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한동훈 당선자는 62.84% 득표율로 집권 여당의 대표에 올랐다. 2등 원희룡 후보(18.84%)와 3위 나경원 후보(14.58%)와의 격차는 따져볼 만한 것도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한동훈 후보가 당선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경선 과정에서 날 것 그대로 드러난 당내 갈등과 불신, 그리고 상호 적대감들이 과연 통합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번 국민의힘이 전당대회에서 보여준 후보들과 지지자들의 행태들이 과연 동지의 것인지, 아니면 서로를 용인할 수 없는 적에 대한 것인지, 그 질서가 드러나는데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한동훈 대표가 차기 대선 주자로 나설 것이 확실한 만큼, 국민의힘 잠룡들에 의한 견제가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문제는 한동훈 대표와 동지들 간의 동질성이다.
한동훈 대표를 지지했던, 그래서 아마도 스텔스 캠프의 기획자였을 것이라 짐작되었던 진중권 교수, 그리고 김건희 여사에 대해 ‘마리 앙뜨와네트’를 운운했던 김경률 회계사는 한동훈 대표의 정치적 동반자이자, 미래 권력에 동참할 동지인 것으로 회자된다. 문제는 진중권, 김경률과 같은 이들이 국민의힘 당원들과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유권자들과 정치적 동질성이 유지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를 판단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번 전당대회에서 원희룡, 나경원을 지지하는 이들의 SNS활동은 매우 활발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의중이 원희룡 후보에게 있다는 이야기는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그렇기에 보수층과 당원들에게 영향력이 있는 정치 커뮤니케이터들과 논객들 가운데 한동훈을 지지했던 이들은 말을 아꼈다.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시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실제로 책임당원의 샘플은 20%밖에 안 된다는 주장은 그럴듯해 보였다. 당대표 선출 투표는 책임당원이 하는 것이기에 이 이들의 마음은 일반 당원이나 국민의힘 지지자와는 다를 것이라는 점에서였다. 하지만 결과는 여론조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국민의힘 지지자들과 당원들 사이에 적과 동지의 질서 인식이 매우 왜곡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정치적 현실은 이미 비주류가 주류임에도 국민의힘과 보수 오피니언에서 주류로 인정받는 이들의 그 권위와 실제가 비주류임이 드러난 것이다.
이는 국민의힘의 향방에 매우 커다란 변동이 올 것을 예고한다. 이른바 보수내 주류 교체가 내용에 맞는 형식을 요구하게 될 것이기에 그렇다. 정치권의 전문 용어로 말한다면 ‘권력 투쟁’의 살벌함은 비켜갈 수 없다는 것인데, 그 사례는 과거 민주당 동교동계가 노무현 그룹에 밀려나면서 벌어진 그 유명한 ‘난닝구와 빽바지’가 대표적이었다.
주류로서 DJ를 따르던 구 민주당 그룹은 비주류 노무현 그룹에게 헤게모니를 빼앗기는 당무 과정에서 웃통을 벗어던지고 런닝 바람으로 대들었고 여기에 백바지를 입고 국회에 등원했던 유시민을 내세운 친노그룹이 대결하면서 민주계는 두 동강이 났다. 그 결과 탄핵이 왔지만 국민은 이미 한 물간 DJ 동교동 계를 주류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탄핵 역풍이 불었고 구 민주계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제 그러한 현상이 국민의힘 친윤과 TK 주류에게 예고되어 있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우리는 역사로부터 배울 수 없다. 이유는 인간의 본성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역사는 되풀이되는 경향이 있으며 집단은 변화하려 들면 들수록 새로운 무엇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집단을 구성하는 자신들의 동질성에 더 수렴하게 된다. 결국 국민의힘과 보수에 적과 동지의 질서가 더욱 뚜렷하고 선명해 진다는 의미이고 이는 그 적대성의 심화가 결국 동질성의 그 무엇 하나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형해화 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두고 보수가 결코 그 강을 건너지 못하는 상황이 말해준다.
보수의 주류교체, 피할 수 없다
5공과 6공 세력이 YS 문민화에 극렬하게 저항하며 영원히 보수의 한 축을 담임하리라 여겨졌지만, 결국 YS 신보수 그룹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무대로부터 사라졌다. 시대정신에서 한번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으며,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격언은 정치권에서는 진리다.
보수는 변화하지 못하면 자신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수구가 되어 간다.
박근혜 탄핵에 격렬하게 저항했던 정치 세력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국 국민의 일반의지로 심판된 역사적, 정치적 사건은 주권자인 국민 교체, 즉 내전 없이는 결코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이를 ‘반동적’이라고 명명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보수는 여전히 정치적 지식과 정치 철학에서 그 빈곤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보수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저 보수의 운명이라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한국의 보수는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시기에 국민의 정치적 민도에 비추어 비정상적일 만큼 국운이 상승하는 경험을 했고 민주화는 그러한 비정상을 해소해서 ‘성공의 저주’라는 정상화(?)의 경로를 만든 것 뿐이다. 이는 한국의 전통적 정치 문화가 민주주의가 아닌 권위주의에 바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위로부터 정당성의 정초를 구하여 왔던 한국인들의 정치 의식은 보수나 진보 모두 권위를 내세우고 끝까지 지키려는 정치인에게 지지를 보내왔다.
설령 그러한 정치인이 시정잡배 수준의 범죄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피가 정의의 강물을 정화한 순수한 증류수임을 고수하는 한, 그는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해 왔다. 그것이 대한민국 정치인들, 특히 ‘민주화 투사’라거나 ‘진보의 양심’이라는 이들이 구사해 온 수법이었다. 이러한 정치 문법에 익숙한 과거 386세대와 이를 계수한 70년생 세대가 현재 대한민국 정치 세력의 주류가 되어 있다. 한동훈 대표도 이러한 세력의 장에서 탈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보수 시니어 정치 그룹은 신주류에 저항하기보다는 온고이지신의 지혜로 새로운 미래 가치를 발굴해야 한다. 그것으로 시대적 주류교체를 내파와 상흔없이 질서있게 이뤄지도록 중재자와 균형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려면 정치 지식을 공부해야 하고 역사와 사회, 경제 전반에 대한 세계관을 재구축해야 한다.
이승만, 박정희의 세계관에만 매몰되어 있을 것이 아니라 이를 신주류 정치 세력이 필요로 하게끔 변혁적으로 수용하고 논의하는 모멘텀을 발굴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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