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성남 대장동 게이트’가 온 국민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 바람에 조성은 씨가 주장하는 ‘윤석열 고발사주의혹’ 사건은 뒷전으로 밀려난 상태다.
처음에는 마치 큰 사건인 것처럼 뉴스 전면에 등장했지만 오히려 박지원 국정원장과 소위 제보자라는 조성은 씨의 사전 만남이 공개되면서 ‘정치공작’ 사건의 의혹을 받고 있다. 물론 검찰 쪽에서 수사를 진행하기 때문에 향후 어떻게 전개될지는 두고 봐야 할 문제다. 그렇다 하더라도 과거 ‘김대업 병풍 조작사건’처럼 정치공작으로는 성공하기 어려울 듯하다.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정치공작은 민주정치의 그늘처럼 존재했다. 과거 김영삼-김대중은 항상 ‘공작정치’ 타파를 부르짖었다. 당시 야당 국회의원 중 일부는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이라는 조롱까지 받았다. 공작정치에는 도·감청, 매수, 음해, 협박, 뒷거래 등이 모두 동원된다.
그 중심에는 정보기관이 있었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같은 경우는 야당 정치인을 협박하기도 했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공작정치는 민주적인 87체제가 개시되면서 사라졌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여전히 존재한다. 권위주의 정권의 공작정치를 그토록 혐오하던 김대중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김대중 정권 당시 국정원장을 지낸 신건 전 의원은 정치인·공직자·언론인 등 각계 1800여 인사의 전화 통화를 도청한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2005년 11월 국정원 불법감청 사건 때문이다.
그는 2007년 12월 항소심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불법감청은 다른 사람의 알몸을 몰래 엿보는 것과 같은 비열한 범죄라고 하던 김대중 정부의 국정원이 불법 도·감청을 한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각계 인사 1800여 명의 전화번호를 입력해놓고 24시간 365일 통화를 엿들었던 사건이다. 또 시내 전화국에서 끌어온 유선 중계통신망을 통해 일반인의 휴대전화 내용도 무작위로 도청한 것으로 드러났었다.
신건 전 의원과 함께 기소된 임동원 전 국정원장은 자신들은 불법감청과 무관하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007년 12월 21일 항소심에서도 신 전 의원 등은 모든 공소사실이 유죄로 인정돼 1심과 같은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이 선고됐다.
이번 조성은 씨의 폭로는 사실 누가 봐도 ‘윤석열 죽이기’가 목적이다. 야권의 가장 강력한 대권 후보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윤석열 후보는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대체 뭘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있으면 (증거를) 대라. 정치공작 한두 번 겪었나”라며 “누굴 고발하라고 한 적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라고 했다. 그는 “채널A 사건도 결국 선거를 위한 권언의 정치공작으로 드러났다”라며 “상식 있는 국민께서 잘 판단하실 것”이라고 강력하게 반발했다.
모함과 공작의 정치의 조선 당쟁사
사색당파가 극심했던 조선시대에 정치공작은 일상다반사였다. 누가 조금이라도 두각을 나타내면 온갖 모함으로 귀양을 보내거나 죽였다. 또 반대파를 집단으로 숙청하는 데는 ‘역모’ 사건으로 몰았다.
조선시대의 정치공작은 주로 ‘대역죄 역모 사건’으로 포장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현재 운동권 출신의 집권 여당은 뚝 하면 ‘쿠데타’라고 하면서 몰아세운다. ‘윤석열 죽이기’에 등장한 구호도 보면 ‘검찰 쿠데타’라는 용어다.
조선시대 용어로 하면 ‘윤석열 역모 사건’쯤 될 듯싶다. 세조 때 이시애의 난과 건주여진 정벌 등에서 공을 세워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남이 장군도 역모 사건 모함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 역모 사건이라는 것이 간신 유자광의 날조였다.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기회로 유자광은 병조정랑 자리에 앉았다. 세조가 승하하자 남이 장군의 후견인도 사라졌다. 세조 뒤를 이은 예종 1년(1468년) 병조참지 유자광이 본격적으로 계략을 꾸몄다.
유자광은 자신의 직속 상관인 남이 병조판서를 몰아낼 계책은 바로 역모 조작이다. 여진족을 토벌하고 남아 대장부의 기개를 땀은 남이 장군의 시 한 구절을 이용했다.
白頭山石磨刀盡(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다하고),
豆滿江水飮馬無(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男兒二十未平國(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리오).
유자광은 3번째 구절에서 ‘未平國’에서 ‘平’자를 ‘得’자로 바꿔 왕한테 알렸다. ‘나이 스물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 어찌 대장부라 하리오’라는 구절로 왜곡한 것이다. 글자 그대로 하면 분명 역모다.
