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촛불민주주의’가 새로운 국시(國是)라는 대한민국, 그래서 대한민국은 지금 안녕한가. ‘이게 나라냐’던 분노의 적폐청산이 법 위에 군림하는 대한민국, 그래서 ‘이건 나라인가? 빗나간 민주주의를 회복할 정치철학은 무엇인가. 자유 보수의 대안적 정치철학이 시급한 지금, 민주주의를 넘어 공화주의에 대한 새로운 아젠다가 제기되고 있다. 이에 미래한국은 보수주의 정치철학으로서 공화주의에 대한 심원한 지평과 만나기 위해 3회 연속, ‘공화주의와 자유 그리고 번영’의 공론장을 마련했다.(편집자注)
공화주의는 자기 파괴적인 민주주의의 결점을 극복하고 안정과 번영을 구가할 수 있는 우수한 정치체제이다. 역사적으로 공화주의는 민주주의보다 훨씬 오래 존재했으며, 어느 정치체제보다 지속적으로 안정과 번영을 구가했다. 공화주의가 민주주의보다 우수한 정치체제라는 것이 처음으로 알려진 때는 3차 포에니전쟁이 끝난 뒤다. 당시 카르타고를 패망시킨 로마 장군은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였는데, 그가 카르타고 원정을 떠날 때 따라나선 그리스 정치인이 있었다. 그가 바로 폴리비오스였는데, 그는 위대한 제국 카르타고가 불타는 것과 또 다른 제국 로마가 화려하게 부상하는 것을 직접 보고 싶었다.
폴리비오스는 마케도니아가 로마에 복속될 때 전쟁 포로로 로마에 끌려와 노예생활을 했던 그리스 정치인이었다. 다행히 유력자의 자제를 가르치게 되어 나중에 노예 신분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때 가르친 제자가 바로 로마의 카르타고 원정 사령관이었다. 원정에서 돌아와 그가 고민한 문제는 바로 “로마나 아테네는 거의 같은 시기에 정치개혁을 하였는데, 왜 로마는 승승장구하고 아테네는 일찍 망했는가?”였다. 로마는 타르퀴니아스 왕을 추방하고 BC 509년에 공화정을 세웠고, 아테네는 히피아스 참주를 내쫓고 BC 508년에 민주정을 세웠다. 아테네는 170년 존속하다가 BC 338년에 멸망했지만, 로마는 계속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면서 대제국으로 올라서고 있었다.
폴리비오스의 결론은 간단했다. ‘로마가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까닭은 군주정, 귀족정 및 민주정을 혼합한 최선의 정부형태이기 때문이다.’ 군주정을 대표하는 집정관, 귀족정을 대표하는 원로원 및 민주정을 대표하는 호민관과 민회가 서로 견제했기 때문에 정치권력이 부패하지 않고 강건했다는 것이다. 그리스에서는 오래전부터 순수정들은 반드시 타락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로 정체순환론이다.
원시 군주정이 신민의 동의와 법적 정당성을 가진 왕정으로 발전했다가 폭력과 공포에 의존하는 참주정으로 타락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뛰어난 사람들이 신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귀족정을 세우지만 뒤에 가서는 소수 특권층의 이익에 봉사하는 과두정으로 쇠락한다. 그러면 이제 인민들이 들고일어나 스스로 다스리는 ‘민주정’을 세우게 되지만, 그것 역시 선동가들이 활개를 치는 ‘중우정’으로 전락하고 만다. 정치체제는 쳇바퀴 돌듯 지나온 길을 다시 윤회한다는 것이다.
로마의 번영과 공화정의 혼합정치
로마가 정체순환론의 고리를 끊고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까닭은 혼합정치체제이기 때문이다. 폴리비오스의 진단은 고대의 로마지성들 뿐만 아니라 근대의 자유지성들에게도 큰 영향을 줬다. 로마의 정부형태를 혼합정치체제로 파악하고 각 정치요소들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진단은 폴리비오스 고유의 것이었다. 물론 혼합정치체제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구상했던 정치체제이기도 하다. 쇠락하던 아테네를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대안의 정치체제를 찾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구상했던 혼합정치체제는 견제와 균형이라는 정치원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폴리비오스의 독특한 진단으로 당시 로마지성들은 자신들의 정치체제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고 높은 자부심을 느꼈다. 근대에 들어와 몽테스키외나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도 큰 영감을 얻고 3권 분립과 견제와 균형과 같은 정치원칙을 세웠던 것이다.
