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전서 66권 중에서 <사도행전>은 사도 바울의 선교 여정을 담고 있는 책이다. 19장에는 에베소(현재의 터키) 지역에서 돌풍에 가까운 성과를 이뤄냈던 바울이 현지인들의 반발에 휩쓸려 고초를 겪는 장면이 묘사된다.
그러나 땅 끝까지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큰 꿈을 품었던 바울은 선동가들에 굴하지 않고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당시 로마는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문명의 중심지요 여론의 수맥이었다. 바울의 입장에서는 놓칠 수 없는 장소였기에 에베소에서의 작은 실패도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내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재미 있는 것은 사도 바울 이후로 기나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똑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럽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갖고 있는 우리는 방학과 휴가를 앞두고 계획을 세울 때마다 다짐을 한다. “내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단, 더 이상 로마가 세계문명의 중심지가 아니라는 점만이 달라졌다.
지금의 로마는 좋게 말하면 고대 유적지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관광명소지만, 있는 그대로 말하면 과거의 영광이 현재를 압도하고 있는 정체된 도시다. 비단 로마만이 아니다. 유럽대륙을 여행할 때 느끼게 되는 특유의 여유로움은 결국 머나먼 옛날의 영화(榮華)를 밑바탕에 깔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유럽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럽은 서양세계가 근현대를 지배하는 데 강력한 근거를 제공했다. 하버드대 경제사학자인 니얼 퍼거슨은 2011년에 펴낸 책<Civilization>에서 서양이 세계를 제패한 첫 번째 비결로 유럽국가 간의 ‘경쟁’을 꼽았다. 바스코 다 가마가 불을 붙인 유럽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개척은 수많은 비극을 양산했지만 그 과정에서 각국 기술 발전의 초석이 마련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미국과 소련이 달에다 우주선을 쏘면서 서로 자극을 받았던 것이 20세기였다면, 그보다 과거에 유럽은 식민지 개척으로 경쟁적인 발전을 이룩했던 것이다.
그 옛날 발전의 부수 효과를 가져왔던 경쟁은 지금 파괴적인 양상으로 뒤바뀌어 있다. 유럽의 각국은 누가 남의 돈을 많이 가져오되 내 것은 빼앗기지 않느냐의 싸움을 벌이는 중이다. 그 와중에 프랑스 국민들은 ‘긴축 없는 성장’이라는 의미 불명의 레토릭을 내세운 대선 후보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위해 분식회계까지 했던 그리스는 달콤한 파티를 마치고 이젠 EU를 저주하는 중이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 둘은 EU를 넘어서 세계경제의 골칫덩이가 될 전망이다.
생각해 보면 유럽연합이라는 큰 그림에는 시작부터 포퓰리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구역 내의 모든 국가가 하나의 통화를 사용하고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든다는 것은 누구나 한 번씩 꿈꾸는 범세계주의적 이상에 근접한 아이디어였다. 단 그 아름다운 꿈은 공짜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의 권력만을 지향하는 정치가들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유로라는 단일통화를 사용하되 재정정책을 국가별로 운영한다는 점은 유럽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사태가 터지고 나서야 이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통합이 진행되던 당시에는 재정을 개별 운영한다는 바로 그 점이야말로 메리트였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각국 정부의 인기 영합적 계산식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포퓰리즘의 종말, 공짜는 없다
EU로 경제통합을 하면 무역이 발달되지 않은 그리스를 비롯해 현재 위기에 봉착한 대다수의 국가들은 기존에 비해 턱없이 고평가된 화폐로 달콤한 소비와 빚잔치를 할 수 있었다. 독일 국민들은 소비에서 상대적으로 손해를 봤지만 무역수지에서 흑자를 보았기 때문에 자국의 위상을 높여 21세기에도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위치에 섰다. 크게 보면 오늘날의 유럽혼란은 통합 당시의 부조리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매우 정상적인 반작용’에 불과한 것이다. 인생에 공짜는 없는 법이고 그것은 유럽국민에게도 마찬가지다.
천재 경제학자 케인즈는 자연스러운 시장의 장기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시장주의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기적으로 우린 모두 죽는다(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 유럽인들의 지금 심정이 아마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왜 하필 내가 살아 있는 지금 그 굳건하던 제방이 무너지려 한단 말인가? 혹은 내가 살아 있는 지금만이라도 어떻게 적당히 넘어갈 수는 없단 말인가? 프랑스의 신임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는 당선 소감을 통해서 더 이상 범세계고 뭐고가 보이지 않는 유럽인들의 이 심정을 적절하게 대변했다. “우리는 그저 지구상의 한 국가도, 세계 속의 여느 국가도 아니다. 우리는 프랑스다.”
불안한 것은 이 모든 비극이 그저 남의 집 불구경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유럽의 경제위기는 한국에도 직접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줄 뿐더러 한국의 정치 상황 역시 포퓰리즘의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한국은 OECD 가입국을 통틀어 복지에 지출하는 비중이 가장 작은 나라이므로 분발해야 한다’는 논리는 이미 새누리당까지 장악한 상태다. 누가 신임 대통령이 되더라도 유럽형 복지는 한국의 예산 편성에 상당한 영향을 줄 전망이다.
그러나 바로 그 OECD 안에는 그리스도 있고 프랑스도 있고 이탈리아도 있고 스페인도 있다. 우리는 지금 유럽을 동경하다 못해 그들이 빠져버린 함정마저 부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후발주자의 좋은 점은 선발주자가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있다. 유럽이 이토록 강렬한 민중주의의 부작용을 보여주고 있는데도 그들의 전철을 밟는다면 이것은 교양의 부재요 이성의 상실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유럽은 매력적인 곳이고 유럽인들도 개개인으로 보면 나름의 장점과 열정을 가진 멋진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 유럽은 ‘포퓰리즘 한국’의 미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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