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함께 춤을?
러시아와 함께 춤을?
  • 미래한국
  • 승인 2012.03.12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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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차르, 회색의 추기경, 우랄의 여우, 차가운 눈물…

러시아 대통령 푸틴에게 붙는 별명들은 많다. 그가 지난 5일 60%의 지지율로 러시아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후진타오 중국 국가 주석은 직접 축하 전화를 걸어 양국간의 협력을 주문했다. 21세기 황제와 차르간의 대화는 300여년 전에도 그랬다. 하지만 그 대화에 우리가 낄 여지는 없었다. 이들과 우리는 어떤 관계로 엮여 오늘에 이르렀던가. 지나온 생활의 경험을 기억해 보는 것은 현재와 미래에 성찰의 기회를 준다.

1689년 아무르 지역에 진출한 러시아에 대해 청제국은 최초로 유럽과 평등한 조약을 맺었다. 바로 네르친스크조약이었고 그것은 평화공존의 다른 이름이었다. 하지만 수평적 권위를 부정하는 중국과 슬라브 문화의 두 자존심은 황제와 차르간에 오고간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중국 황제의 타이틀에는 존호(尊號)가 있었다. 황제의 존엄과 덕성을 찬양하는 글귀는 많게는 24자까지 사용됐다. 인간이 작문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를 붙였다. 러시아의 경우, 1675년 러시아 황제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가 청나라 강희제에 보낸 국서에는 대러시아, 소러시아, 백러시아, 모스크바 등 무려 29개의 통치구역을 나열하고 동, 서북쪽의 황제라고 자칭했다. 통치자의 호칭도 황제, 군주, 전제군주, 대공 등 네 가지 호칭을 썼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시기에 중국은 조선의 사절단이 북경에서 러시아 관리들을 만나는 걸 극도로 제약했다는 점이다. 1727년 체결된 캬흐타조약에 따라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들이 북경의 러시아관(館)에 체류했을 때 이 러시아 관사는 원래 회동사역관(會同使役館)이라 해서 조선사절단이 묵던 곳이었다. 1408년부터 약 320년간 사용했고 너비도 387칸의 큰 공관이었다. 하지만 청제국은 조선사절단을 여기에서 몰아내고 러시아정교회 전도단에게 공관을 사용하게 한다. 대신 조선사절단은 72칸의 작은 공관으로 옮겨졌다.

지정학적 요인은 러·중 관계의 본질      

당시 러시아정교회 사제들의 눈에 비친 조선사절단들은 청제국 관리들로부터 하대와 모욕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관사 지기가 사제에게 다가가는 조선인에게 채찍을 휘둘렀다는 기록도 있다. 청제국이 철저히 조선과 러시아와의 만남을 제약했던 이유에는 자신들의 영향 아래 있는 조선이 새로운 제국에 눈뜨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렇게 알게 된 조선에 대해 체계적인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후 동북아에는 커다란 한 사건이 벌어진다.

1885년 4월 15일, 남해안 거문도에 영국 국기가 게양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의 도웰(William Dowel) 제독이 이끄는 세 척의 군함이 거문도를 무단 점령했던 것. 이 사건은 당시 조선을 둘러싼 청과 일본, 미국, 러시아 등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청으로서는 조선이 자신의 속방(屬邦)이었기에 영국으로부터 그 영유권을 인정받고 있었고 미국 역시 페리 제독에 의한 일본 개항 이후 조선의 거문도를 군사적 요충지로 보아 투자를 검토하고 있었다.

가장 심각한 쪽은 바로 러시아였다. 당시 러시아는 서쪽으로는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등에 의해 발틱해의 진출이 막혀 있었고 지중해는 오스만에 의해 막혀 있는데다 크림전쟁에 패함으로써 영국과 스페인에 눌려 있었다. 남쪽의 호르무즈해협 역시 영국이 그해 아프가니스탄을 보호령으로 만듦으로써 진출이 좌절됐다. 유일하게 남은 동쪽의 블라디보스토크항. 그러나 이 극동의 항구는 겨울이면 얼어서 러시아는 보다 남쪽의 부동항이 필요했다.