혼합정치체제는 민주주의와 달리 그리스어의 이름이 없다. 민주주의는 데모크라시(democracy: demokratia)라는 그리스어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혼합정치체제는 리퍼블릭(republic: res publica)이라는 로마어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혼합정치체제로서 로마가 가장 훌륭한 국가로 분석되었기 때문이다. 폴리비오스는 대내적인 정치 안정성과 대외적인 강력함을 함께 고려할 때 로마가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이렇게 민주주의가 아테네의 정치체제를 대표하는 말이 되었듯이, 공화주의는 로마의 정치체제를 대표하는 말이 되었다. 그렇지만 폴리비오스는 공화정도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고 봤다. 효과적 결정, 신중한 심의, 그리고 다수의 지지가 결합된 혼합정치체제가 보다 안정적이지만 언젠가 쇠망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모든 생명체가 죽는다는 일종의 자연과정으로 여기는 정도였고, 어떤 특별한 이유를 밝히지는 못했다. 아마도 공화정의 또 다른 차원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공화정을 견제와 균형의 정부형태로 정치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하고, 다른 측면인 신분투쟁의 사회경제적인 차원에서는 이해하지 못했다.
공화정의 쇠망을 정치적인 차원과 사회경제적인 차원의 복합과정으로 파악한 사람은 르네상스 시대의 마키아벨리였다. 그는 폴리비오스와 달리 로마 공화정의 쇠락 과정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역사 경험을 반추해 분석해낼 수 있었다. 로마 공화정은 카이사르 참주정으로 전락하면서 멸망했다. 참주정으로 전락하게 된 계기는 사회경제적인 차원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가 찾아낸 공화국 쇠락의 계기는 크라쿠스 형제의 농지개혁운동이었다.
크라쿠스 형제는 BC 133년부터 121년까지 그동안 귀족들이 회피해왔던 농지법을 무리하게 추진했다. 농지법은 두 개의 조항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어떤 시민도 일정한 양 이상의 토지를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적으로부터 빼앗은 토지는 시민에게 분배한다는 것이었다. 이 법은 귀족들에게 이중의 손해를 입혔다.
법이 허용하는 것보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귀족들은 여분을 몰수 당하게 되었고, 적의 재산을 다수에게 분배하면 귀족들은 치부의 수단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계급투쟁과 참주제가 망친 로마의 공화정
귀족들은 크라쿠스의 농지법에 반대를 하는 것이 공공선에 봉사한다고 믿었다. 호민관에 당선된 크라쿠스 형제는 관례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농지법을 강행했다. 그러자 평민과 원로원 사이에 커다란 증오가 생겨났고, 이 와중에 크라쿠스 형제는 암살당하고 말았다. 로마 공화정 사상 처음으로 발생한 정치폭력이었다. 이제 예전의 합법적인 습관이나 관습과는 반대로 급기야 무력충돌과 유혈사태가 빈번해졌다.
당국이 해결하지 못하자 당파들은 자신들을 방어하려고 지도자를 선출했다. 평민들은 마리우스를 내세웠고, 귀족들은 술라를 지지했다. 내전에 돌입한 것이다. 뒤에 케사르가 마리우스파의 우두머리가 되고 폼페이우스가 술라파의 우두머리가 되자, 지중해를 뒤덮는 거대한 전쟁으로 발전했다. 케사르가 승리하자 로마 최초의 참주가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크라쿠스 형제가 의도는 좋았지만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정의를 추구하려다가 계급전쟁에 불을 당긴 꼴이었기 때문이다. 로마가 건국 이후 신분 투쟁 과정에서 아슬아슬하게나마 계급균형을 이뤄왔는데, 이때부터 계급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본 것이다. 그의 논지는 간단했다. 계급균형이 깨져서 어느 한 쪽이 압도하게 되면 견제와 균형의 정치동력을 잃어버리고 공화정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결국 케사르가 승리하고 평민계급이 전권을 잡자 곧바로 로마 공화정은 참주제로 전락했고, ‘로마는 영영 자유를 잃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공화제의 사회경제적인 정치원칙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대립하는 사회계급들이 서로 세력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균형이 깨지면 정치체제는 타락할 수밖에 없다. 공화주의의 정치원칙은 마르크스의 계급투쟁론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깨우쳐준다. 마르크스는 계급대립을 종식시키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했다. 프롤레타리아가 승리해 독재를 할 수 있을 때 자유와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20세기에 공산권의 참상을 경험했고, 그들이 얼마나 인간성을 말살했는지 알고 있다. 20세기 역사가 반증해 주고, 로마 공화정의 역사가 실증해 주듯이, 계급대립을 끝낼 때가 아니라 계급균형을 이룰 때 자유와 평화가 찾아온다.
