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와 ‘대학생’의 어색한 조화
최근 ‘대학생의 보수화’라는 표현이 언론을 뒤덮고 있다. 시위와 저항, 그리고 자유를 상징했던 대학생 사이에서 차츰 안보와 시장, 그리고 국가라는 다소 묵직한 주제가 등장하기 시작하고 ‘보수’라는 슬로건을 내건 대학생 단체들이 급격히 증가하는 점이 대표적인 증거로 꼽히고 있다. 최근 ‘천안함 피격 1주기 대학생 추모 위원회’의 결성은 바로 이러한 신드롬을 증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혹자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매우 우려한다. 혹자는 진보와 개혁의 최전선에서 앞장 서야 할 젊은이가 현실에 안주하는 타협적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냐는 문제의식을 제시하기도 한다.
취업이 어려운 현실이 만들어낸 기형적 사회 현상이라는 다소 냉소적인 평가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고려할 때 ‘대학생의 보수화’는 자극적인 정치 스토리 형성에 참으로 멋지고 기막힌 복선이 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문득 드는 의문이 있다. 과연 보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도대체 보수라는 개념이 무엇이기에, 그것이 대학생과 어울리느냐는 논란이 일고 각 언론은 이를 두고 ‘화제’인양 보도하는 것일까? 대한민국 정치를 이끌어나가는 논의 기준으로 작용해 온 진보와 보수라는 인식의 도구가 지금까지 생산한 담론을 기준으로 볼 때 분명 대학생의 보수화는 섣불리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인 것은 분명하다. 사실상 기존의 보수는 기득권이라는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보수는 말 그대로 ‘지키려는 자’로 묘사됐고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적 흐름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냉혹한 무한경쟁주의자로 그려졌다.
이러한 보수의 이미지는 분명 젊은 대학생과 어울리지 않는다. 일단 대학생은 지킬 것이 없다. 아니 아직 이루어놓은 것조차도 없다. 마찬가지로 취업이라는 전쟁에 뛰어들어야 할 청춘에게 무한 경쟁의 세계는 냉혹하기만 하다. 기존의 보수의 개념으로는 최근 대학생 성향 변화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분명 젊은 보수는 새로운 이해를 갈구한다. 보수의 증명사진을 다시 찍어야 할 때가 왔다.
방어에 급급했던 기존의 보수
사실 기존의 보수는 ‘진보의 반의어’로서의 정체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모든 정치, 경제, 사회적 사안에 대한 입장 표명에 보수가 기껏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칭 ‘진보 세력’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내놓는 의견에 대해 반대말을 하는 것에 그쳐 왔다. 무상급식을 하자는 의견에 대해서는 선택적 복지로, 대북화해정책에 대해서는 대북강경책을, 복지에 대해서는 성장을 말했다. 물론 지금까지 보수가 내놓은 주장들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이슈戰에서 상대방의 선제공격에 대한 방어에 급급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분명 보수는 현실적인 대립과 갈등에서 한쪽 편을 옹호하는 집단의 논리로서만 작용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가운데 지속적인 경제 성장의 필요성, 안보의 소중함, 대한민국의 위대함이라는 기존 보수의 주장을 외치는 ‘젊은’ 대학생들이 나타났으니, 이 둘을 억지로 연결시켜 생각하게 되고, 그 결과 ‘대학생의 보수화’라는 간단한 문구로 표현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젊은 보수가 원하는 새로운 이해, 보수가 찍어야 할 새로운 증명사진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세계관으로서의 보수, 인간관으로서의 보수, 그리고 역사관으로서의 보수이다. 인간의 합리성은 때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전통에 대한 믿음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 역사적 진보는 무분별한 급진적 개혁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지나친 이상주의는 오히려 인간 생활을 파멸로 이끌 수 있다는 신중함, 젊은 보수는 바로 여기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 보수들의 새로운 정체성 찾기
사실 보수의 가치가 이론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것만큼 진보 역시 상당한 실패를 경험하고 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있는 젊은 세대에게 진보 담론은 명쾌한 해석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점차 심각해져가는 북한의 인권 탄압,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 지난 10년의 정부 집권 기간 오히려 심해진 양극화 등에 대한 이렇다 할 변명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미 두 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경험한 세대에게 ‘반독재’라는 구호는 매우 비현실적인 것으로 들릴 뿐이다.
이런 시점에서 젊은 세대는 새로운 인식의 틀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며, 그 가운데 접하게 된 논리는 다름 아닌 자유주의, 보수주의 등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와 사고의 바탕에 바로 ‘사상으로서의 보수’를 두고 있다. 버크와 토크빌을 읽은 대학생들이 점차 자신들만의 논리로 대한민국을 바라보기 시작하고 있고 더 이상 진보진영에서 내놓는 왜곡된 선동에 꿈쩍하지 않는 무장된 젊음이 하나둘씩 사회에 나오고 있다. 박정희와 이승만을 독재자로 가르쳤던 공교육의 껍질을 파괴하고, 스스로 찾아보고 탐구하여 진실을 밝히려는 대담한 젊음이 점차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다.
이것은 결코 젊은이들이 기존의 사회질서와 타협하고, 현실에 순응하겠다는 비겁함이 아니다. 기득권의 권력의 불을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쪼여보려는 안일함도 아니다. 아무런 사고 없이 기존 보수적 정치 논리를 답습하는 보기 불편한 조숙함은 더더욱 아니다. 대학생은 무조건 현실 세계에 저항해야 한다는 논리, 계급의식으로 세계를 바라본 결과 모든 현실적 구조를 와해시켜야 한다는 주장에서 탈피하여 나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보겠다는 집념에서 비롯된 ‘진화’인 것이다.
그렇다면 ‘젊음의 보수화’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보수가 젊어진 것이다. 보수가 초심으로 돌아가고 원칙에 충실하며, 신선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수년 내 젊은 보수는 하나의 목소리를 찾아 ‘아름다운 보수’와 ‘합리적인 보수’의 담론을 폭발적으로 생산해낼 것이다. 이는 또 다시 대한민국을 한 단계 올려놓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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