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라는 소설이 있다. 1977년 윤흥길이 <창작과 비평>을 통해 발표한 중편소설이다. 불합리한 도시개발정책으로 말미암아 평범한 소시민의 삶이 어떻게 일그러지고 와해되는지를 그린 1970년대의 대표적 문제작이다. 그 배경이 되는 동네가 바로 광주 중부면, 지금의 성남 중원구 수정구 일대의 철거당해 이주해 온 도시 빈민들이다.
박정희 시대, 산업화의 성과와는 별개로 그 그늘을 이해하고,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의 삶을 하나의 국가 공동체 안으로 포용하는 데 인색하거나 실패한 결과가 3류와 아웃사이더들의 아수라 오늘날의 성남이다.
고건 전 총리도 고백했듯이 철거 이주 과정의 비인간적인 처사, 투기꾼 방치, 일자리 제공이란 명분 뒤의 살인적인 노동 조건과 노동 강도, 장시간 노동은 자연스럽게 노동운동 그리고 도시빈민운동을 태동시켰다.
그런 조건들이 성남을 중심으로 한 동부연합으로 하여금 타 지역의 노동 또는 사회운동과 그 성격을 확연히 달리하게 만든 셈이다. 그 결과, 오늘날 성남은 3류 몽상가에게는 혁명이, 3류 조폭에게는 시장통의 꾸깃꾸깃한 돈다발이, 3류 정치인에게는 딱 그에 걸맞는 현실 권력이 버무려진, 아웃사이더들의 욕망이 아수라로 다시 한번 전 국민적 관심 지역이 되었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이석기 등이 주도한 통진당도 자생적 주사파 정치조직이다. 이석기 등 경기동부연합의 핵심은 주사파의 대부라 불리는 김영환을 비롯한 조유식, 하영옥 등이 공작선을 타고 직접 평양에 다녀오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확연하다.
즉, NL 운동권에서조차 성남 구도심을 근거지로 한 경기동부연합은 비주류, 아웃사이더로서의 위상에 머물렀어야 했다는 뜻이다. 우파 스피커들 중 제법 많은 수가 그들을 남로당과 억지 연결시키는데, 그것은 성남의 빈민운동과 노동운동에 대한 이해가 전무해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개발시대 ‘천변풍경’과 청계천 철거민들
오늘날 인구 100만이 조금 못 미치는 성남시는 1973년 시로 승격되기 전까지는 경기도 광주군에 속해 있었다. 지금의 중원구와 수정구가 해당되는데, 당시 행정구역상으로 광주군 중부면에 속했다.
이 조용한 시골 동네가 대한민국사 속에 등장하며 파란만장한 한 획을 긋기 시작한 시점이 1968년이다. 1968년 서울시는 정부 방침에 따라 도시정비계획을 세우고 청계천 남은 구간을 마저 복개하기로 한다. 서울시는 우선 청계천을 끼고 난립한 무허가 가건축물들을 철거하기로 한다.
무허가 가건축물이란 청계천 가에 각목 등을 기둥 삼아 베니어판 등으로 얼기설기 머물 공간을 만들고 갑바로 지붕을 덮어 비를 막은 하꼬방들끼리 잇대어 늘어선 집들을 말한다.
청계천 주민들은 청계천이 세면장이고 빨래터였고, 한여름에는 물놀이터였다. 식수 공급조차 원활치 않았던 당시에 청계천민들은 개천 물을 떠다 이 물을 가라앉혀 가며 식수로 사용하기도 했다. 일당 노가다를 비롯, 파출부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청계천민들은 서울시의 철거 계획에 반발하며 이주를 거부했다.
그러나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따라 도시 정비를 실행하려는 박정희 정권의 의지는 강고했다. 6·25전쟁 이후 서울의 가장 대표적인 슬럼 지역이 되어 버린 청계천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복개 사업이 단계적으로 실시된다.
조선총독부와 1955년 이승만 정부에서도 정책적 필요에 따라 일부 복개를 했지만, 청계천이 본격 복개된 것은 1958년부터였다. 1958년 5월부터 1961년 12월까지 광교부터 청계6가(동대문야구장 부근)까지, 1965년부터 1967년까지는 청계6가~청계8가(신설동) 구간이 복개됐다.
