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멘 내전,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예멘 내전,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 고성혁 미래한국 객원기자
  • 승인 2018.07.10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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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을 표방하는 제주도는 무비자 입국 지역이다.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서다. 2001년 제정된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에 근거하고 있다. 중국 관광객 유치에는 성공했지만 국제 에티켓을 모르는 중국 관광객으로 인해 문제가 야기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멘 난민이 이슈로 떠올랐다.

예멘은 3년째 내전 중이다. 내전을 피해 말레이시아를 거쳐 549명의 ‘예멘 난민’이 제주도에 들어왔다. 현재 제주도에 체류 중인 예멘 난민은 486명이다. 이들은 제주도를 벗어날 수 없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제주도에 체류돼 있는 예멘 난민들의 출도 제한을 해제해 줄 것을 청와대와 정부에 건의할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인터넷상에서는 난민신청 허가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크다. 청와대 게시판에도 ‘난민신청허가 폐지.개헌 청원합니다’란 청원이 올라왔다. 21일 오전 9시 현재 무려 32만여 명이 난민신청허가 폐지에 동참했다.

남북 예멘의 분단 과정

여론 형성력이 큰 중고자동차 커뮤니티 ‘보배드림’에도 비슷한 게시물이 게시되어 ‘베스트’에 올랐다. 30일 광화문에서 ‘예멘 난민 수용반대 집회 개최’를 알리는 글에는 참가 댓글이 900개가 넘게 달리기도 했다. 이제 예맨 내전은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 되었다.

예멘의 분단은 1911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스만투르크 지배 하에 있던 아라비아에 영국이 진출하면서부터다. 영국은 인도양 해상권의 요충지인 남부 예멘 아덴을 장악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패하면서 그 지배하에 있던 북예멘은 토호 세력이었던 이맘 왕정국가 세력권으로 편입되었다. 1962년 이집트 나세르의 아랍민족주의 혁명에 영향을 받은 군부 쿠데타로 이맘 왕정국가 북예멘은 ‘예멘 아랍공화국’으로 재탄생했다. 이집트는 군사적으로 북예멘을 적극 지원했다. 왕정국가인 사우디는 북예멘과 대립각을 세웠다. 혁명(쿠데타)이 왕정인 사우디로 전파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한편 남예멘은 2차 세계대전 후에도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소련 공산주의 영향을 받은 급진적인 인민사회주의당(People’s Socialist Party)과 아덴 노동조합의회(Aden Trades Union Congress) 등은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발하여 치열한 도시 게릴라전을 펼쳐나갔다. 결국 영국은 남예멘을 포기했다. 1967년 2월 남예멘 아덴을 중심으로 공산주의에 기반을 둔 ‘예멘 인민민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지도상에서 보면 남예멘과 북예멘은 동서로 나뉘어 있다. 그런데 남북 예멘으로 불리는 것은 양측의 수도위치 때문이다. 북예멘은 북부 사나를 중심으로, 남예멘은 남부 아덴을 중심으로 세력 기반을 형성했다. 예멘의 분단에는 이념적 문제와는 별도로 지역적, 종교적, 정치적 갈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다. 최근에는 알 카에다까지 가담하면서 혼돈(chaos) 그 자체가 되었다.

이질적 체제, 준비되지 않은 남북연방의 비극

남·북 예멘간의 통일과정이 본격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은 1988년에 북예멘 대통령 살레와 남예멘의 사회당 사무총장 바이드(Bidh) 간의 두 차례에 걸친 정상회담이 출발점이었다. 남북 예멘의 통일은 동서독 통일보다 앞선 1990년 5월 22일에 선포되었다. 독일 통일이 서독의 실질적인 흡수통일이었다면 예멘의 통일은 양측 지도자간의 통일원칙 합의에 불과했다.

결국 예멘의 통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통일 합의’라는 방법 자체가 문제였다. 통일에 대한 공감대만 있었을 뿐, 구체적인 통일 방안이 없었다. 양측 지도자간의 밀실 야합으로 통일에 합의하고 발표한 것이 문제였다. 그들은 통일 후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면 자연스레 통합이 이뤄지리라 낙관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가장 큰 문제는 서로 적대적이었던 남북의 양측 군대가 통합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남북간 경제력과 군사력의 차이도 발목을 잡았다. 북예멘보다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열세였던 사회주의 체제였던 남예멘의 불만은 커져갔다.

