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외교관계가 비우호적으로 바뀌면서 우리 경제와 기업의 피해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정부가 7월 초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소재 3개 품목에 대해 수출규제 조치를 취한데 이어 8월 2일에는 수출우대국(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했다.
연이은 대외변수는 기업경영활동에 큰 불안요소가 되고 있다. 2016년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으로 인한 중국의 경제보복, 2018년부터 계속되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으로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과 외교 갈등은 우리 기업에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당장 일본의 수출우대국 제외조치로 반도체뿐 아니라 산업 전반이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앞으로 우리 기업들이 일본 상품을 구입하려면 일본 정부의 승인을 받는 절차를 거쳐야만 한다. 보통 1주일이면 가능하던 일들이 최대 3개월까지 소요될 수 있다고 하니 기업들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엉뚱하게도 일본 제품의 수입길이 막혀 속이 타는 기업에 원망이 쏟아졌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기업들이 일본에 의존해 제품을 생산한 것이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대통령부터 나서서 “일본의 협력에 안주하고 변화를 적극 추구하지 않았다”고 질책하는가 하면, 박영선 중기벤처부 장관은 “국내 중소기업이 만들 수 있는데, 대기업이 안 사주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마치 기업이 그동안 일본과 거래한 것 자체가 문제였다는 식이다.
정부의 경제보복 대일 정책은 ‘미봉책’
정부가 대책이라고 마련한 것 역시 기업과 시장경제, 대외무역 시스템을 외면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8월 5일 정부가 나서서 핵심기술을 확보하고 국내생산 확대, 수입처 다변화를 통해 산업의 대외 의존을 탈피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를 위해 7년간 약 7.8조 원의 예산을 배정했다. 현재 문제의 근본 원인은 일본과의 외교 갈등에 있다. 정부는 외교력을 동원해 이 갈등을 해소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 민간과 기업이 마련해야 할 수준의 대응책을 내놓으며 오히려 시장에 개입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어 우려스럽다.
우리 기업이 부품과 완제품을 포함해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을 보유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세계 최고의 기술은 각 기업이 시간과 자원을 투자해 오랜 시간 공들인 결과물이다. 정부가 7.8조 원의 예산을 투입한다고 해서 쉽게 성과를 낼 수 없는 분야다.
그동안 우리 기업들은 완제품의 성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부품을 찾아내고 최고의 기술로 완성품을 만들어 세계 시장에 수출해왔다. 이런 노력들이 삼성과 SK하이닉스가 세계 시장을 석권하게 만든 비결이었다. 해외 시장을 뒤져 적합한 부품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국산화에만 매달렸다면 빠른 시간에 지금과 같은 성과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부품을 사용할지, 어느 분야에 투자할지는 기업이 정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그것은 기업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미우니 일본 부품을 사지 말아야 한다거나 국내 중소기업의 부품으로 대체하면 된다는 식의 주장은 기업의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기업들은 일본 제품이라 거래한 것이 아니라 세계 최고의 품질이기 때문에 거래한 것이다. 부품을 국산화해서 품질이 떨어지거나 가격이 올라간다면 그것을 용인할 소비자는 없다. 기업들에 경쟁력이 떨어진 제품을 팔라는 이야기는 세계 시장에 수출하기를 포기하라는 의미와 같다.
우리 경제는 자유무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세계적인 분업 구조에 속해 있다. 각 국의 기업들은 비교우위를 가진 물건을 팔고 경쟁력이 낮은 부품은 해외에서 사들인다. 이 체계 안에서 경쟁력 있는 제품이라면 국경과 같은 제약 없이 거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우리도 무역 중심의 국가로 국제시장 차원의 협력을 통해 경제 성장을 일궈왔다. 이런 상황에서 국산화만 주장한다면 자칫 국제 경제에서 이탈해 고립을 자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시장경제에서 거래는 쌍방이 이익을 얻는 윈윈(WIN-WIN)의 결과를 낳는다. 물건을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각각 이익을 볼 수 있다는 의미다. 일본의 무역제한조치는 뼈아프지만, 이에 대응하겠다며 일본에 물건을 팔지 않고, 일본제품을 사지 않으면 된다는 식의 주장은 우리 경제를 위한 처방이 아니다. 당장 일본 물건을 팔아주지 않으면 일본 기업만 손해를 볼 것 같지만, 우리 기업들이 최고 품질의 부품들을 구하지 못해 타격을 받고, 우리 소비자가 좋은 품질의 상품을 소비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것이 장기화된다면 우리 경제에 큰 위협이 될 우려가 있다.
막대한 예산 투입보다 기업규제 완화가 효과적
만일 정부가 위기에 처한 기업들을 돕고자 한다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는 대신 기업규제를 완화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다. 국내 정치논리에 입각한 경직된 노동정책과 각종 규제는 우리 기업들의 경쟁력을 발목 잡아 왔다. 급격한 최저임금의 인상과 주52시간 근로제와 같은 친노동정책은 노조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지 몰라도 우리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떨어트리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기업의 경영을 위협하는 규제들을 대폭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정부가 반도체 부품 관련 사업에 대해서는 52시간 근로제도를 완화하겠다고 발표했다. 또 대기업 계열사간 일감 몰아주기 규제도 완화해 계열사에서 관련 품목을 조달할 수 있게 길을 열어 줬다. 이번 일본의 수출제재로 정부의 규제가 글로벌 시장에 경쟁 중인 기업과 우리 경제에 얼마나 위협적이었는지를 확인하게 된 셈이다.
현재 20대 국회에는 기업의 경영권 방어를 위협하는 상법개정안, 공정거래법개정안을 포함한 3200개에 달하는 규제 법안들이 계류 중이다. 이런 규제 법안 대신 기업친화적, 시장친화적인 법안들이 나와 경제에 활력을 줄 수 있게 정책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다.
<손자병법>에는 이미 승리한 다음에 적과 싸우라는 말이 나온다(可勝者 攻也). 이길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이 된 후에 전쟁을 시작한다는 의미다. 일본은 잇단 한국 정부와의 갈등을 고려해 완벽하게 이길 전략과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다.
그에 비해 우리 정부와 정치권은 싸움을 시작한 후에 이길 궁리를 하는 영락없는 패자의 모습이다. 일본 정부와 각을 세우고, 일본 상품 불매운동에 앞장서는 등 반일감정을 자극하는 강경한 대책만 내놓을 뿐이다.
경제 문제는 정부가 나서서 더 이상 일본에 지지 않겠다고 정치적 선언만 한다고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장 우리 기업이 물건을 만들지 못하고 해외로 팔지 못하면 생존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많은 투자자들이 한국 시장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우리 경제의 불확실성은 지금의 증시와 환율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정부는 반일감정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일본과의 신뢰 회복에 힘쓰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대책을 마련하겠다며 섣불리 시장에 개입하고 정부의 재정을 낭비하는 일도 지양해야 한다. 정부는 기업이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해 길만 열어주면 된다. 정부는 정부대로, 기업은 기업대로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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