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정리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사진 서이경 미래한국 객원기자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의 공론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승만에 대한 해석은 보수와 진보 간에 엇갈린다. 그런 점에서 서양사를 전공하고 한국 근대사 연구를 해 온 정경희 의원은 이승만의 진보성을 강조한다. 과연 이승만은 어떤 점에서 당대에 가장 진보적인 민주주의자라는 평가가 가능한 것일까. <미래한국>이 정경희 의원을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 ‘건국전쟁’을 보셨다고 들었습니다. 역사학자로서 어떠셨는지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나서 이제야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제대로 알릴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에게 다가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과거 이영훈 교수를 비롯해 여러 분들이 이를 알리려 노력하고 교과서를 바로 잡기 위한 노력을 했는데 쉽지 않았죠. 나라 세우기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독재냐 아니냐는 것은 나중의 문제입니다.
나라는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언제 세워졌느냐고 물으면 개천절 때 세워졌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의미를 몰라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 교과서는 고려가 908년 건국했다고 씁니다. 그 다음에 조선은 1392년 건국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서는 역사교과서는 말을 못합니다.
일부 정치 세력이 아예 건국이라는 말을 못 쓰게 하는 것이죠. 그러면서도 월드컵 같은 이벤트가 있으면 대한민국을 외칩니다. 대한민국은 한반도에서 가장 성공적인 나라입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입니다. 아울러 누가 뭐라 해도 자유민주주의 국가입니다. OECD 선진국에 들어가 아프리카와 같은 나라에 원조도 해줍니다. 이런 위상을 가진 역사가 없었습니다.
건국은 험난한 과정, 우리는 잘 몰라
- ‘건국전쟁’이라는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스라엘을 보죠. 2천 년 동안 나라를 못 세웠잖아요. 그래서 나라 세우기 위해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에 온갖 연합국에 협력을 하면서 나라를 세워달라고 별의별 일을 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세워진 이스라엘이지만 주변 아랍의 위협을 맞아 절체절명의 어려운 상황을 겪어야 했습니다. 우리도 그랬던 것입니다. 국가를 세운다는 것은 매우 지난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1945년까지는 항일투쟁이지만 1945년부터 8년까지는 공산주의와의 싸움이에요. 그러니까 대한민국은 항일만으로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항일과 반공을 통해서 세워진 나라라는 것입니다. 1948년은 북한을 점령하고 있는 소련 공산주의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한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남한 내부에 있는 공산주의자들하고의 싸움이었던 것이고, 그래서 공산주의와의 투쟁을 거쳐 나라를 세우는 바람에 3년이 걸렸던 것이죠. 김일성은 이미 48년 1월에 당대표가 되면서 김구와 이승만을 일제의 사냥개였다고 흑색 선전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오늘의 자기의 주인을 잃고 새 주인을 찾아 미 제국주의들의 사냥개가 된 친일파들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한 공산주의자들에게 이승만을 친일파로 매도하라고 아예 지시를 내립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이승만의 대통령제와 반 이승만 세력의 내각제가 충돌하고 헌법에서 절충되어 이상한 권력 시스템을 갖게 된 것입니다.
- 이승만 대통령의 성찰적 탁월함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 폐해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1923년에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을 위해 만든 ‘태평양잡지’에 “공산당의 당부당”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 글에서 왜 공산당이 인류의 미래가 아닌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죠. 이런 점은 이승만을 대한민국 수준에서 볼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 차원에서 해석해야 하는 것이죠.
한마디로 뛰어난 두뇌와 예지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에게는 미래가 보이는 것이죠. 점쟁이 같은 것이 아니라 지적 수준이 높은 것인데 현상을 잘 인식하기에 앞날이 보이는 겁니다. 학문이라는 것이 알고 보면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인문사회과학적으로 그 현상을 분석해서 이해하는 것이죠.
이승만 대통령이 ‘재팬 인사이드 아웃’에서 일본이 미국을 침략하리라 예언을 했던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당시 미국 사람들은 일본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잘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러일전쟁을 계기로 미국인들은 러시아를 알게 되었던 것이죠.
