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신일철주금 등 일본 기업이 일제시대 강제징용피해자에게 불법행위를 배상하라는 판결이 선고되었다. 이 재판을 바라보는 일본은 강력 반발하고 있다. 이제 일제 강제징용판결은 한국과 일본의 첨예한 외교문제로 부상했다. 강제징용배상판결은 사법부 판결이 외교에 영향을 미치는 아주 드문 사례다. 과연 이 배상판결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대법원 판결은 강제징용에 대한 배상은 한일 청구권 협정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시하고 있다. 소멸시효 등과 관련한 부분은 부수적이다. 민법상 화해는 논의된 사항에만 효력이 미치고 그 외의 사항에는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 강제징용불법에 대한 배상은 과연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제외되는 것일까. 대법원 다수 의견은 일본이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청구권협정에는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고, 불법성을 전제한 배상청구권은 한일청구권협정에서 제외된다는 것이 주요 요지다.
2차 세계대전의 전범이었던 일본은 승전국에 대한 배상을 진행했다. 당시 세계는 한국에 대해 단순히 승전국이 아니라는 점을 넘어서 일본을 배후지원한 식민지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당시 친일파들이 대일본제국을 위해 저지른 선전선동을 생각해 보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3상 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는데, 이는 미군정이 실시된 일본에 대한 조치와 동일한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도 ‘한국은 일본과 싸운 일이 없다’는 영국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고 공인되었다. ‘국제적으로’ 우리나라는 승전국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고, 배상청구를 할 자격도 없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본 식민지배의 불법성에 대해 대법원 판결은 그 불법성을 헌법적 가치로 인정하고 있다. 이에 반해 일본 법원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부정한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은 바로 이러한 복잡한 외교 상황에서 탄생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식민지배에 따른 회복할 수 없는 역사적, 감정적 갈등의 골을 넘어, 합의될 수 없는 법적, 외교적 문제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과 중국이라는 강력한 공산진영에 직접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갈등을 방치할 수 없었고, 우리나라 역시 국가경제를 발전시켜야 할 자금이 절실했다. 결국 한일 양국은 식민지배에 대한 불법성을 명시하지 않고 식민지배는 무효임을 확인한 후 모든 청구권을 소멸시키기로 하는 한일 청구권 협정을 타결했다. 이후 일본은 우리나라에 당시 한국 정부 예산의 2.5배에 달하는 5억 달러(배상 3억 달러, 차관 2억 달러)를 지급했다.
우리나라는 한일 청구권 협정 당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고, 한국 협상단의 식민지배 불법성 주장이 있었음을 대법원 판결에도 명시하고 있다. 한일 청구권 협정이 그 불법성을 명시하지 않은 것은 식민지지배가 합법임을 인정한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배의 불법성이 명시되지 않고 무효가 선언된 것은 일본이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을 고려한 것일 뿐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해 논의되지 아니한 사항이면 모르되,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재차 개인들의 청구가 들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일본이 한일 청구권 협정을 이런 식으로 맺을 리가 만무했다. 한일 청구권 협정 이후 협정 내용에 따라 한국 정부는 식민지 피해자들에게 수차례 걸쳐 배상작업을 진행해 왔다. 대법원의 소수의견도 강제징용피해자들에게 배상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배상하되 그 책임은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일본 기업이 아닌 우리나라가 부담해야 한다는 취지다.
대법원 판결이 야기한 더 큰 문제, ‘식민지배의 법적 효력’
일본 정부는 이번 달 6일 한국 정부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강제징용배상판결에 관련해 제소한다고 발표했다.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다퉈져야 할 핵심 쟁점은 이제 식민지배의 불법성이다. 국제사법재판소는 당사자가 응하지 않으면 재판을 열지 않는다. 일본은 독도 영유권에 대해 오랫동안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해왔고, 우리나라는 이에 응하지 않고 있다. 이미 우리나라는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고 국제사회에 적어도 이 실효적 지배까지는 공인 받고 있기에 재판에 응하지 않는 것은 유용한 전략이다.
그러나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다투는 제소를 응하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가 건국 이래 주장해왔던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입증할 논리가 부족한 꼴이 된다. 이 얼마나 우스운 현상인가? 반대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증명할 자신이 있어 재판에 응했다가 패소하면,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식민지배가 합법임이 공인되어 버린다. 결국 이번 대법원 판결은 대한민국의 목숨과도 같은 역사성을 시험대에 올린 꼴이 되어 버렸다.
우리가 국사책에서 배운 그대로 아무 쟁점 없이 당연히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당시 대한제국은 황제국으로 주권은 백성이 아니라 고종황제가 가지고 있었다. 1905년 미국은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통해 필리핀에 대한 지배를 승인 받는 대신 일본의 조선지배를 인정했다. 이미 군사력으로 압도한 일본이 고종이나 대신들을 살해하지 않고 조약의 형식을 빌렸던 것은 식민지배의 합법화를 위한 것이었다. 고종은 조약을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아무런 결정을 하지 않고 대신들에게 위임해 버렸다. 우리 역사는 이를 고종이 반대의 취지였다고 평가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위임을 받은 대신 총 8명 중 이완용을 비롯한 5인의 동의에 의해 을사조약이라고 불리는 2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었다. 을사조약은 국가의 주권 중 외교권에 한정된 것이었다. 진정한 한일합방은 순종이 체결한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었다. 순종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저항 없이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그 이후 조약의 효력에 대해 단 한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순종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을 때,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탄식했다고 한다.
국제사법재판소는 누구의 편을 들 것인가?
‘국제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불법성을 인정받고 배상이라는 후속조치를 요구하려면 세계가 한국에 호의적일까?우선 가쓰라 태프트 밀약의 당사자인 미국부터 필리핀에 대한 식민지배의 불법성이 문제된다. 미국 외에도 2차 세계대전 주요 승전국들은 다수의 식민지를 보유한 제국주의 국가였다. 일본의 제국주의가 불법이라 식민지에 배상을 해야 한다면, 지금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과 주요 유럽 열강 모두 식민지에 배상해야 한다.
한일기본조약 중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조항이 있다. 이 조항을 근거로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대내외적으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주장해왔다. 각종 학계, 언론계 및 각종 기관의 문헌에도 바로 이 조항을 식민지배 불법성의 주된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
한 마디로 일본이 스스로 식민지배가 불법하다고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법원에서 이 조항이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식민지배가 불법하다는 우리의 주장은 어떻게 인정받는가. 국제사법재판소에서도 식민지배의 불법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대법원이 헌법적 가치라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은 일본도, 세계도,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단독주장이 될 뿐이다.
그러기에 한일 청구권 협정은 식민지배의 불법성이 논의되고 일부라도 반영된 협정이어야 했다. 일본은 한일 청구권 협정 당시 기존 조약을 무효화 시켜서 사실상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했음에도 지금 말을 번복하는 것이어야 했다. 강제징용피해자들의 배상은 대한민국이 책임져야만 했다.
이제 이 대법원 판결 때문에 이미 봉합되었던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다퉈야 하는 한국과 일본은 모두 양국의 발전을 해치는 불필요한 소모전 속으로 끌려들어 간다. 양국 모두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다. 일본이라면 무조건 추종하고자 했던 그 과거의 친일파와 일본이라면 무조건 혼내주고 싶어하는 사람들 모두 똑같은 ‘식민지의 그림자' 일 뿐이다.
원영섭 변호사
서울대 건축학과 졸업
전 자유한국당 서울 관악구갑 당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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