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軍, 누구에게 복종할 것인가
대한민국 軍, 누구에게 복종할 것인가
  • 이민수 서울과학기술대 교수(前 육군사관학교 교수)
  • 승인 2018.07.11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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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 군인과 역사, 그리고 헌법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는 말이 있다. 미북협상과 남북협상으로 급변하는 한반도 상황에서 군은 무엇에 복종해야 하는가. 군이 복종해야 할 것은 명령인가, 아니면 역사성인가?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성찰이 필요한 이 시기에 한선재단이 지난 6월 19일에 주최한 <군인과 역사, 그리고 헌법>이라는 주제의 세미나와 토론문을 요약 게재한다. (편집자 注)



역사의식이 요청되는 리더의 결단(선택)과 책임
군은 부당한 명령, 거부할 수 있어야

이민수  서울과학기술대 교수(前 육군사관학교 교수)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 1년이 지났고 그동안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흔히들 말하듯 보수정권에서 진보정권으로 바뀌면서 과거와는 다른 사회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고, 그 만큼 군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더욱이 남북회담과 북미회담의 잇단 개최로 평화적 통일의 기운마저 크게 감돌고 있다. 남북회담 이후 젊은이들 사이에 이제 군 복무 의무도 없어지는 게 아니냐는 우스개 얘기마저 돌고 있을 정도니 사회 변화가 군에 미치는 영향이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행여 우리 군의 기강마저 흐트러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없지 않다.

더욱이 새 정권 들어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의미가 확대되어 헌법전문 게재 주장까지 국회에서 논의되는 만큼, 군기가 초석인 군에서 명령에 대한 절대성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마저 든다. 5·18민주화운동의 의미가 확대되어 그것이 ‘진리’편에 선다면, 그 반대편에서 총부리를 겨누기까지 했던 군인들의 입장은 무엇이 될 것이며, 그럴 경우 명령권자의 권위와 신뢰마저도 흔들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5·18 사태는 민주화운동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인식이 새로울 것은 없지만 그 행위가 절대적 ‘진리’로서 ‘선’이 된다면 당시의 계엄군은 ‘악’이었다는 주장도 가능해지는 것이고, 그렇다면 당시 군은 명령권자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게 정의였다는 새로운 해석도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논리가 군을 위해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닐 것이다. 군은 정치권의 주장이나 해석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중립적인 것으로서 당당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이 군기의 초석인 명령에 대한 복종의 절대성이 보장되고 그 권위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헌팅턴이 주장했듯이, 군의 속성상 군은 그 위상에 있어서 정치권의 하위에 있음이 틀림없지만 정치권으로부터 독립하여 정치에 중립적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오직 국민과 국가에 충성하고 헌신하는 전문직업주의가 확립될 때 가장 바람직한 민군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명령에 대한 복종의 의무는 군인에게 절대 중요한 요소이며, 따라서 명령에 대하여 즉각적이고 능동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군인에게 최고의 선(善)이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명령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명령에 대한 복종의 절대성과 한계

복종의 덕목이 군인의 필수 요소임에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급자는 상급자의 모든 명령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명령이라고 해서 모두가 참다운 명령은 아니며, 따라서 무조건적인 복종이 최선이 아닌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복잡한 군대 업무의 수행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법적, 철학적 성찰이 요구되는 부분들이 생겨날 수 있는데, 그것은 명령에 대한 복종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의 한계가 있다는 사실 또한 수용하기 때문인 것이다.