일본이라는 나라가 러시아를 이겼다는 사실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미국의 많은 사람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도 있었습니다. 당시 소련을 대단한 나라라고 생각들 했던 거죠. ‘황무지’의 작가 T. S. 엘리엇 같은 이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당시 ‘동물농장’의 작가 조지 오웰은 8개의 출판사를 돌아다녔지만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이유가 스탈린을 비판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니까 조지 오웰 같은 이들에게는 현상을 이해하는 지혜가 있었던 것인데, 이승만 대통령도 그런 이였던 겁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점을 이미 다 예견했던 것이죠. 지적인 수준이 매우 높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공산주의 위험을 간파했던 이승만
- 이승만 대통령은 그런 능력을 어떻게 얻게 된 것일까요?
그게 바로 통찰력이라는 거죠. 통찰을 할 수 있으면 가능하게 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875년생이죠. 그래서 과거 시험에도 응시를 했습니다. 문제는 조선이 망해갈 무렵이고 세도 정치로 인해 과거는 음서제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죠. 다시 말해 실력의 유능함으로 뽑는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동양학에 대해서는 이미 공부를 다 한 상황이죠. 그런 상태에서 미국에 건너가 박사, 그것도 윌슨 밑에서 국제정치학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럴 정도로 지적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전히 지금도 우리 안에는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이들이 있다는 겁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다른 것인데 공산주의가 망하니까 사회주의인 척하면서 학생들의 역사와 사회 교과서에 마치 사회주의가 좋은 것처럼 써 놓는다는 겁니다.
아까 황무지의 작가 T. S. 엘리엇 이야기를 했든데,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엘리엇이 하는 출판사에서도 거절당했습니다. 스탈린을 비판한다는 이유는 같았어요.
그럴 정도로 공산주의에 대해 무지할 때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를 알아봤던 것입니다. 그런 성찰력으로 일본이 미국을 침공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고 우리는 해방을 얻게 될 것이라 확신했던 겁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해방 후 어떤 나라를 세워야 할지 준비하면서 생각과 계획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죠.
- 서양사를 전공하셨는데 국사 교과서 집필을 맡으시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원래 미국사 30년을 연구했어요. 제 스승이 이인호 교수님이십니다. 어느 날 이인호 교수님과 제자 동료들이 모여 국사 교과서 문제를 비롯해 우리 역사 해석 문제를 함께 토론하다가 지금 제가 한가롭게 남의 나라 역사할 때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어요. 정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미국사는 그 길로 접었습니다. 한국사 연구를 시작했어요.
왜냐하면 남의 책 읽는 거 가지고 안 되겠고 그래서 연구를 깊이 있게 하기에는 제가 너무 다급하고 나이가 많으니까... 그러던 차에 한국학중앙연구원 권희영 교수님이 저한테 공동연구자로 와서 프로젝트를 맡아 연구를 하자고 그러더라고요. 마침 연구를 해야겠다 생각해서 대한민국의 정치 확립을 주제로 2년간 하고 그 다음에 다른 프로젝트로 또 2년, 북한의 역사 교과서도 연구를 포함해 4년을 한국사에 관한 연구를 했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세계사적인 안목이 있어야 국사를 분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보수계에서 국사 교과서가 편향되어 있다고 지적하는 분들은 대개 서양사를 한 분들입니다. 이인호 선생님은 소련사를 하셨고 이주영 교수님은 미국사, 강규형 교수님도 소련사를 하셨죠. 권희영 교수님은 한국사이기는 하지만 프랑스에서 공부를 하셨어요. 모두 국제 감각이 있고 주제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세계사적 안목이 없으면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기 쉽습니다.
한 예를 보기로 하죠. 지금 진보와 좌파는 대한민국이 건국되던 1948년 당시 이승만 정권이 독재 체제로 수립됐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가장 선진적인 민주주의 체제로 수립됐습니다. 당시 문맹자에게 투표권을 주는 문제가 뜨거운 이슈였습니다. 한국인의 78%가 문맹이었어요.
열 명 중에 여덟 명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데 과연 투표권을 준다는 것이 상식적이었을까요? 그때 우리는 기명제가 아니라 기용제(기표제)를 했습니다. 기명제는 투표할 당의 이름을 적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승만 정부에서는 이름이 아니라 작대기 하나, 작대기 둘, 작대기 셋으로 적을 수 있게 기표제 선거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문맹자들도 투표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지금도 기명제를 합니다. 미 군정 때도 기명제였어요. 가서 이름을 써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기 전에 정치권에서는 토론과 논쟁이 있었습니다. 주한 임시위원단이 들어와서 정치권에 물은 겁니다. 문맹자에게 투표권을 주는 데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제2분과위원회가 낸 보고서를 보면 한국 측 요인 면담 기록이 있습니다. 48년 1월 26일부터 3월 6일까지 면담을 했는데 대상은 독촉의 이승만, 한독의 김구, 무소속 여운홍(여운형 동생), 한민당 김성수 네 사람입니다.
