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탁월한 경제 대통령” 양준모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
“이승만은 탁월한 경제 대통령” 양준모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24.09.25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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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와 교육에 무거운 소명느껴... 도움 절실"

진행 한정석 편집위원
사진 권도한 기자

 4대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을 맡게 된 양준모 교수는 경제학도다. 이제까지 역사학, 사회학, 정치학자가 이승만연구원장을 맡았던 점과 비교하면 이례적인 느낌도 있다. 하지만 양준모 원장은 이승만 대통령을 ‘경제 대통령’이라고 정의하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다. 연구와 교육 소명이 한층 더 무겁다는 양준모 원장을 연세대 우남관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을 맡게 되셨습니다. 결코 편하신 자리가 아닐 텐데 본인에게는 어떤 의미입니까? 어떤 계기로 이승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이승만연구원 원장을 맡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를 임명해 주신 서승환 전 총장님과 윤동섭총장께 감사드립니다. 과거 대학에 입학하면 운동권을 중심으로 선배들이 이승만 건국대통령을 폄훼하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저와는 생각이 다른 학생들이 이승만 건국대통령을 폄훼하는 데에 열을 올리는 것을 보면서 왜 저들은 이승만 건국대통령을 타겟으로 해방전후사를 이해하는 가가 궁금해졌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해방전후사를 이해하는 데에 핵심이고 모든 것은 이승만 건국대통령으로 통한다는 것은 나중에서야 알게 됐습니다. 공산화를 지향했던 사람들은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너무도 싫을 것이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한 사람들은 이승만 건국대통령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더 분명해졌습니다.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시장경제시스템의 중요성과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입장을 갖게 됐습니다. 1994년에 쓴 논문입니다만, 1994년에 인간이 완벽하게 합리적이지 않더라도 시장 경제의 분업적 상호 작용으로 세상이 점점 좋은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것을 증명한 논문이 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독립정신’을 읽고 이승만 건국대통령은 이러한 경제적 변화 과정을 이미 1904년에 터득하셨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선각자적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젊은 날의 이승만 건국대통령께서는 이미 경제발전의 법칙을 터득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앞서 공산주의를 배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장경제 창달을 위해 공부한 경제학도로서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업적과 그 영향을 연구할 수 있는 이승만연구원의 원장이 된 것을 소명으로 생각하고 원장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자 합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없었으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소명의 책임을 무겁게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독립정신’을 읽고 이승만에 눈뜨다

연세대 이승만 연구원은 어떤 곳입니까? 연세대학교와 이승만 간에 특별한 관계나 인연이 있을까요?
 1893년부터 1934년까지 에비슨(Oliver R. Avison)은 세브란스의 1대 교장을 지내셨고, 1916년부터 1934년까지 연희전문의 2대교장도 역임하셨습니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는 1915부터 1916년까지 연희전문의 1대 교장을 지내셨습니다. 이 두 분은 오늘의 연세대학교의 기초를 만드신 분들입니다. 동시 이 두 분은 이승만 건국대통령을 키운 분이시기도 합니다. 언더우드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서훈 받았습니다.

 에비슨이 조선에 선교사로 오게 된 것은 언더우드의 설득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올리버 에비슨은 록펠러와 스탠다느 오일을 창립한 루이 헨리 세브란스가 병원 건립을 위해 거액을 기부하도록 해서 1904년 세브란스 병원을 설립하게 됩니다. 세브란스병원 개원과 함께 제중원의학교는 세브란스병원의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1907년 서울을 방문한 세브란스는 추가로 3만불을 기부했다.1908년 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했고 이들은 최초의 의사면허를 부여 받았습니다. 이 두 분이 현재의 연세대학을 만들고 키웠다는 점은 분명하고 그들의 뜻을 지금도 받들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두 분이 키운 인재가 이승만 건국대통령이었습니다. 