러시아는 조선반도를 눈여겨 보고 있었고 영국은 그런 러시아의 의도에 선수를 쳤다. 러시아는 다급해졌다. 영국의 북진을 우려했기에 협상을 중재한 리홍장에게 ‘조선을 점령하지 않는다’는 확약을 해야 했다. 23개월간에 걸친 영국의 거문도 점령사건은 그렇게 종결됐다.

형식과 내용이 다른 제3의 문명사회

120여년전에 발생한 이 동아시아 세력 다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10년 3월 서해상에서 천안함이 北 어뢰 공격에 의해 격침됐을 때 한, 미, 중, 북간의 숨가쁜 외교전에 러시아가 뛰어들었다. 미국의 조사단과는 별도로 러시아 해군 조사단이 실시했던 검증 결과는 ‘어뢰가 아니라 기뢰’라는 비공식 견해였다. 이에 워싱턴과 국내에서 거센 반발이 제기되자 러시아 정부는 ‘공식의견 없음’으로 사건을 덮었다.

외교가에서는 이를 ‘러시아의 다른 목소리 내기’ 전략으로 파악했다. 즉 ‘러시아의 이해가 걸린 다자간 문제에 러시아는 균형자로 참여한다’라는 외교안보전략 차원이었다는 것.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가 러시아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는 문제에 봉착한다. 대답들은 모호하다. 러시아라는 국가를 신뢰하지 않을 이유는 없겠으나 러시아를 유럽이나 서구의 합리주의 사회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지적 때문이다. 제3의 문명 러시아에는 그들만의 방식이 있다는 이야기다.

“러시아는 광활한 대지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외침을 많이 받았지요. 거기에 슬라브족 특유의 문화와 러시아정교회라는 독특한 정신세계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합리주의도 아니고 중동의 종교국가도 아니고 아시아적 가치도 아닌 별도의 사회적 가치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죠.”

러시아 전문가인 국립외교원 고재남 박사(미주리대)의 설명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다른 설명을 들어보자.
러시아 역사 전문가 리처드 파이프스(Richard Pipes)는 미 CIA의 민간 연구조직인 ‘Team B’의 수석연구원을 지냈다. 그는 러시아 정체성에 독재, 러시아정교회, 민족 메시아주의가 트로이카로 존재한다고 분석한다. 그는 한 기고문에서 “러시아는 강하고 집권화된 지배를 요구하기에 대표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국가와 사회를 이론과 실제에서 구별할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

그의 이런 주장은 러시아의 자원외교에서 잘 드러난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러시아식 협상의 구조는 상대방을 혼미하게 만들며 무엇이 목적이고 진실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세계의 정치학계는 러시아의 자원정책을 두고 한 때 토론이 일었다. 러시아의 자원정책이 시장경제 원리를 따르는 것인지, 아니면 전략적 정치인 것인지 결판을 내보자는 것. 이 논쟁은 2006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벌어진 분쟁과 갈등에서 시작됐다.

러시아 전문가 조나단 스턴은 명백하게 러시아의 자원정책은 경제적 원리를 따른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2006년 러시아-우크라이나 분쟁의 배경은 가스 가격 현실화를 추구했던 러시아와 이에 저항한 우크라이나 사이에 벌어진 경제 갈등이라는 것.

러시아의 가스관은 비밀 병기?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일례로 골드만(Goldman)과 같은 학자는 러시아가 가스시장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서 있음을 강조하며 만약 러시아 당국이 가스자원과 가스관을 전략적으로 사용한다면 가스관은‘새로운 비밀 병기’(New Secret Weapon)로 활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골드만은 러시아-우크라이나 가스 분쟁 원인은 당시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인 빅토르 유센코(Viktor Yushenko)가 친서방 정책을 취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서도 지지받고 있다. 러시아의 정책결정 과정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밀로프(Milove)와 같은 이들은 “우크라이나 가스분쟁이 경제적 갈등이라고 믿는 것은 가즈프롬과 같은 러시아 자원회사의 성격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며 날선 비판을 제기했다.