이 가운데 가장 진보적인 사람이 찬성했을 겁니다. 그 사람이 이승만이었습니다. 나머지 세 사람은 모두 반대였습니다. 문맹자에게는 투표권을 줄 수 없다는 것이죠. 그때 이승만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참정권을 부여하고 엄격하고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선거를 실시함으로써 한국인들의 열망을 실현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당시 김구는 문맹자들은 정치를 모르니 투표권을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김성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에 문맹자에게도 투표권을 줘야 한다는 이승만이 얼마나 진보적인 사람이었는지 말해주는 장면인 것이죠. 바로 이런 것이 세계사 속에서 한국 근대사의 특별함과 위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알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여성에 대한 참정권도 그런 것입니다.
이승만의 진보성
- 이승만과 박정희 두 대통령의 역사적 관계는 어떤 것입니까?
이승만과 박정희의 선후 관계를 이해하는 단초는 바로 원자력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번영을 이루고 경제 건설을 한 것으로 평가되는데, 사실 그것은 이승만이 깔아 놓은 레일을 박정희의 기관차가 달렸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1956년 시슬러라는 미국의 전기 기술 대가가 와서 이승만에게 원자력에 대해서 얘기를 한 거예요. 그랬더니 이승만 대통령이 한번에 알아들은 겁니다. 그래서 원자력을 해야겠다라고 결심을 하신 거예요. 그래서 지금부터 시작하면 몇 년 뒤에 써먹을 수 있어? 하고 물어본 거예요. 그랬더니 ‘한 20년 걸립니다’ 했는데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벌써 80대였던 것이죠. 그럼에도 시작을 합니다. 그해 문교부에 원자력과를 만들고 한미원자력 협정을 체결합니다.
이어 원자력법을 만들고 원자력 연구소 기공식을 하고 원자로를 도입합니다. 문제는 인력이죠. 그래서 59년에 유학생을 선발합니다. 당시 국민소득이 60달러였는데 이 국비 유학생에게 들어가는 돈이 6000달러였습니다. 그럼에도 240여 명을 양성한 겁니다. 우리 원자력은 하늘에서 그냥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원조가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으니 우리도 자립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원자력 무기도 거론합니다. 결국 1962년에 박정희 대통령은 원전 추진 계획을 만들고 67년에 원전 2기를 짓게 됩니다. 그래서 이승만이 깔아 놓은 레일에 박정희의 기관차가 달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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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희 의원은 …
비례대표 초선으로 21대 국회에서 정치권에 첫 발을 내디딘 정경희 미래통합당 의원은 서울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서양사학과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역사학자다. 한국사와 서양사를 아우르는 폭넓은 역사적 스펙트럼을 바탕으로 후학을 양성함과 동시에 한국사 검정교과서의 '좌편향' 문제를 신랄하게 지적하며 이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한국사 교과서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사 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었나’ 등의 저서를 통해 문제점을 알리고 대중의 반향을 이끌어낸 인사다.
정 의원이 국회에 등원 후 가장 먼저 준비한 프로젝트는 ‘2020 대한민국 진짜 역사 바로 알기 연속토론회’ 개최다. ‘6·25 전쟁과 한미동맹’을 주제로 1차 토론회의 막을 올렸다. 그는 “대한민국을 둘러싼 가짜 역사가 너무 많다. 가짜 역사가 주가 된 상황에서 진짜 역사를 알릴 것”이라며 “6·25전쟁이라는 대참화를 거치고 한 가지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게 한미동맹이다. 한미동맹의 현재적 의미를 되새기는 데 주안점을 둘 것”이라고 말했다.
정 의원은 역사교육 뿐만 아니라 교육 현장 전체의 좌편향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교육은 정치적 중립을 취해야 한다. 그렇지만 문재인 정부의 교육은 정치적 중립이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이라며 “이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국회 차원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반드시 지켜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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