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전쟁을 두고 여러 개의 이름이 붙은 사건이 있다.
6.25사변(事變), 6.25동란(動亂), 한국전쟁, 조국해방전쟁,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 조선전쟁... 이 전쟁의 이름들이 가리키는 사건은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발생했고 전세계 16개국이 직접 참전했으며 60여개 국이 관련됐다.
3년간의 전쟁 중에만 60만명이 사망했고 남북한을 합쳐 250만명이 사망했으며 그 중에 80%는 민간인이었다. 1000만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했고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 교통시설이 파괴됐으며 정부 건물의 4분의 3이 파괴되거나 손상됐고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됐다.
미군은 약 5만4,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이는 베트남전쟁 때보다는 약간 적은 수이지만 훨씬 짧은 시기를 고려한다면 대단히 많은 수였다. 이 가혹한 전쟁은 현재는 휴전 중이며, 전쟁 당사자들 간에는 여전히 심리전과 사상전, 여론전, 국지전, 사이버전이 진행 중이다.
하나의 전쟁, 그러나 여러 개의 이름
이 전쟁의 원인은 그 이름처럼 모호하다. 이춘근 교수(이화여대)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이 끝나고 10여년 정도 경과한 1965년 당시 한국전쟁 관련 출판물은 그 종류별로 이미 1만 편이 넘어섰었죠. 6.25전쟁 관련 문헌을 가장 철저히 연구한 학자 중 한분인 김학준 박사는 그 1만 편중 6.25전쟁 연구에 도움이 되는 글들은 약 500-800편 정도라 평가합니다. 이처럼 6.25전쟁에 대한 좌익들의 왜곡 현상이 심각하다는 이야기인 셈이죠.”
이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이춘근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6.25전쟁은 참전국들의 입장과 국제 정치적 헤게모니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져 왔다. 6.25전쟁은 공산주의자들이 사전에 치밀한 계획에 입각해서 시작한 침략전쟁이라는 부동의 믿음과 학설을 ‘전통주의’ 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전통주의 학설은 1960년대를 지나며 ‘미국 패권 음모설’, ‘남침유도설’ 등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이를 학계는 ‘수정주의’라고 한다.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신문기자였던 스톤(I.F.Stone)이 6.25전쟁이 진행 중인 동안 저술한 <6.25전쟁 비사>(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 1952)를 필두로, 플레밍(Ian Flemming), 콜코(Gabriel Kolko) 등 좌익계열 학자들의 미 제국주의 관점에서 서술한 <냉전시대 역사 해설>(Politics of War), 그리고 수정주의의 수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의 <한국전쟁의 기원>(Origins of the Korean War, 1981, 1990)에 이르기까지 상당수 좌익 계열의 학자와 지식인들은 ‘한국전쟁은 북한과 소련의 도발에 의해 야기된 침략전쟁’ 이라는 ‘전통적인 해석’을 부정하는 논리를 제시했다. 그 배경은 무엇이었던가?
“월남전의 영향이었지요. 당시 미국의 대외정책에 격렬히 항거했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대학에서 좌파사상의 세례를 받은 미국의 한 세대가 대학, 언론 및 사회의 주요 세력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 나타난 현상이었습니다. 이들은 소련보다는 미국이 오히려 더욱 침략적인 나라라고 주장하며, 공산주의 국가들이 오히려 방어적이었다고 주장했던 것이죠.” 이춘근 교수의 이어지는 설명이다.
민족과 평화라는 이름으로 패배한 베트남
그렇다면 도대체 6.25전쟁의 해석을 변화시킨 월남전은 어떠했던가. 월남과 남한을 흔히 쌍둥이 역사를 가진 나라라고 한다. 두 나라 모두 외세의 지배를 받았고 해방과정에서 민족주의 공산이념이 자리를 잡았으며 남과 북으로 대치한 가운데 극심한 국론분열을 겪고 있었다. 이 내부로부터의 분열과 반역이 베트콩에 비해 우세한 전력과 경제력을 가지고도 전쟁에서 패망한 이유로 지목된다.
“월남 사람들은 공산주의와 싸우면서도 반공 사상은 희미했지요. 오히려 공산주의를 지지할 수 있는 자유를 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는 모두의 생각이 달랐어요. 종교인은 종교인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소위 민주세력은 그들대로...”월남전에 참전했던 채명신 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월남은 극심한 국론 분열을 겪고 있었다. 그는 다시 이렇게 증언한다.