에비슨은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상투를 잘라준 분입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조선적 사고에서 국제적 인재로 성장하는 획기적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에비슨을 찾아가져 자신의 상투를 잘라달라고 부탁한 것 같습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은 당시 제중원의 한국말을 가르치면서 교장이 에비슨 의사와 교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언더우드는 경신학당과 언더우드학당, 연희전문대학을 설립한 근대교육의 선구자입니다. 이승만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의 활동으로 주목받다가 고종폐위 운동 연루설에 의해 한성감옥에 수감됐습니다. 1902년 이승만은 옥중에서 옥중학당과 도서관 개설을 건의해서 개설됐고, 이 속에서 이승만은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선교사들의 주목을 받았고, 이중 언더우드는 8통의 추천서를 써주면서 미국 유학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저희 이승만연구원이 소장하고 있는 언더우드의 추천서를 2015년 공개한 바도 있습니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언더우드와 이승만이 연루됐고, 이승만 건국대통령은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게 됐습니다. 언더우드는 개의치 않고 선교 사업을 추진했고, 언더우드가 미국에 갈 때, 이승만 건국대통령과 함께 연설회를 개최하여 조선의 독립을 알리는 사업을 했습니다. 언더우드는 1915년 경신학교 대학부를 세웠고, 이는 연희전문의 전신으로 연희전문은 2년 후 인가를 받았습니만, 언더우드는 1916년 건강이 악화하여 4월 미국으로 귀국했고 10월에 미국에서 사망했습니다. 연세대학교는 이승만 건국대통령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교육기관이고 에비슨과 언더우드의 혼이 이승만 건국대통령과 연세대학교에 스며져 있습니다.

경제학자로서 이승만연구원장이 되신 것은 처음이실 것 같습니다. 경제학자가 평가하는 이승만은 어떤 인물인가요?
1997년 8월 최송옥 여사가 기증한 송암관(현 우남관)에서 현대한국학연구소가 개소식을 갖습니다. 이후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현대한국학연구소는 초대 소장 유역익교수를 중심으로 이승만 건국대통력의 연구를 하는 연구소로 출발했습니다. 2대 소장은 문정인 교수였고, 이후 다양한 전공의 교수들이 소장을 맡았습니다. 2011년 현대한국학연구소와 분리되어 교책 연구원으로 이승만연구원이 탄생하게 됐습니다. 본격적인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연구를 제대로 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이승만연구원의 초대 원장으로 류석춘교수가 역임으로 했고, 저는 4대 이승만연구원 원장으로 취임을 했습니다.

그동안 경제 분야의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업적은 잘 연구돼 있지 않습니다. 농지개혁에 관한 연구가 있습니다만, 상대적으로 경제 분야에서의 업적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1954년부터 1960년까지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5.3%였습니다. 김영삼 정부 이후 어떤 정부보다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높습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일구어낸 경제성장이고 이러한 성과는 1950년대 전 세계의 경제성장과 비교하면 대단한 성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연평균 제조업 생산 증가율도 1960년 전반보다도 높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고도성장과 이후의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기적으로 이승만 건국대통령부터 시작됐다고 보아도 됩니다. 제가 2006년에 쓴 논문에서도 언급했지만, 시장경제가 발현될 수 있는 제도를 정착시킨 대통령이 이승만 건국대통령이십니다. 모택동이나 다른 사회주의국가의 제도가 스며들었다면, 대한민국의 경제의 기적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 기적의 시작은 독립정신에 스며져 있으며, 이후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여러 논술에서도 나타납니다. 일부 학자들은 분업과 교역의 관계가 경제발전의 근간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마르크스적 사고에 빠져 있어 대한민국의 경제의 기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은 교육의 기적을 일으킨 분입니다. 위대한 인물이 그렇듯이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삶은 다면적이고 그 한 면 한 면이 모두 훌륭하십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을 평가하길 평생 교육자의 삶을 살았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이 건국 이후 정책에 반영되어 교육 혁신을 일으켰습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은 인권의 수호자였습니다. 특히 여성인권향상을 위해 평생을 사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효율과 평등을 대립적으로 보는 견해가 많은데 사실 경제적 성과의 결과적 평등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결과적 평등에 대한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부정적 견해는 이미 1923년 태평양잡지의 공산당 당부당에서 나타났습니다. 경제적 성과의 결과적 평등이 아닌 기회의 평등이나 인권적 평등, 남녀평등, 신분제 철폐 등은 효율성을 높이고 경제를 발전시킵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은 이를 갈파하고 인권을 수호하고 신분제를 철폐하고 남녀평등을 외친 분이십니다. 하와이에서 여성 교육을 위해 노력하신 것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은 경제 대통령입니다. 경제 발전을 위한 우선순위를 알고 차분하게 추진하셨고 미래의 성장 동력에 관한 통찰력도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선 에너지 공급에 매진하셨습니다. 이러한 정책기조는 경제발전의 교과서적 접근입니다. 전력산업과 석탄산업 등 에너지 공급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여 펼쳤습니다. 전력생산량은 1950년대 연평균 13.1%로 1960년대 전반기보다도 높은 성장률이었습니다. 미래의 에너지인 원자력발전을 위해 연구를 시작한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경공업과 중공업의 발전도 괄목상대했습니다. 수출할 수 있었던 품목이 거의 없어 농수산물과 광물 중심의 수출이었지만, 수출을 늘리기 위한 정책도 시도했습니다. 환율정책도 당시 상황에서는 최선의 정책이었습니다. 가끔 해외 금융관련 인사들과 이야기할 때, 당시 환율정책을 이야기하면 자신들도 도입해야 할 제도라고 할 정도입니다.

