하게 변주한 경우다. 한편 독일은 8강에서 만난 그리스를 4:2로 KO시켰다. 복잡다단한 현실의 도피수단으로 축구를 선택했던 그리스인들은 본인들의 현주소를 거듭 확인하며 한숨지어야만 했다. 이는 스포츠가 현실을 냉정하게 표상한 경우다.
사람들은 현실을 잊기 위해 스포츠를 보지만 그 안에서 또 다른 현실을 발견한다. 4년마다 열린다는 뜻의 ‘올림피아드’를 어원으로 하고 있는 올림픽도 마찬가지다. 이 행사가 국력 과시의 장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점을 가장 먼저 간파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치 정권이었다.
스포츠 경기를 대중매체로 중계한다는 발상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으로부터 시작됐다. 허나 화면을 통해 비춰진 것은 국가주의의 반대였다. 아프리카 출신 미국선수들이 세계 최고의 지위로 도약하는 경쟁의 미덕이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발현됐다. 1984년 LA올림픽과 1988년 서울올림픽쯤에는 이미 올림픽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로 바뀌어 있었다.
아직도 올림픽 정신이라고 하면 참가하는 데 의의를 두는 아마추어 정신을 지칭하지만 실상은 완벽하게 달라진 지 오래다. 프로리그가 없는 비인기 종목의 경우에도 물밑에서는 치열한 경쟁이 펼쳐진다. 한국의 양궁 국가대표가 얼마나 격렬한 경쟁을 거쳐 선발되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조차 이 앞에서는 사치처럼 느껴진다. 한가로운 탁상공론을 펼칠 틈을 아껴 연습을 해도 시간은 부족하다. 이미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것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목표일 정도다. 그래도 그들은 감수한다. 경쟁의 치열함에 비례해서 자신의 인생이 도약할 가능성도 함께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초기 올림픽의 정신으로 돌아가 봐야 누구의 관심도 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현대 올림픽의 효시인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에는 어떤 구기종목도 없었으며 모든 보트경주는 악천후로 취소됐다. 경쟁의 비중도 그리 크지 않아 이전까지 한 번도 원반던지기를 해 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할 정도였다. 21세기의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성찰에 열을 올린들 이 시기로 돌아가려는 선수는 없을 것이다. 경쟁이 없으면 영예도 없기 때문이다.
승부가 있을 뿐 핑계는 없다
스포츠가 인생의 축소판이라면 그 속의 핵심요소는 바로 경쟁에 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한 단 한 번의 게임에서 남김없이 모든 것을 불태우되 결과에는 깨끗하게 승복하는 것. 이 심플한 메커니즘에 의해 스포츠를 비롯한 인류의 모든 번영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수용하고 싶은 교훈만을 편식해서 간직한다. 운동선수는 뛰는 게 일이지만 자기는 그저 성찰하는 게 일인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아니다. 뛰는 것은 모두에게 중요한 일이다.
스포츠가 아름다운 이유는 거기에 승부가 있을 뿐 핑계가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반면 오늘날 한국인들의 성찰이 미심쩍은 이유는 거기에 명분이 있을 뿐 행동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정체된 스스로에 대한 핑계의 도구로써 정의와 치유, 분배와 성찰을 끌어오고 있는 거라면 그 모든 가치들에 대한 모욕에 다름 아니다. 그보다는 스스로가 온 삶을 바쳐 뛰어들 수 있는 경쟁의 게임판을 설계하려는 ‘성찰’이야말로 진짜가 아닐까.
지금 자신이 앉아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도 자기만의 아름다운 스포츠, 나아가 경쟁의 미학은 시작될 수 있다. 올여름 펼쳐질 제30회 런던올림픽에서도 여지없이 구현될 올림픽 정신의 본질은 바로 경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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