정당한 명령은 국가 혹은 상관으로부터 내려지는 즉시 복종될 것이 요구된다. 정당한 명령에 대한 복종의 의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명령에 대한 복종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 경우에 복종의 의무를 부과하는 근거는 법적일 수밖에 없다. 법적인 강제력에 의해서 복종을 끌어내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닐지 모르나 정당한 명령들은 반드시 실행되어야 한다. 군은 상급자의 정당한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경우 강력한 처벌 규정을 두고 있다. 가령 군형법 제44조 및 제47조는 명령에 반항하는 경우 및 위반하는 경우에 대한 처벌 규정들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법적 강제력이 아닌 도덕적 의무의 관점에서도 국가나 상급자의 정당한 명령은 실행되어야 한다. 가브리엘은 이를 전문 직업인의 도덕적 의무라고 말한다. 정당한 명령에 대한 지체 없는 복종이 군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는 데 대해서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지만 정당하지 않은 명령에 대해서까지 복종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상관이 내린 명령에 복종할 경우 군사적 재난이 예상될 것을 믿고 있는 경우 부하는 그래도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가, 아니면 불복종해도 괜찮은가? 헌팅턴에 의하면 이 경우에는 복종해야 한다. 그 까닭은 불복종으로 인해 야기될 조직의 와해는 복종이 가져올 어떤 이득보다도 큰 손실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전, 특히 전투에서의 즉각적인 복종은 절대적이다. 무조건적인 복종은 부하들의 새로운 창조적 아이디어를 저해할 수 있다. 따라서 복종이 교리와 대립할 때는 불복종이 정당화될 수 있다. 단 불복종으로 말미암아 군사적 효율성을 현저하게 증진시킬 수 있을 때 한해서이다.

군인은 합법적인 명령에만 복종해야

군인은 합법적인 명령에만 복종할 의무가 있다. 정치인이든 상급 지휘관이든 그의 명령이 불법적인 것이 분명할 때, 군 장교의 불복종은 정당화된다. 상급자가 점령 지역 사람들의 대량학살이나 소멸을 명령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도덕성을 내세워 불복종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래도 복종해야 하는가? 참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이다. 헌팅턴은 “군인으로서는 복종해야 하고, 인간으로서는 복종해서는 안 되는” 경우이지만, 군인이 국가적 이익과 복종의 의무를 무시하고 도덕적 양심에만 따르는 것을 정당화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헌팅턴의 경우, 세 가지 경우만 불복종이 정당화된다. 불복종이 교리상 현저하게 군사적 효율성을 제고시킬 수 있을 때, 정치인이 군사적 전문 능력의 영역을 침범했을 때, 그리고 상급자가 불법 명령을 하달했을 때가 그 경우들이다.

케이저는 그의 저서 <군대 명령과 복종>에서 복종의 한계를 법 위반, 법들의 충돌 등으로 구분한 뒤 많은 판례를 통해 이를 기술하고 있다. 복종이 법 위반을 초래하는 경우는 ‘적법성 여부’가 문제 해결의 궁극적 기준이 되고, 법들의 충돌에서는 ‘군사적 필요성’과 ‘군사적 효율성’이 기준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서든 부하의 입장에서 상관의 명령이 ‘의심스러울’ 때는 불복종이 정당화되기가 어려운 까닭에 복종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케이저는 제언한다.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불복종 정당화의 공통점은 궁극적으로 명령 자체의 ‘명백한 위법성’과, 불복종으로 인하여 ‘군사적 혹은 직무상 효율성’의 기대가 확실할 때뿐이다.

그러나 실제에서는 군사적 효율성의 제고라는 기준은 물론이요, 불법 명령이라 할지라도 군인에게서 불복종을 기대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대다수의 군인들은 상급자가 어떤 명령을 내리건 우선 복종하고자 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군인으로서의 도리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군인의 길에서 복종은 절대성을 지닌다. 즉각적인 복종은 군기의 기본이고, 군 전투력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종으로 인해 빚어진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 문제에 있어서 절대적인 복종이 하급자의 행위에 대한 변호가 될 수 없는 한, 복종은 한계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말 군인에게 복종의 한계가 있을 수 있는가? 물론 헌팅턴과 케이저의 결론에 따르면 적어도 두 가지, 불법적 명령과, 군사상의 현저한 이익의 경우, 불복종은 정당화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하급자들에게는 명령에 대한 복종의 절대성으로 말미암아 불복종이 결코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직책과 계급이 주는 상급자의 권위는 물론이요, 정보 부족, 무지, 오해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 복종의 의무 등으로 갈등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수명(受命)이냐 불복이냐의 갈등 속에서 하급자의 고민을 해결해줄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상급자가 그와 같은 명령을 내리지 않는 일이다. 상급자의 관점에서 판단 가능한 불법적, 비도덕적 명령이라면 수행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하급자를 비극적 딜레마에 빠뜨리지 않게 하는 최고의 길이다.