민주정 아테네가 중우정치에 빠진 이유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썼던 투키디데스도 한 계급이 도시 전체를 지배할 때 정치체제는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무산계급 테테스((Thetes)가 지배하는 아테네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고 중우정치로 빠질 수밖에 없다고 봤다.
우리는 아테네의 데모크라시가 클레이테네스의 개혁으로 BC 508년에 시작된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클레이테네스의 정치체제는 이소노미아(isonomia)로 불렸다. 우리말로 정착된 번역어가 없지만, ‘공평정치’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아테네의 정치체제가 데모크라티아(demokratia, democracy)로 불린 때는 BC 461년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가 정치개혁을 단행한 뒤였다.
이소노미아 시절의 아테네는 귀족과 평민이 어느 정도 세력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귀족의 회의체인 아레오파고스는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평민의 본거지인 민회의 권력을 견제할 수 있었다. 공화정의 정치원칙이 작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BC 480년에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BC 460년경에도 아레오파고스의 정치적 권위는 탄탄했다. 그러나 스파르타 문제로 귀족파가 머쓱해지자,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는 귀족파의 지도자 키몬을 도편추방하고, 아레오파고스의 권력을 빼앗아 모두 민중의 손에 안겨줬다. 민회의 지배자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노를 젓던 무산계급이었다. 이제 민회를 지배하는 이들이 아테네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들의 주된 수입원은 전쟁수당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전쟁에 나가려고 했다. 아테네의 호전적인 제국주의가 발동 걸린 것이다.
아테네가 무산자 계급의 지배체제로 바뀌었는데도 30여 년 동안 크게 번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아테네의 번영은 너무나 인상적이다. 아테네의 문명사적인 업적은 서양문명이나 현대문명의 모태가 되었다. 어떻게 이토록 번영할 수 있었을까?
투키디데스의 진단은 간명하다. 페리클레스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민주정체에서는 무산대중의 욕망을 통제하기가 지극히 어려운데, 위대한 페리클레스가 이를 잘 통제했기에 안정과 번영을 구가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페리클레스가 아테네 정치를 이끌던 시기를 아테네 민주주의의 절정기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투키디데스의 말은 다르다. 당시는 민주주의의 시대가 아니라 “사실은 페리클레스가 ‘첫째가는 시민’으로서 통치한 1인 독재의 시대였다”는 것이다. 페리클레스는 매년 장군직인 스트레타고스로 선출되어 아테네의 정치를 주도했다. 그는 천재적인 정치 감각에 미남에 웅변까지 잘했다. 민중을 사로잡을 줄 알았으므로 민중의 비위를 맞추지 않고도 슬기롭게 아테네의 정치를 이끌었던 것이다. 위대한 아테네는 이렇게 탄생했다.
문제는 훌륭한 지도자가 사라졌을 때다. 페리클레스가 전염병으로 아깝게 죽자 아테네는 곧바로 데마고그들이 판치는 중우정치로 전락했다. 이 시대를 살아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민은 깊었다. 그들의 해법은 순수민주정을 탈피해 혼합정치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제안은 물거품이 되었고, 폴리비오스는 그들의 꿈이 로마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을 똑똑히 봤다.
군주정의 효과적 결정, 귀족정의 신중한 심의, 그리고 민주정의 다수 지지가 결합된 최선의 정치체제일지라도 대립하는 계급 사이의 세력균형이 깨지면 쇠락의 길로 접어들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혼합정치체제인 공화정이 다른 어느 정치체제보다도 계급균형을 유지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것도 사실이다. 계급균형을 추구한 정치체제는 혼합정치체제인 공화정 밖에 없다. 순수정치체제는 계급균형보다는 피지배계급의 지지를 얻은 계급지배에 지나지 않는다.