결국 1994년에 접어들면서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같은 해 4월 27일 수도 사나 북쪽 60㎞의 지방소도시 암란(Amran)에서 남북군 간에 대규모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북예멘의 제1기갑여단과 남예멘의 제3기갑여단이 정면으로 맞붙었다. 북예멘은 병력 3만 7000명에 660여 대의 전차를 보유했고 남예멘은 2만 7000명과 480여 대의 전차를 보유했다.

수치상으로는 북예멘이 근소하게 우세했다. 그러나 군대의 질과 사기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무슬림들은 ‘지하드(성전)’이라며 북예멘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공산사회주의를 믿는 남예멘의 응징에 나섰다. 무력 충돌은 1994년 4월 27일부터 7월 27일까지 약 석 달간 이어졌다. 양측 간 무력 충돌은 북예멘의 승리로 끝났다.

합의에 의한 서류상 통일은 결과적으로는 북예멘의 무력통일로 종지부를 찍었다. 승리한 북예멘의 살레 대통령은 정적(政敵)인 남예멘의 사회주의 정당과 정치인들을 일거에 제거했다. 살레 대통령은 2012년 축출될 때까지 장기독재를 했다.

예멘 살레 대통령은 통일을 이뤘지만 예멘에는 또 다른 세력이 자라나고 있었다. 후티반군세력이다. 후티(Houthi)는 1994년 남북 예멘군 사이의 내전 당시, 예멘의 시아파 지도자였던 후세인 바르레딘 알 후티(Hussein Badreddin al-Houthi, 1956~2004)가 만든 단체다. 사우디의 지원을 받는 수니파가 남예멘의 분리운동을 지원하자 시아파인 알 후티는 위기를 느꼈다. 같은 이슬람이지만 수니파와 시아파는 극과 극이다. 결국 2004년 6월 알 후티가 수니파 예멘 정부에 대해 무장투쟁을 선언했다. 알 후티는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같은 해 9월 예멘 정부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이로써 정치적 대립에서 종교 분쟁으로까지 확대되었다.

2010년 튀니지에서 일어난 이슬람 민주화운동인 ‘자스민 혁명’은 2011년 예멘에도 불어 닥쳤다. 민주화 시위로 독재자 살레는 축출되었다. 그러나 축출된 살레는 시아파 후티반군세력과 손을 잡고 수니파인 예멘의 만수르 하디 대통령에 대항했다. 이로써 후티반군세력은 예멘 내전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세력이 커진 시아파 후티반군세력은 2014년 9월 (북)예멘의 수도 사나를 완전 장악했다. 만수르 하디 예멘 대통령에게 권력 분점을 요구하면서 하디 대통령을 사저에 감금했다. 사실상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자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가 나섰다. 예멘 정부군을 지원하면서 예멘 내전은 시아파 후티반군과 수니파 사우디의 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후티반군세력과 연대하던 살레 전 대통령은 후티반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시아파 후티반군세력은 수니파의 종주국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 인근까지 미사일을 발사했다. 사우디는 후티반군이 발사한 미사일은 시아파 종주국 이란이 배후에서 지원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최근 6월 13일 예멘 정부군을 지원하는 사우디 연합군은 후티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호데이다市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다. 사우디 연합군은 하루 만에 14일(현지시간) 호데이다市 남쪽 20km 지점에 있는 나킬라 마을을 탈환했다. 결국 예멘 내전은 중동의 양대 강자인 사우디(수니파) vs 이란(시아파)의 대결로 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예멘의 통일은 정치적 서류상 통일이었다. 가장 중요한 남북 군대 차원에서는 통합을 전혀 이루지 못했다. 그 결과 내전으로 번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반면 서독은 통일 과정에서 동독군을 완전히 통합했다. 통일 전, 서독군은 49만 5000명, 동독군은 10만 3000명이었다.