“백 사람이면 백 사람의 의견이 다르고 천 사람이면 천 사람의 의견이 달랐습니다. 심지어는 정부의 관리들까지도 정부의 정책에 반대한다고 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장했지요. 그러므로 국민의 일치된 총의라는 것이 없었던 것이죠.”
채명신 전 사령관에 의하면 월남에서는 베트콩과 싸우자는 사람, 그들과 협상을 하자는 사람, 베트콩은 나쁘지만 공산주의는 좋다는 사람, 공산주의는 나쁘지만 베트콩은 공산주의가 아니라는 사람 등등이 그야말로 백가쟁명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에 결정적인 인물이 있었다. 바로 1967년 7월 18일 베트남 대통령 선거에 혜성같이 등장했던 변호사, 쭝딘주(張廷裕). 그는 월맹과 월남이 서로 혼란한 교전을 하고 있는 가운데 대담한 연설을 했다.
“우리 월남 민족은 同族相殘(동족상잔)의 전쟁을 하고 있으며 외세마저 끌어들여 우리 동족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는 흘러 내를 이룬다. 우리 조상들이 하늘에서 이를 내려다보실 때 얼마나 슬프겠는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 월맹 폭격을 즉각 중지시키고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 나를 찍어 달라.”
월남은 제1공화국 수립 후부터 그때까지 월맹 공산정권을 두둔하는 친공(親共) 활동은 금기사항으로 돼 왔었다. 사람들은 그를 용공주의자로 의심했다. 하지만 그는 "나는 민족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이고,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이며 진실한 불교도이니 믿어 달라"고 했다. 그는 선거에서 17.3%를 얻어 티우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이후 쭝딘주는 평화주의로 워싱턴 정계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고 파리평화회담이 이뤄졌다. 그러자 베트남에 공산주의자들이 노골적인 테러와 폭력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해 10월 월남 하원의원 선거에서는 총당선자 137명 중 공산프락치 내지는 친북용공(親北容共)주의자로 의심되는 의원 24명이 등장했다. 이는 하원의원 총원의 18%에 해당했으며 쭝딘주의 득표율인 17.3%와 거의 일치하는 숫자였다.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로 가장한 쭝띤주가 거물급 비밀 공산 프락치였다는 사실이 탄로난 것은 베트남 패망 후인 1978년 美 FBI가 그를 간첩혐의로 미국에서 체포, 재판에 회부해 법정에서 징역형이 선고될 때였다. 월남의 모든 사람들이 속고 있었던 것이다.
6.25의 해석이 사상전을 가른다
월남전에서 미국이 철수하고 결국 베트콩의 손아귀에 월남이 떨어졌을 때 세계는 미국을 다시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련의 힘 역시 재평가됐다. 이러한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6.25전쟁에 대한 전통주의 시각을 바꾸어 놓았다. 6.25를 미 제국주의 패권의 음모로 보는 수정주의는 다시 수정을 거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의 <「한국 전쟁의 기원> (Origins of the Korean War, 1981, 1990) 으로 출판된다. 그렇다면 수정주의자들의 시각은 무엇이었던가. 이춘근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들은 소련이 동유럽, 북한 등을 공산화 시킨 것을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 정책 결과라고 보는 대신, 소련보다 훨씬 침략적인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적인 행동이라고 두둔합니다. 이들은 한술 더 떠서 소련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공산화된 것은 소련의 행동이 아니라 각 지역의 자발적인 사회주의 혁명 노력의 결과라고 정당화 시키는 것이죠.”
6.25에 대한 수정주의자 내 상당수 좌익 계열의 학자와 지식인들은 ‘한국전쟁은 북한 과 소련의 도발에 의해 야기된 침략전쟁’ 이라는 ‘전통적인 해석’을 부정하는 논리를 제시했다.