금융시스템도 향후 경제발전에 기반이 되도록 제대로 구축했습니다. 한국은행을 무자본 특수법인으로 설립했습니다. 사회주의국가들은 정부 조직으로 편성하고 금융발전에 발목을 잡기도 했지만, 무자본 특수법인으로 만들어 공기업도 아닌 독립적 통화정책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농민들이 고리대금에서 벗어나도록 농민은행도 설립했고, 산업발전을 위한 한국산업은행도 1954년에 설립했습니다. 그야말로 경제발전의 토대를 만드신 분이 이승만 건국대통령이십니다. 

한미동맹의 이야기는 너무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대한민국의 경제를 그가 독립정신에서 강조했듯이 세계와 통상하는 경제로 만들었습니다. 세계 공급망 속에서 대한민국의 역할을 찾도록 제도를 만들어서 작은 대한민국이지만 세계보다 더 큰 대한민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은 대한민국을 반석 위에 건국하셨고, 이를 통해 대한민국은 세계와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만드신 분입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은 불교가 지금과 같이 존중받는 종교로 만드시는 데에 큰 공헌을 하신 분입니다. 불교가 왜색으로 도탄에 빠졌을 때, 이를 불교 본연의 불교로 거듭나게 만드신 분입니다."

이승만, 불교계에서도 재평가 받아야

최근 불교계에서 이승만 동상을 세워야 한다고 하셔서 흥미로웠는데, 어떤 이유입니까?
이승만 건국대통령은 불교가 지금과 같이 존중받는 종교로 만드시는 데에 큰 공헌을 하신 분입니다. 불교가 왜색으로 도탄에 빠졌을 때, 이를 불교 본연의 불교로 거듭나게 만드신 분입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은 불교 존중의 마음을 갖고 시주도 하셨습니다. 어렸을 때 불교 신자이신 어머님의 불심으로 잘 받들었으며, 이후에서 불교에 대한 사랑을 계속 갖고 계셨습니다. 파주 용암사에는 1954년 이승만 건국대통령께서 시주하신 돈으로 만든 동자상이 미륵전 옆에 있습니다. 
 
불교계의 농지는 농지개혁에서 제외했고, 일부는 기업체들 인수하도록 불교계에게 특혜를 주었습니다. 사하촌의 개발과 불교사찰의 정리 등에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일부 불교계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과장됐거나 시기적으로 착오를 일으킨 것들이 많습니다. 불교 내부의 갈등을 외부에 전가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은 왜색문화 탈피를 위한  시대적 과제를 수행하셨고 그 판단은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불교가 왜색문화에서 벗어나 우리 고유의 발전 방향을 찾았기 때문에 우리 불교는 전 세계로부터 존경받고 있습니다. 

최근 건국을 둘러싼 역사 논쟁이 치열합니다. 그 배경은 무엇이고 의미를 어떻게 보십니까?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에서 반대한민국의 위치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을 반대했던 세력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박헌영을 현창하려는 사람들이 역사 왜곡에 앞장서고 있고, 정치적으로 부역 세력을 이용하려는 세력이 노골적으로 역사 왜곡에 가담하고 있습니다. 문화계와 학계는 오랫동안 사회주의 세력이 지배해 왔습니다. 제가 쓴 책 양준모, "한국 인문·사회과학 연구, 이대로 좋은가", 285p., ISBN:978-89-94079-79-0, 2013
에서도 밝혔습니다만, 특히 인문사회계의 좌경화는 심각합니다. 이들이 정치적 영향을 확대하면서 권력이 왜곡된 역사를 국민에게 학습시키고 공직자들과 정치인들에게 역사적 올바름으로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제 시민단체와 문화계에서 그 거대한 권력에 맞서고 있을 뿐입니다. 
 
