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당시 국군과 UN군이 전세를 뒤엎은 결정적 계기는 1950년 9월의 인천상륙작전이었다. 전쟁 초기 기습공격과 엄청난 전투력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진격한 북한군의 배후를 강타한 이 작전은 당시 UN군 사령관이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역사적 승부수였다.
맥아더 장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위기를 타개하고 북한군의 배후를 강타한다는 내용의 작전구상을 실천에 옮기게 된다. ‘계획 100-B(인천)’, ‘계획 100-C(군산)’, ‘계획 100-D(주문진)’의 3개안 중 낙동강에서 반격을 취한다는 ‘계획 100-B(인천)’가 채택돼 9월 15일을 예정으로 한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계획이 수립됐다.
인천은 서울에서 서쪽으로 32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서울로 접근할 수 있는 최단거리 항구이고 수도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적에게 심리적으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한편, 남한 깊숙이 투입된 북한군의 보급선을 차단할 수 있으며, 동시에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을 실시해 북한군 주력을 압축 섬멸함으로써 소수의 희생으로 다대한 성과를 획득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상륙지역을 고립시키기 위한 공중폭격이 9월 4일부터 9월 15일까지 계속됐고 9월 13일부터는 4척의 항공모함과 6척의 구축함, 5척의 순양함이 인천만 어구에 들어서 월미도를 포격했으며 9월 12일에는 군산에 양동작전을 감행하고 동해안에는 9월 14일과 15일 양일간에 걸쳐 삼척 일대에 포격을 가했다.
맥아더 동상 철거 사건의 전말
상륙에 성공한 국군과 유엔군은 9월 16일부터 한강으로 진격을 개시했다. 9월 18일부터 후속부대인 미 제7사단과 국군 제17연대가 상륙해 서울 수복과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고 9월 27일 한국 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후 소탕전을 전개해 9월 28일 수도 서울은 90일 만에 수복됐다. 김일성의 적화통일 야욕을 물거품으로 만든 역사적인 작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이어진 서울 수복은 정상적인 대한민국 국민들에겐 반가운 일이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적화통일이 무산된 사실에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에겐 인천상륙작전이라는 결단을 내린 맥아더 장군이 ‘역적’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종북좌파세력은 맥아더에 대해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내며 동상을 철거하기 위해 폭력시위를 벌인 바 있다. 2005년 7월 10일 우리민족연방제통일추진회의(연방통추)와 주한미군철수운동본부 등 종북단체 소속 회원 20여명은 자유공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온 민족이 맥아더 동상 철거에 떨쳐나서자”고 촉구하며 노숙 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은 7월 17일 맥아더 동상 앞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맥아더 동상 철거를 시도했으나 경찰과 애국우파 단체들의 저지로 무산됐다.
그러나 이는 대회전의 시작일 뿐이었다. 동상 철거에 실패한 좌익단체들은 두 달 뒤인 9월 11일 다시 여세를 모아 자유공원으로 향했다. 이날 전국민중연대, 한총련 등 좌익단체 회원 3천명은 제물포역 부근에서 사전 집회를 가진 후 오후 2시경 자유공원으로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행진했다. 특히 대법원에 의해 친북이적단체로 규정된 한총련이 노무현 정권 경찰의 호위 하에 죽창 등을 소지하고 자유공원을 향해 행진하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우파단체 회원 1천여명도 산발적으로 홍예문 거리로 이동, 자유공원으로 향하는 길목을 차단한 채 좌익단체들의 공원 진입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러자 경찰은 우파단체 인사들을 골목 외곽으로 밀어내며 좌익들의 공원 진입을 도왔다. 결국 좌익단체들은 맥아더 동상을 보호하려는 경찰을 상대로 2m 길이의 죽창을 휘둘러대며 돌진을 시도했지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열린우리당 의원, “동상철거 순수성 평가”
당시 미국 의회도 맥아더 동상 철거 시위와 관련해 우려하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2005년 9월 당시 헨리 하이드 의원과 데이나 로라배처, 에드 로이스(이상 공화), 에니 팔레오마베가, 조지프 크롤리 의원(이상 민주) 등 하원 국제관계위 소속 의원 5명은 미국 의회를 대표해 서한을 내고 “맥아더 장군이 주도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오늘의 한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동상을 훼손하거나 철거하느니 차라리 미국에 넘겨줄 것을 한국 국민에게 정중히 제안한다”고 밝혔다.
공교롭게도 현재 통합진보당 내부에도 2005년 맥아더 동상 철거 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이 있다. 진보당 비례대표 1번 윤금순 당선자는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 대표 출신이다. 그는 종북인사 오종렬, 한상렬 등과 함께 각종 반미집회를 주도해 왔으며 2005년 9월 인천 맥아더 동상 파괴 집회를 주도한 ‘통일연대’ 공동대표이기도 했다.
민주통합당의 전신인 열린우리당에서도 맥아더 동상 철거에 찬성하는 뉘앙스의 발언을 한 의원이 있었다. 당시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인 장영달 전 의원은 2005년 9월 12일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주장의 민족적 순수성에 대해 깊은 평가를 가지고 있다”며 “민족 통합을 이뤄 가려는 우리의 노력에 시비하려는 수구세력이 맥아더 동상 논란을 핑계로 우리 정책에 반기를 드는 움직임도 규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 전 의원은 지난 4·11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의 공천을 받아 경남 의령-함안-합천 지역구에 출마했고, 현재 민주통합당 경남도당 위원장이다.
국내 종북세력의 정신적 지주인 노무현 전 대통령도 맥아더 동상 철거와 관련해 긍정적인 내용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동상 철거와 관련해 나쁜 것은 나쁜 역사로 알아두자”라는 발언을 했는데, 이는 맥아더 장군이 주도한 인천상륙작전 및 한미군사동맹을 ‘나쁜 역사’라고 규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노무현 정권은 인천공원에서 난동을 부린 종북좌익 폭도들 중 단 한 명도 입건하지 않았다.
동상 철거의 최전방에 섰던 우리민족연방제통일추진위원회(연방통추) 강희남 대표는 지난 2009년 6월 6일에 “리명박을 내치자”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그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한 뒤 14일 뒤였다. 연방통추는 1997년 설립된 이적단체 범민련 남측본부의 외곽단체로, 범민련은 고려연방제 적화통일을 추진해 온 북한 조선노동당의 산하기구다.
현재 진행 중인 反 대한민국 활동들
연방통추의 상위단체인 범민련은 최근 법정에서 재판 도중 난동을 부려 물의를 일으켰다. 지난 6월 8일 서울 서초동 서울고법 505호 법정에서는 범민련 남측본부 이규재 의장과 이경원 전 사무처장, 최은아 선전위원장 등 3명에 대한 항소심 선고 공판이 열렸는데 재판부인 서울고법 형사11부 박삼봉 부장판사가 판결문을 읽자 범민련 편집위원장인 최동진은 판사를 향해 “이 개XX야, XX야. MB 이 XX 정권 아래서… 재판장 XX 너 죽을 줄 알아. 미국 놈의 개야”라고 욕설을 퍼부은 바 있다.
이들은 2003년부터 일본과 중국에 있는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주한미군 철수 투쟁 등과 관련한 지령을 받은 혐의(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작년 12월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뒤 항소심 재판을 받아 왔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은 재판장에게 욕설을 퍼부은 혐의로 체포한 최동진에 대해 6월 13일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김주년 기자 anubis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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