러시아의 자원정책이 순수한 경제정책이 아니라 정치적 전략에 입각해 있다는 주장은 러시아의 투르크메니스탄의 가스관 사업에서도 등장한다. 지난 2003년 4월 당시 푸틴 정부는 투르크메니스탄 당국과 장기 가스 계약을 체결했고, 투르크메니스탄은 러시아에 25년에 걸쳐 2조㎥ 가스 공급을 약속했다. 특이한 것은 러시아가 투르크메니스탄의 가스관을 높은 비용의 ‘사우스 스트림’방식으로 짓는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다른 나라들이 가스관을 이 지역에 지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고,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투르크메니스탄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성공했다.

러시아의 모호함, 일단 엮일 것인가

러시아의 이러한 자원정책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난 3월 5일 지지율 60%로 당선된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러시아와 북한, 한국을 잇는 1,100㎞ 규모의 파이프라인을 개설해 러시아 극동지역에 매장돼 있는 천연가스를 우리나라에 수출할 계획이라고 밝혀왔다.

러시아 극동지역에는 천연가스 10조4,000㎥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러시아 사할린-블라디보스토크 구간의 파이프라인 공사는 마친 상태이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한을 경유해 남한까지 잇는 구간에 대한 건설 사업이 논의되고 있다.

북한 역시 이 남북 가스관 사업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인 것으로 알려진다. 문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분쟁과 투르크메니스탄처럼 러시아가 남북 가스관 사업을 지정학적 전략으로 삼을 경우다. 김기수 세종연구소 국제정치경제연구실장은 러시아를 지렛대로 한 북한의 ‘장난’ 가능성도 문제로 제기한다.

“러시아의 가스가 북한을 경유하면 북한 또한 얼마든지 ‘장난’ 칠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크라이나의 경우 러시아 몰래 가스를 절취했던 것이 함께 문제가 됐죠. 금강산관광지역의 우리 재산을 몰수한 북한의 몰염치한 행태 등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난 것처럼 어느 지역보다도 긴장의 파고가 높은 남북간에 있어 또 다른 문제가 파생될 경우 어느 지점의 가스라인을 동결시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빼먹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만일 북한에 의해 그러한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러시아는 어떤 입장을 취할까. 우리는 아무래도 천안함사건에서 보여준 러시아의 태도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자국의 이익 앞에 진실마저 봉쇄해야 하는 것이 러시아식 방침이라면 남북 가스관 사업은 보다 신중해질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특히 푸틴 대통령의 러시아가 과거 옐친시대와는 달리, 남북 등거리 외교를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모두의 친구라면 내 친구라는 법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러시아에 거는 희망도 있다. 북핵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확고한 반대 입장과 남한 주도의 통일을 러시아가 지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립외교원 고재남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러시아에 거는 희망, 남북통일은 당사자 몫

 
“러시아는 남북한이 갖고 있는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통일에 대해서는 남북관계에 얽힌 주변국들의 이해관계보다는 남북한 당사자들의 의지와 대화를 통한 자주적 통일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죠. 당연히 러시아는 경제력이 우월한 남한 주도의 통일이 자국의 미래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올해 2012년에는 러시아로서도 중요한 한 해이다. 우선 8월에 개최되는 블라디보스토크 APEC 정상회담은 푸틴 대통령의 제3기 새로운 아시아 태평양 정책의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강한 러시아’로서 역내 강대국이 갖는 지도력도 재확인돼야 하는 시점이다. 미국의 일방주의를 거부하고 다자간 연합을 통해 대항적 리더십을 구축하겠다는 러시아에 대한 우리의 전략은 보다 복잡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간교류다. 러시아를 아는 더 많은 전문가들이 필요하고 현지 활동가들과 사업가들이 필요하다.
제3의 문명이라는 러시아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엇갈린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러시아의 사회구조와 가치관을 적극 이해해 나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항상 러시아의 제안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모호함 속에서 번민할 수 밖에 없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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