이렇게 해서 남이 장군과 식솔들은 ‘거열형’이라는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유자광은 정치적 대성공을 거뒀다. 유자광은 훗날 연산군 때도 무오·갑자 두 사화를 꾸민 핵심 역할을 했다.
그로 인해 신진 사대부 선비들은 무참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506년 중종반정 때는 발빠르게 혁명 주체 성희안에게 붙었다. 그의 벼슬은 정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무령부원군에 봉해졌다. 간신 유자광은 오늘날로 치면 ‘정치공작의 달인’이라 할 만하다.
그러한 유자광의 악행에 대해 사관(史官)들은 이렇게 기록으로 남겼다.
‘조정에서는 유자광을 독사처럼 여겨 감히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이러한 유자광은 세조부터 중종까지 다섯 임금을 섬기면서 권력을 누렸다. 그러하니 조선의 정치가 제대로 이어질 리는 만무였다.
서애 유성룡과 송강 정철은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임진왜란의 기록을 남겨 후세에 경계를 하고자 했던 징비록의 저자 서애 유성룡, 그리고 관동팔곡과 사미인곡의 저자 송강 정철은 정치적으로는 숙적의 관계였다.
유성룡은 동인세력의 수장이고 송강 정철은 서인의 영수였다. 이 두 사람은 사사건건 대립했다. 집권세력이었던 동인세력은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말미암아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당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이율곡과 성혼의 각별한 인정을 받고 있던 정여립은 서인의 촉망 받는 젊은 인재였다. 그러던 그가 1584년(선조 17년) 이이, 성혼, 박순 등 서인의 주요 인물을 비판하고 동인으로 돌아선 것이다. 선조는 그것을 비판했다. 그러자 정여립은 즉시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 서실(書室)을 짓고 대동계를 조직해 매달 활쏘기 모임을 열면서 군사적 세력을 확장했다. 이런 행보는 서인세력에게는 정권을 잡을 수 있는 호기였다.
정여립의 운명을 결정지은 기축옥사는 1589년 10월에 일어났다. 황해도관찰사 한준,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신천군수 한응인 등은 정여립과 대동계의 무리가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서울을 공격해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려는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선조에게 고변했다.
선조는 격노했다. 정여립의 집을 파헤쳐 못으로 만들었다. 이 사건은 조선 중기 최대의 정치사건인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이로써 정치 권력은 동인에서 서인으로 옮겨갔다. 송강 정철이 정치적 수장이 된 것이다. 정권을 잡은 송강 정철은 반대세력인 동인을 가차 없이 숙청했다. 기축옥사로 인해 동인세력과 관련된 인물이 무려 1000여 명이 죽임을 당했다. ‘연려실기술’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큰 변고가 일어나니, 서인들이 기뻐 날뛰고 동인들은 기운을 잃었다. 이것은 앞서 임금이 서인을 싫어하여 이산해(李山海)를 이조판서 자리에서 10년 동안이나 두는 사이에 서인들은 모두 한산(閑散)한 자리에 있게 되어 기색이 쓸쓸하더니, 여립의 역변이 일어나 후에는 갓을 털고 나서서 서로 축하하였으며 동인들은 스스로 물러나고, 서인은 그 자리에서 올라서 거리낌 없이 사사로운 원한을 보복하였다.>
마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후, 몰락한 친박세력의 모습과 현 정권의 소위 ‘적폐세력 척결’이라는 이름의 정치보복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극심한 동·서인의 대립은 군권에도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장군은 사실상 동.서인의 ‘말’에 불과했다. 전투력으로 평가받지 못했다. 어느 쪽에 줄을 서느냐에 따라 자리가 정해졌다.
이순신 장군은 동인의 영수였던 서애 류성룡이 천거했다. 반대로 원균의 경우는 서인세력이 천거했다. 이순신 장군을 모함했던 정치세력이 서인세력이었음은 당연지사다.
칠천량해전의 대패로 역사의 죄인이 된 원균도 어찌 보면 조선의 정치공작 희생양이다. 오늘날 대한민국도 조선시대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 장군 진급심사, 특히 4성 장군의 경우 정치적 판단에 따라 결정된다.
어제의 집권자가 오늘은 역적으로 몰려 죽고 어제의 역적이 오늘은 권좌에 오르게 되는 일의 일상적인 반복이 바로 조선조 정치공작의 모습이었다.
인조반정 후 조선의 정치는 완전히 서인세력의 독무대가 되었다. 그러한 서인세력의 중심에는 우암 송시열이 있었다. 조선 중후기 정치 격변기의 중심에는 항상 송시열 일파가 있었다.