청년층을 위한 교육과 연구 도움 절실

이승만의 존재를 현재 대한민국이 놓인 상황에서 돌아봐야 하는 의미가 있다면 어떤 것이겠습니까? 만일 이승만이 현재 대통령이라면 가장 역점을 둘 정책 1순위와 2순위는?
이승만 건국대통령은 평생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행동하셨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매국매족 행위를 비난하면서도 포용적 정치를 선언 하셨습니다. 그러나 매국매족행위에 대해선 엄정한 법집행을 하셨습니다. 포용적 덧셈 정치를 해야 하지만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신속하게 정의를 실현해야 합니다. 너무나 불법 행위자가 권력을 휘두르고 국민 위에 굴림하고 있습니다. 사법부도 반성해야 하고 국회도 자정 노력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열린 사회에서 반대한민국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올바른 역사의식과 자유민주주적 가치의 존중이 필요합니다. 거짓으로 쌓아 올린 역사왜곡으로 반대한민국 세력이 자기들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각 분야에서 똘똘 뭉쳐 반대한민국세력의 역사 농단과 정치 농단에 대응해야 합니다. 출발은 학계의 올바른 역사 정립과 올바른 역사를 젊은 세대에게 교육하는 일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을 아무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의 연구원이 앞장서려고 합니다만 도움을 주는 사람의 수는 매우 적습니다. 모두가 이러한 노력에 동참하고 도와야 할 것입니다.

청년들에게 이승만의 의미가 그들의 현실 인식과 가치에서 수용될 수 있는 접근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주장한 독립과 자립의 정신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사회주의가 만년하고 모든 문제를 사회적 책임으로 돌리는 세태에서 더욱 독립 정신이 필요합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강조한 것은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세계와 통할 줄 알아야 한다. 둘째,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셋째, 외교를 잘해야 한다. 넷째, 국권을 중하게 여겨야 한다. 다섯째, 의리를 중하게 여겨야 한다. 여섯째, 자유 권리를 중하게 여겨야 한다. 청년들은 여섯 번째의 자유 권리를 가장 강하게 외치지만 가장 취약한 부분입니다. 자기 책임과 타인의 권리 보호에서 자신의 자유 권리를 강화할 수 있으나, 자기중심적 사고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자기 책임을 사회로 돌리는 사회주의자들의 선동에 청년들의 정신이 무너져 있습니다. 

자신의 아이들을 국가가 책임져야 하고, 자신의 부모도 국가가 책임져야 하며, 자신의 취업도 국가책임이고, 자신들을 위해 보조금을 달라는 주장이 청년들 사이의 주류 의견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자유가 무엇인가를 알리고 자유가 우리 모두를 살리는 것임을 체험하고 자유 신장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접근 방식은 초등하교부터의 교육에서, 사회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권리와 권리의 충돌에서 서로의 한계를 알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할 수 있는 의식을 학교에서 배워야 합니다. 직장 생활에서도 자기중심의 무제한적 권리 주장과 타인의 권리가 균형을 갖도록 법제도의 개선도 필요합니다. 학생인권법, 교사인권법 등등 일부 집단의 법으로 나누어 정치하려는 정치 공학을 버리고 보편적 인권을 고양하는 보편적 권릴 보호가 올바르다는 사고가 필요합니다. 아직 우리나라는 문제의 진단도 되지 않았고 실천도 되지 못했습니다. 

보수 우파의 이승만 연구들이 너무 적습니다. 이승만 기념관 설립 추진이 있습니다만, 이승만 대학원대학처럼 아카데미 연구를 통해 1차 자료들과 팩트들이 발굴되고 학회 논문들이 나오고 석박사 연구자들을 길러내야 2차 논의가 더욱 풍성해질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시는지요?

정말 도움이 필요합니다. 화려한 건물보다 정신이 중요합니다. 국민 교육을 위해 많은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저희 연구원에서 연세국가지도자과정을 개설하고 학생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지원이 너무 적어 개설에 실패할 위기에 있습니다. 우남 이승만건국대통령의 뜻을 기리는 교육기관을 만들어 각 분야의 인재를 만들어 낸다면 이러한 인재는 대한민국의 발전에 혁혁한 공헌을 할 것입니다. 좌익들이 장악한 학계는 이승만을 폄훼하고 있습니다만, 학계에는 대항 세력이 없습니다. 제발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사회화, 공동체, 등의 단어조차 오염되고 자유와 방종이 구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민 계봉의 길은 멀고도 험합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창달하기 위해서는 교육과 연구가 필요합니다. 

"우남 이승만건국대통령의 뜻을 기리는 교육기관을 만들어 각 분야의 인재를 만들어 낸다면 이러한 인재는 대한민국의 발전에 혁혁한 공헌을 할 것입니다. 좌익들이 장악한 학계는 이승만을 폄훼하고 있습니다만, 학계에는 대항 세력이 없습니다. 제발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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