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저는 어릴 때 초등학교에서 이승만 대통령 찬가도 부르고 청년 이승만이라는 영화도 보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생각나지 않고,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제가 대학 교수가 되고 나서도 한참 뒤인 나이 거의 50이 되었을 때 읽었습니다만, 읽고 나서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큰 분노와 당혹감을 느꼈지요. 한국의 경제사상사, 한국의 정치사상사 또 한국의 실학사상에 관한 책들이 많이 있잖습니까? 대학원에 들어가서부터 그런 책들을 읽고 공부를 해왔고 또 늘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한국 정치사상사, 조선시대 정치사상사 말미에는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설명이 한 장은 들어가야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때까지 그 어느 누구도 그런 식으로 책을 쓴 적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읽고 너무나 당황했고 감격스럽고 해서, 이승만 대통령 하면 늘 독립정신, 그래서 저는 어딜 가나 독립정신을 이야기합니다. 책 이름으로 독립정신만이 아니고 기본적으로 우리가 나라를 만들고 발전시킬 기본 정신으로서 독립정신, 그 말이 생각납니다.
- 우리 5천년 한민족 역사에서 이승만 대통령만이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기여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자유와 독립, 그러니까 자유 이념과 가치에 입각한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는 것이지요. 그분이 없었다면 아마 어려웠을 겁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을 대신했을 다른 사람이 있었을까 생각하고 그 시대에 이승만 대통령과 경쟁관계에 있었던 정치가들을 떠올려 보면 여운형, 김규식, 김구, 장면, 신익희, 조병옥 같은 분들이 있지만, 사실 그들은 이런 나라를 세울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유이념에 입각한 새로운 나라를 세운, 1392년에 조선왕조가 유교이념 위에 입각해서 세워졌는데, 그 이후 554년 만에 전혀 새로운 이념에 입각한 새로운 나라가 건설되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고서는 그 일을 할 사람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고, 그 사건의 주인공은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애국 애족의 신념으로 사선을 넘었던 이승만
- 일부 사학자들은 1919년 4월 23일 상해 임시정부의 시작이 대한민국이 시작된 건국일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정부는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정하지도 않고 기념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건국일은 마땅히 국가 명절인 ‘건국절’로 제정하여 기념해야 되는데도 국가가 이를 시행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지요.
브라이언 마이어스 부산 동의대학 교수는 ‘한국은 그들의 창건일을 기념하지 않는 세계에서 유일한 공화국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북한도 중국도 다 자기들의 건국일을 기념하고 있는데 대한민국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건국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에 대한 이해가 없는데다가, 45년부터 48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초 정부가 49년에 사대(四大) 국경일을 제정할 때엔 독립기념일이라고 했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Korea Independence Day’입니다. 그 독립기념일이 국회에서 법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광복절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따라서 광복절의 원래 뜻은 광복조국, 광복독립을 줄인 말입니다. 그런데 목적어를 줄이다 보니까 영광스럽게 회복한다는 뜻만 남아서 광복절이 됐는데, 뭘 회복했는지를 모르는 이상한 성어(成語)가 되어버린 국경일이 된 거예요. 그래서 그것이 시간이 지나다 보니까 건국의 당사자들이 다 물러났고, 그리하여 우리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오해해 오게 되어 지금도 1945년 8월 15일을 광복절의 기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1950년대 초만 하더라도 48년 8월 15일을 광복절의 기점으로 삼았습니다. 49년은 제1회 광복절, 50년은 제2회 광복절이고 52년은 제3회 광복절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50년대 후반을 넘기면서부터 대통령이 노쇠하고 하니까 해방절의 의미로 바뀌어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미국은 해마다 광복절이 되면 축전을 보내면서 영어로 ‘Kwangbok-jul’이렇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Korea Independence Day’라고 해요. 그래서 원래 2015년은 ‘The 67th Anniversary of Korea Independence Day’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70주년 광복절이란 얘기를 하고 있단 말이지요. 이건 큰 모순이에요. 이걸 몇 번이나 지적해도 듣지도 않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할 일은 광복절의 주년을 올바로 잡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것은 올바른 성어(成語)가 아닙니다. 목적어가 빠진 말이 되어 가지고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게 되었어요. 그러니 그것을 건국절이나 독립절로 바꿔야 합니다. 