문제는 1970년부터 1977년까지 실시된 청계8가부터 신답철교까지의 구간이었다. 단계별로 청계천 복개로 이뤄지며 복개 구간에 살던 청계천민들이 하류 천변까지 밀려오며 극심한 밀집도의 슬럼이 되어 버린 것이다.
1968년 서울시는 청계천민들한테 집과 일자리를 약속하며 이주 동의를 받아낸다. 1971년 6월 23일 무허가 판자촌 2628동이 마지막으로 철거됨으로써 청계천민 철거 이주 사업이 완료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청계고가도로가 연장되어 건설되고, 고가도로 아래 하천부는 복개되어 도로로 사용되며 기존 청계천로의 연장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 철거 이주 과정은 대단히 흉포(凶暴)하고 비인간적인 것이었다. 한밤중에 군용트럭을 동원하여 철거민들을 토끼몰이하듯 트럭에 실었고, 그마저도 가재도구조차 변변히 챙겨 나가지 못한 판잣집들이 불도저에 의해 맥없이 쓰러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청계천민들은 낯선 어딘가로 실려 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의 높고 낮은 구릉과 야산이 끝없이 이어진 어느 시골 동네였다. 일종의 신도시 개념으로 설정된 소위 ‘광주대단지’였다.
트럭에서 ‘부려진’ 철거민들은 자신들 눈앞에 약속된 집 대신 군용 삼각 텐트들이 줄지어 늘어선 것을 보며 절망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고, 여기저기 항의하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그러나 그들을 이주시킨 현장 실무자들은 임시 거주처일 뿐이고 약속한 집과 일자리가 곧 제공될 거라며 그 자리를 떴다.
이주민들은 아무런 약속 이행도 없는 정부 당국을 원망하며 천막살이를 시작했다. 그래도 정부가 약속한 무언가가 이뤄질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초기인 1968년 이주자 기준으로 3년여가 지나면서 철거 이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1969년 9월 1일부터 철거민 이주가 이뤄졌고, 서울시는 이주민들에게 일괄적으로 20평(66㎡)씩 땅을 분양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기반 시설을 전혀 조성하지 않았고, 이주민들은 상하수도 시설조차 없는 곳에서 천막이나 판잣집을 지어 생활해야 했다.
1971년 6월 조사 당시 취업대상자의 5%만이 단지 내에서 일자리를 가질 정도로 지역 경제 기반이 형편없었다. 게다가 살 곳을 찾던 서울 각 지역에서 온 빈민도 급증했고, 그 결과 1971년 8월경의 중원면 거주인구는 15만∼17만 명까지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시는 비용 회수를 위해 용지 처분을 서둘렀다. 그 결과 1971년 총선을 즈음해 광주대단지의 투기 붐은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자 서울시는 분양 중 전매 금지와 함께 높은 가격의 토지대금 일시 상환 조치를 발표했다. 이주자들 처지에서는 한 마디로 서울시 그리고 정부의 배신이고 희롱이나 다름없었다.
마침내 이주민들이 폭발했다. 주로 청계천과 중랑천변에서 이주해 온 철거민 수만여 명은 정부의 무계획적인 도시정책과 졸속행정에 반발하여 1971년 8월 10일 도시를 점거한 가운데 이른바 ‘광주대단지사건’을 일으켰다. 분노한 주민들은 성남사업소, 출장소, 파출소 등 평소에 반감을 지닌 관공서를 파괴하고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기동경비대와 투석전을 벌이며 대치했고, 차량을 이용하여 서울로의 진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도시형 폭동은 6시간 동안 이어졌다. 당시 시위에 참여한 인원은 3만~6만 명으로 대부분 집과 일자리를 약속받고 이주에 동의한 청계천과 중량천변 철거민들이었다.
비록 6시간 동안의 짧은 폭동이었지만 그 상처는 깊고 후유증은 길고도 길게 이어졌다. 광주대단지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지속적 은폐 시도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의 운명뿐 아니라 대한민국사 대전환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당황한 서울시는 양택식 시장이 직접 나서서 투쟁위원회 간부들과의 협상을 통해 구호양곡 확보, 생활보호 자금 지급, 도로 확장, 공장 건설, 세금 면제 등을 합의했고, 시위대는 6시간 만에 해산하였다. 그러나 서울시의 약속 이행은 더디기만 했고, 당장 입에 풀칠을 하고 아이들을 키워야 했던 이주민들은 배고픈 아이들을 천막에 두고 일당벌이를 위해 새벽부터 서울 등으로 나갔다가 밤늦게 귀가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퀭한 눈에 누렇게 뜬 얼굴, 영양실조로 볼록해진 배를 드러낸 채 먹을 것을 찾아 온종일 단지며 단지 주변 산야를 돌아다니며 풀뿌리를 캐고 이름도 모르는 열매를 따먹었다. 송기(소나무 속껍질)를 벗겨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까지 거듭 씹었다.