하지만 역사상의 많은 사례에서 보듯이 그처럼 사려 깊고 상황 인식이 뛰어난 리더를 상급자로 둘 확률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결국 명령을 하달 받은 하급자의 선택과 결단이 있을 뿐이다.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하급자의 올바른 선택을 위한 하나의 길을 필자는 역사적 통찰력이라는 덕목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적 통찰력이란 무엇인가?

복종의 한계로서 딜레마 극복의 길 - 역사적 통찰력

역사적 통찰력(Historical Insight)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 첫째는 판단력의 관점이다. 판단이란 주어진 의무들 가운데서 먼저 수행해야 할 의무들을 올바르게 찾아내는 능력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위와 행위의 결과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판단은 올바르게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인 것이다. 역사적 통찰력이 하나의 판단이라는 관점은 바로 올바르게 선택할 수 있는 기준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두 번째 관점은 도덕성이다. 아무리 전시라 할지라도 군의 지휘에서 도덕적 평가를 위한 여지는 있어야 한다. 전쟁이 하나의 사회적 창조 활동인 이상 도덕적 평가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시 행동이라 할지라도 도덕적 평가를 받아야 한다. 어떤 행위도 도덕적 평가를 떠나서는 정당화될 수가 없는 것이다. 전쟁법과 전쟁 규칙이 존재하는 이유다.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관점은 역사에 대한 인식(knowledge of history), 즉 역사 의식이다. 가령, 아름다운 예술의 도시 파리를 불태워버리라고 명령을 받은 한 장교가 있다고 상상해 보자. 또 무고한 시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라고 명령을 받은 한 장교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전시에 이 같은 명령을 받은 장교는 참으로 힘들고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의 결정과 행동은 훗날 역사가들에 의해서 어떤 식으로든 평가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결정과 행동이 훗날의 역사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파리를 불태워버리라는 명령을 받은 장교가 명령의 비도덕성에도 불구하고 명령을 수행했다면 오늘날 프랑스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만약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투하하라는 명령을 받은 장교가 그 명령의 비도덕성을 근거로 이를 수행하지 않았다면 세계사는 어떻게 바뀌었을 것인가?

이 같은 명령들은 가정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다. 파리를 불태우라는 명령은 준수되지 않았지만,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는 이뤄졌다. 그 같은 명령을 받은 그 장교들은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은 결정에 도달했을까? 파리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은 장교는 왜 그 명령을 거부했을까? 그가 신봉하는 도덕관 때문이었는가? 그렇다면 히로시마를 폭격해 무고한 시민의 무수한 희생을 가져온 명령을 그 파일럿은 왜 거부하지 않았을까? 명령에 대한 복종의 중요성 때문이었는가?

명령에 대한 복종의 중요성은 군인에게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동시에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의 금지에 대한 강조도 군인에게는 절대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가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전쟁의 현실 속에서 그와 같은 명령을 받은 군인들에게 선택에 대한 부담감을 덜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꿔 말하면 어떤 쪽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는 딜레마 속에서 궁극적인 하나의 선택을 정당화시키는 원리나 기준이 있다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 즉 역사 의식이다. 좀 더 완전하게 표현한다면 역사적 인식에 입각한 도덕적 판단이다. 이 판단에 의거한 선택이야말로 그와 같은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 통찰력이다.

이처럼 역사적 통찰력은 판단력, 도덕적 관점, 역사 의식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는데 이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겠다.

“역사적 통찰력은 역사적 인식에 기반한 도덕적 판단 혹은 도덕적 판단을 통한 역사 의식이다.”

따라서 역사적 통찰력을 지닌 군인이라면 판단력과 도덕성 그리고 역사에 대한 이해를 모두 구비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격을 지닌 사람들은 비록 옳은 일을 선택함으로써 개인적으로 혹독한 고통을 겪게 된다 할지라도 도덕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한다.

웨이킨의 이 말은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격자들이라면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과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도덕적으로 올바른 길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태도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보통 사람들은 물론이요, 야만적인 명령에 대한 복종과 불복종 간의 선택 문제로 곤경에 빠진 군인들에게도 적용된다. 도덕적 인격을 갖춘 군인이라면 곤경에서도 옳은 쪽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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