이런 두 단계 개혁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 이 교수님은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잘못 교육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이 훼손되어 가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시고 계십니다만, 전공분야는 경제학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누리고 사는 자유와 번영, 풍요와 평화는 모두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공로라고 생각됩니다. 경제학자로서 이승만 대통령의 어떤 경제정책이 번영과 풍요의 초석이 되었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건 한마디로 말해서 자유시장경제 체제의 확립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초대 헌법을 읽어보면 자유시장경제가 아닙니다. 그 당시 나라를 만드는 과정이 대단히 급박한 상황에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1948년 3월이 되어서야 겨우 총선거 실시 방침이 정해지고, 6개월 만에 나라가 만들어지는데, 당시 이승만 박사가 모든 과정을 다 챙길 수 없어서 헌법은 유진오라는 공법학자가 초안을 잡고 한민당이 만들었는데, 그 결과 그때 만들어진 헌법에 나타난 경제체제는 당시 사람들의 말로는 민족사회주의, 요새 말로 하자면, 사회민주주의 경제체제입니다. 중요 산업과 자원은 국유, 국영 내지 공용으로 한다. 운수통신, 금융, 관광, 무역 모든 것을 공용으로 하고, 정부는 필요하다고 인정될 경우에는 사기업을 국유 내지 공유로 돌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한국인들의 인식 수준이 이런 것이었지요. 그렇게 해서 모두가 골고루 잘 사는 민족사회주의 국가를 만든다, 이청천 장군조차 헌법을 심사하면서 ‘우리의 목표는 민족사회주의입니다’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모든 과정을 이승만 박사가 컨트롤할 수 없어서 이후 헌법을 계속 고치게 돼요. 1954년 11월에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제2차 헌법개정이 있을 때 사회민주주의 조항을 폐지합니다. 중요 산업이나 자원이나 이것을 국유 내지 공유로 한다는 조항을 폐지합니다. 그리고 정부가 필요하면 사기업을 국유 내지 공유로 돌릴 수 있게 되어 있던 것도 못하도록 했어요. 그래서 경제체제가 사기업을 중심으로 한 자유경제체제로 바뀌었던 것이죠.
1954년 11월에 있었던 제2차 헌법 개정은 흔히 사사오입(四捨五入) 개정이라는 것만 알고 그런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그것이 헌법 개정의 실질 내용이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마침 사사오입이 없었으면 더 좋았을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그만 헌법 개정의 원래 취지는 알지도 못하고 있는데, 경제사학자인 제가 볼 때는 그 헌법 개정이야말로 이승만 대통령이 오래 전부터 준비를 해 왔고 또 어렵사리 해낸 자유시장경제 체제 확립을 위한 중대한 변혁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오늘날의 우리나라 경제체제가 형성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승만 하야는 후진적 정치구조의 산물
- 마지막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말년인 1960년 4·19 때 학생운동으로 186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을 당하는 불상사가 발생했습니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 총재로서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하야했습니다. 이에 대해 한 말씀해 주십시오.
한국 정치사에서 불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책임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당시 조선왕조, 유교사회를 오랫동안 겪어왔고, 일제시대에 일제의 지배도 받았고, 해방 이후 민족이 분단되는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제대로 운영할 정치적인 능력이 없었던 빈곤한 사회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대체할 리더십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기 집권의 비극이 일어났고, 장기 집권의 비극 과정에서 부통령을 주민이 직선하는 아주 모순적인 정치제도가 생겨났어요.
부통령을 주민이 직선하는 정치제도는 전 세계 어디에도, 옛날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는 그런 제도입니다. 아무 권한도 없는 부통령을 국민이 직선하는 이상한 정치제도가 생겨난 것이 50년대 한국 정치의 모순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 없고, 당시 야당도 함께 책임을 져야 할 한국 정치의 구조적 모순을 여야 간의 원만한 협상과 타협으로 개헌하지 못하고, 결국 60년에 들어와서 부통령 선거에서 일대 부정적인 사건을 빚어낸 것이죠.
자유당 집권 중심세력들이 부통령직만큼은 야당에 내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부정선거를 했는데, 그 당시 벌써 나이가 85세가 된 이승만 대통령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모든 진상을 다 알고 나서 너무나 경악했고, 그래서 부상당한 학생들을 찾아가서 그래도 불의를 보고 뛰쳐나온 학생들이 있으니 이 나라 장래가 밝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20대 청년 시절에 나라를 구하고자 불의에 맞서려고 애쓰다가 감옥 생활을 7년 동안 했지 않습니까? 그것을 떠올리면서 홀연히 권좌에서 물러난 거지요.
세상에 어느 독재자가 홀연히 권좌에서 물러납니까? 그래도 자기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는 경찰 병력도 있고, 또 당시 이승만 하야만큼은 국민의 뜻이 일치되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미국이 은밀히 고집불통인 노인을 제거할 기회를 노렸던 때도 있지만, 이때는 이승만 대통령이 종교인답게 깨끗하게 책임을 지고 물러났지요. 그 점을 평가해 줘야 합니다. 당시에 한국 정부의 객관적인 수준, 한계, 부통령 직선제라는 모순, 정치적 리더십의 빈곤, 미국의 역할, 이 모든 것이 한국 정치사에서 비극적인 사건을 불러왔고, 이승만 대통령은 그것을 책임지는 정치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사랑회 <이승만을 말한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브라이언 마이어스 교수가 재직 중인 대학은 동의대가 아니라 동서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