생활에 지친 철거 도시 빈민들의 삶은 고단하기만 했다. 늦게 귀가한 부모라고 해서 아이들 건사가 특별할 수 없었고, 배고픔에 지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부모를 졸라 봐야 돌아오는 것은 거친 꾸지람, 심지어 분풀이의 대상이 되어 그 조그만 몸으로 아비의 모진 폭력까지도 감당해야 했다. 그럴수록 동네 아이들은 거칠게 정들며 선후배 관계로 결속되어 갔다.
아이러니한 것은 청계천민 철거 이주사업을 위해 급조된 정부의 강제수용권이 그것을 반대한 민주당과 진보 좌파 정권을 통해 더 고도화되고 더 대규모로 자행됐다는 사실이다. 박정희 정권부터 시작된 토지 정부 수용을 통한 개발에 대해 ‘전국철거민연합회(전철연)’를 내세운 좌파 시민단체들과 민주당은 강제 수용의 부당성과 보상의 비현실성, 강제 철거를 가능케 하는 개발관련법 자체가 독소조항이라며 폐지 요구와 함께 지속적으로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권을 공격했다.
가난과 배제, 홀대까지도 네다바이 당한 성남 사람들
그러나 2003년 임기를 시작한 노무현 정부는 대선 공약이자 정권 안정을 위한 대표적 포퓰리즘 정책으로 2004년 정부종합청사 이전을 내건 세종시 사업을 발표했다. 그리고 2006년 12월 21일 당시 한명숙 국무총리는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추진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전체 회의를 열어 행정중심복합도시의 도시 명칭을 ‘세종’으로 확정하고, 본격적인 토지 수용과 함께 개발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렇게 시작된 세종시 건설 사업이야말로 민주당이 역대로 반대해 온 강제 수용 정책의 최정점에 있었다. 원주민들의 사유재산권이 이번에는 좌파 정권에 의해 처참히 파괴되면서 세워진 도시가 바로 노무현 정부의 세종시이다. 그리고 당시까지 대한민국사 최대의 투기판은 단연 세종시였다.
문제는 세종시는 세종시로만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세종시 개발 방식은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가 장악한 지방 정치 세력과 토호들의 돈벌이뿐 아니라 권력을 세습하기 위한 훌륭한 롤모델로 좌파 10년 권력의 뒷받침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폐단은 ‘대장동 게이트’를 통해 극적으로 불거져 나왔다. 이재명 시장은 재직 중에 사실상의 직권 남용과 남발을 통해 성남 대장지구 재개발 사업을 추진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LH를 내세운 정부의 공공개발 방식을 일개 지방자치단체가 임의로 가져와 독단적으로 밀어붙인 사업이다. 그 과정에서 정치권과 언론계, 법조계를 망라하여 그 편법과 불법을 비호하며 수십억, 수백억도 모자라 몇 천억대가 넘는 폭리를 취했고, 이재명 성남시장은 경기도지사를 거쳐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로서 권력의 최정점을 노리고 있다. 그 과정에서 과거 광주대단지로 이주하여 피눈물을 흘리며 악착같이 살아온 성남 사람들은 다시 한번 철저히 배제됐다.
자신들을 대변하리라 믿었던 좌파 정치 권력, 종북 주사파 경기동부연합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적 야욕을 위해 그들을 희생양 삼았다. 성남 사람들은 가난과 배제, 홀대까지도 속칭 ‘네다바이’를 당한 것이다. 그리고 2021년 대장동 게이트와 지역화폐를 둘러싼 비리 의혹의 이면에 똬리 튼 경기동부연합과 국제마피아 그리고 건축업자 명함 뒤의 전문 철거용역 깡패들 얼굴에 어른거리는 저 50여 년 전의 그 아이들과 대한민국이 지금 적대적으로 마주하고 있다.
아웃사이더들의 일그러진 욕정의 파라다이스가 되어 버린 성남, 그들에게 대한민국이란 어떤 존재일지 따로 묻지 않아도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