공화주의가 계급균형을 이루려는 이유, ‘자유수호’
공화주의가 계급지배를 거부하고 계급균형을 추구한 까닭은 원초적인 본능인 자유를 지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계급지배는 피지배계급의 자유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의 자유까지 앗아간다. 계급지배는 정치체제를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공화주의에서 추구하는 자유는 독특하다. 민주주의의 자유는 자기지배의 자유(freedom of self-government)이고, 자유주의의 자유는 간섭받지 않을 자유(freedom of non-interference)이다. 자기지배의 자유는 적극적 자유로 알려져 있고, 간섭받지 않을 자유는 소극적 자유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공화주의 자유는 신로마공화주의 정치철학자인 페팃이 최근에 비재배의 자유(freedom of non-domination)으로 개념화했다.
공화주의가 추구하는 자유를 살펴보자. 공화주의의 자유는 외국이나 타인으로부터 지배받지 않을 두 겹의 자유를 말하는데, 둘은 내용상 동일한 것이다. 두 겹의 동일한 자유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원초적이고 정합적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를 마키아벨리가 소개한다. 로마 초기에 이탈리아 반도에는 여러 민족이 자유롭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로마가 정복에 나서자 주위에 산재한 여러 민족 사이에 합종연횡이 추구되었다. 당시에 그들은 대부분 왕을 세우지 않고 자유롭게 모여 살고 있었다. 로마인이 베이인을 정복하려고 포위하고 있을 때였다. 베이인은 자신의 방위를 위해서 왕을 옹립하고 로마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해 에트루리아인에게 원조를 요청했는데, 에트루리아인은 많은 회의를 거듭한 끝에 베이인이 1인 왕의 통치하에 살고 있는 한 원조를 제공할 수 없다고 결정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에트루리아인은 이미 스스로 자유를 포기해 왕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있는 나라를 방어하는 것이 결코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공화주의의 자유 개념은 자국이 타국으로부터 지배받지 않는 것과 자신이 타인한테 지배받지 않은 것의 동일선상에 놓여 있다. 모국이 외국의 지배를 받아도 자유인이 될 수 없고, 자신이 타인의 지배를 받아도 역시 자유인이 될 수 없다.
베이인은 에트루리아인의 원조를 받아 로마를 물리치더라도 자유를 누릴 수 없게 되었다. 1인 왕의 지배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트루리아인의 판단은 로마인을 물리쳐도 결국 베이인이 자유를 누릴 수 없다면 굳이 원조해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공화주의는 민주주의와 어떻게 다른가
지배받지 않으려는 욕망이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이토록 본원적이라면, 정치체제는 반드시 지배받지 않을 자유를 지키기 해서 조직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어느 사람이나 사회계급도 권력독점을 할 수 없도록 권력구조를 짜야 한다. 로마는 국가권력을 집정관, 원로원, 그리고 호민관에게 적절히 나눠 주고 서로 견제하도록 했다.
로마 공화정이 번영할 수 있었던 까닭은 국가권력을 나눠 적절히 배치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는 지배받지 않으려는 욕망이 지배하려는 욕망보다 강력하도록 권력을 배치했다. 지배하려는 욕망은 귀족들이 가지고 있고 지배받지 않으려는 욕망은 평민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유를 보호하는 직책을 평민에게 맡겼다. 키케로에 따르면, “권력(potestas)은 인민에게 있고, 권위(auctoritas)는 원로원에 귀속될 때 존재하는 법적 균형을 바탕으로 해야만” 자유를 지킬 수 있다. 마키아벨리도 이런 권력배치가 자유를 지키는 데 효율적이라고 봤다.
자유를 보호하는 직책을 귀족에게 맡긴 스파르타나 베네치아보다 평민 호민관에게 맡긴 로마가 훨씬 크게 번영했던 것이다. 현대사나 고대사는 공화주의가 시민의 자유를 지키는 데 가장 우수한 정치체제라는 것을 알려준다. 민주주의는 계급지배가 가능하도록 권력구조를 짰기 때문에 위대한 지도자가 없는 한 종국에는 자기 파괴로 시민의 자유를 말살한다. 그렇지만, 공화주의는 계급균형을 이루도록 권력구조를 짰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번영할 수 있다. 현대정치체제는 안정적인 자유체제를 구축한 고대 로마의 공화정을 본받아 탄생했다. 현대정치체제는 19세기 혁명의 시대를 극복하고, 20세기 전쟁의 시대를 승리로 장식했으며, 이제 21세기에 들어와 자유무역의 시대를 열고 전 세계에 평화와 번영을 전파하고 있다. (다음호에 3부가 계속됩니다)
김주성 전 한국교원대 총장
텍사스주립대 정치학 박사
전 한국동양정치사상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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