그들의 교조적 주자학적 태도는 조선의 정치를 더 경직시켰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다르면 어제의 동지도 바로 ‘사문난적’으로 몰아 정치적으로 매장했다.
서인세력은 또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했다. 조금의 이견도 용납지 않는 사상적 경직성 때문이다. 그러한 노론의 경직성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온갖 구실을 붙여 정치적으로 제거했다.
그 결과 남은 것은 자기들만의 세상,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흘러가고 결국 조선은 망국의 길로 갔다. 문제는 그런 서인세력의 정치 형태가 오늘날 운동권 세력에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성공한 정치공작과 실패한 정치공작
김대업은 2002년 5월 21일 한 인터넷매체를 통해 “김길부 전 병무청장으로부터 1997년 대선 직전 이회창 총재 큰아들 불법 병역면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김 전 병무청장, 신한국당 이 총재의 측근인 고흥길 특보 등이 수차례 대책회의 병역판정 부표 폐기 병적기록부 원본 변조했다”라고 주장했다.
그 영향으로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곤두박질쳤고 결국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김대업의 주장은 결국 거짓으로 판명되었고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2003년 11개월 징역 1년 10월을 선고받았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1등 공신인 김대업은 형기도 채우지 않고 가석방되었다. 김대업 사건은 일종의 성공한 정치공작이다. SNS가 발달하면서 정치공작의 방법도 진화했다. 인터넷 매체로 확대재생산하는 구조다.
김대업의 수법을 보면 1단계 : 인터넷매체에 폭로, 2단계 : 공신력이 약한 마이너 언론 보도를 통한 공론화 시도, 3단계 : 네거티브 캠페인을 통한 정치 쟁점화, 4단계 : 검찰 수사를 통한 정치 쟁점의 확산, 5단계 : 메이저 언론과 방송을 통한 기정사실화, 6단계 : 시민단체의 유권자 선동을 통한 세뇌화를 거쳤다.
이번 조성은 씨의 고발사주의혹 건도 신생 인터넷 매체 ‘뉴스버스’를 통해 알려졌다.
나경원 1억 피부과 의혹 폭로 사건도 성공한 정치공작에 속한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나경원 후보의 “1억피부과 의혹”이라는 흑색선전이 트위터로 퍼져 나갔다.
결국 나경원 후보는 그 흑색선전으로 선거에서 지고 말았다. 나경원 후보의 다운증후군을 앓는 딸의 피부과 치료를 위해 다닌 것을 흑색모략한 것이다. 그 최초의 보도는 ‘시사인’이었다.
2011년 10월 20일 시사인의 첫 번째 보도 후, 이 내용을 ‘프레시안’이 바로 이어받아 보도했다. 그리고 삽시간에 트위터를 통해 퍼져나갔다. 그러자 박원순 후보 측에서는 이 문제를 이슈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0월 23일 경향신문에서 재차 보도하면서 마치 김대업 사건처럼 흑색선전은 확대재생산되었다. 물론 즉각적으로 나경원 후보 측은 반론과 진실을 말했다, 우파 네티즌 또한 다운증후군과 피부병의 상관관계와 나경원 후보의 딸에 관한 이야기를 인터넷 공간에서 전했다.
그러나 이미 퍼진 1억 피부과의 혹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결국 1억 피부과 흑색선전은 성공했다.
반면에 실패한 정치공작도 있었다. 17대 대선 당시 김현미 대통합민주신당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 여사가 차고 있는 시계가 고가 명품시계였다고 여론전을 펼쳤다. 시계 가격이 1500여만 원짜리라고 주장하면서 밀수입 의혹을 주장했다.
그러나 확인 결과 그 시계는 개성공단에서 만든 국산시계였다. 그로 말미암아 김현미 의원은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 제3부(주심 박시환 대법관)는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김 의원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아마도 ‘윤석열 죽이기’가 목적인 ‘윤석열 고발사주의혹’도 실패한 정치공작으로 끝날 듯하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서인세력 같은 정치적 모함과 모략이 오늘날 소위 민주세력이라는 집권 여당을 통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정치가 그만큼 퇴보했다는 반증이다.
해방 후 현대적 민주선거제도를 실시한 지 70년이 넘은 오늘날 정치 현실은 조선시대와 하등 다른 바가 없다. 그래서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대한민국이 아니라 ‘후 조선’이라고.
우리 정치사에 정치공작은 DNA로 남아 그대로 전달되는 것은 아닌지 의심까지 든다. 결국 공작정치를 퇴치하는 길은 것은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표로 심판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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