수정주의는 애초 한국전쟁이라는 하나의 특수한 전쟁을 분석하려는 목표보다는 미국-소련 냉전이라는 지구적 차원의 국제정치를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는 점에서 결국 소련 붕괴 후 크레믈린으로부터 공개된 비밀문서들은 ‘6.25가 철저하게 김일성의 주도하에 소련이 승인했던 남침’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것은 “김일성은 괴뢰라기보다 한국전쟁을 주도한 자다”라는 흐루시초프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제시했던 주장이 근거 있는 주장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 결과 한국전쟁은 스탈린이 전적으로 주도하고 김일성은 오로지 괴뢰로서 침략전쟁을 대행한 것일 뿐이라는 전통주의 학설을 일부 수정하도록 했고 6.25전쟁 관련 소련 외교자료의 공개는 수정주의의 학설들을 완벽하게 무너뜨려 버리는 계기가 됐다고 이춘근 교수는 설명한다.
6.25전쟁에 대한 해석은 그렇게 다시 전통주의로 돌아갔다. 6.25는 김일성이 남한 공산화를 위해 주도적으로 획책한 전쟁이었고 소련은 전세계 공산화를 위해 이 전쟁을 도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공산주의가 무너진 지금 6.25의 책임은 당연히 북한 공산집단에게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남한 내 좌익들은 여전히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안보 의식 없는 ‘평화’,‘민족’의 위험성
“과거에는 군.경과 빨치산 중 어느 한 쪽을 부정하는 시각이 서로 대립했지만 이제는 그들 모두를 분단의 희생자로 보고 넋을 위로해 아픔을 씻어내야 평화와 통일의 시대를 열 수 있다.”
2008년 9월 남북평화를 위해 시민운동을 편다는 동서남북 포럼의 한 관계자는 백운산 빨치산 사망자 추모대회를 그렇게 설명했다. 이 단체는 전국에 지부를 갖고 있으며 박지원 민주통합당당 원내대표가 고문으로 있는 단체다.
최근 북한인권 단체들의 지원을 끊은 박원순 서울시장으로부터 2012년 새로운 지원단체로 선정되기도 했다.이러한 상황은 6.25전쟁이 여전히 우리 안에서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북의 침략군 편에 서서 대한민국을 공산화하려던 빨치산과 이를 토벌하던 군.경을 같은 위상으로 놓고 추모제를 연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 안의 6.25는 사상전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한반도 평화, 반전(反戰), 군축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효순이 미선이 미군 장갑차 사건과 ‘미국소 광우병’, 평택 미군기지, 천안함, 한미FTA, 제주해군기지들이 있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북한 김씨정권이 악을 쓰고 비난한다는 것과 그 비난의 논점을 평통사, 한대련, 민노당, 진보연대, 범민련, 전교조 심지어 참여연대까지 때로는 완전하게, 때로는 우회적으로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예로 지난해 10월 북한의 조평통(조국평화통일위원회)이 제주해군기지 건설에 대해 “우리 공화국과 주변 나라들을 겨냥한 새로운 전초기지, 병참기지를 만들려는 극악한 범죄적인 책동”이라며 “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를 비롯한 지역정세 안정을 파괴하는 것으로서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고 했을 때 국내 종북단체들은 그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극렬한 시위를 주도했다.
정치권에도 이러한 끝나지 않은 6.25의 사상전은 곳곳에서 벌어진다. 다만 그 모습이 한반도 평화라는 이름의 혐전(嫌戰)주의로 옷을 갈아입었을 뿐이다. 이들은 북한의 명백한 도발이었던 금강산 민간인 피격사건이나 서해교전에는 침묵하거나 천안함과 같은 사건은 오히려 호도하며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주장한다는 점이다. 물론 진보적 위치에 있는 정치인들이 모두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통합진보당의 종북 국회의원 사건의 추이에서 드러나듯, 국내 진보단체들과 진보적 정치인들이 이 종북의 세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우려되는 것이다. 그것을 ‘색깔론’이라고 비난한다면 결국 6.25가 남긴 사상전의 양상은 더욱 치열해질 수 밖에 없다. 대힌민국 보수진영에는 여전히 월남이 남긴 종북 프락치들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월남의 자유 시민들을 월맹 공산주의자들에게 팔아 넘긴 월맹의 프락치 쭝딘주(張廷裕)의 연설을 다시 한번 더 기억해 보고자 한다.
“우리 월남 민족은 同族相殘(동족상잔)의 전쟁을 하고 있으며 외세마저 끌어들여 우리 동족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는 흘러 내를 이룬다. 우리 조상들이 하늘에서 이를 내려다보실 때 얼마나 슬프겠는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 월맹 폭격을 즉각 중지시키고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 나를 찍어 달라.”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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