통일 독일의 군사적 통합이 주는 교훈

독일은 통일 과정에서 구 동독군을 완전히 해산시켰다. 동독군을 해산한 뒤 약 10%인 1만 1000명만 독일연방군에 편입시켰다. 편입 작업에는 원칙이 있었다.  ▶55세 이상과 대령과 동독 장군은 편입 대상에서 완전 배제되었다. ▶슈타지(동독의 정보기관)에 협력한 사실이 있거나 사상교육을 담당했던 장교도 제외됐다. ▶여군은 기본적으로 제외되지만 의료(간호) 병과 여군은 선별적 편입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동독군의 불만을 어떻게 잠재울 수 있었느냐 하는 부분이다. 편입에서 제외된 동독군에 대해서는 재정지원과 직업교육을 실시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토대를 지원했다. 2016년 12월 동독의 마지막 국방 장관이었던 라이너 에펠만(Rainer Eppelmann·73)이 방한해 국방일보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동독군 통합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크게 3가지였다. 첫째는 연방군 편입을 희망할 경우 통합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둘째 연방군 편입을 원하지 않을 경우 재정지원과 직업교육으로 실업과 빈곤을 겪지 않고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마지막으로 연방군이 어떤 곳인지 미리 체험할 수 있는 교육 기회를 부여했다. 이 사안은 수백 명의 장교들이 동의하기도 했다.”

동독군 통합 과정이 궁극적으로는 동독군 개개인이 또 다른 미래에 희망을 갖고 통합에 동참했기 때문에 큰 문제없이 이뤄졌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남북연합의 핵심은 한국군 붕괴에 있다

우리의 경우, 북한 흡수통일을 주로 이야기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남북연방제 통일을 우려하는 상황이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작년 7월 6일 이른바 ‘베를린 구상’을 통해 북한에 대한 흡수·인위적 통일을 배제한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분단의 고착’ 아니면 연방제 통일이 남는다. 만약 2020년 문재인 정부가 총선에서 개헌선인 3분의 2까지 확보한다면 급격한 연방제 통일 개헌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남북 예멘 지도자끼리의 통일 합의는 결국 무력 충돌로 귀결되었다. 현재 예멘 난민의 비극은 군대의 통합 없는 통일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동독군의 규모는 서독군에 비해 5분의 1에 불과했다. 규모면에서도 흡수가 가능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남북한군은 합쳐서 170만이 넘는다. 동·서독군의 통합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극단적으로 다른 사회 시스템을 가진 양 체제의 대등한 통합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무력통일 아니면 독일과 같은 흡수통일이다. 무력이 되든 흡수가 되든 통일은 어느 일방이 다른 쪽을 귀속되는 것이다. 정치적 통일을 이룬다 하더라도 사회적 통합은 더더욱 어렵다. 내전을 치르고 있는 예멘뿐만 아니라 독일조차 사회적 통합을 이루기까지는 오랜 기간이 걸렸다. 사회적 통합은 역사적 문화적 동질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미국조차 남북전쟁을 치른 후 1차, 2차 세계대전을 거쳐 비로소 역사적 문화적 동질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동안 보수 정권 하에서는 북한의 급속한 붕괴를 우려했다. 북한 붕괴 시 북한 주민을 어떻게 흡수할지를 고민해 왔다. 좌파세력은 독일식 흡수통일은 많은 통일비용을 발생시킨다면서 북한의 흡수통일을 반대했다. 사실 독일의 통일비용은 서독의 복지정책을 동독 주민들에게 그대로 적용하면서 발생했다. 이것은 서독 주민들에게 불만을 야기했고 동독주민은 일하지 않고 복지만을 누리려는 폐단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정반대의 상황으로 변했다. 남북연방제에 의한 통일 문제가 전면에 부각되었다. 낮은 단계의 연방제든 높은 단계의 연방제든 일시에 남북한 군 통합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만약 어느 한쪽이 일방적 군대해산을 강요한다면 예멘 같은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무장된 북한군의 강제해산은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는 어떻게 될까?

군대의 통합 없이 남북연방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북한이 노리는 남북연방의 핵심은 어디에 있을까? 남북 군대의 통합이 아니라 대한민국 군의 와해다. 한미동맹 해체와 한미연합군 지휘체계의 붕괴는 사실상 대한민국 군의 와해를 의미한다. 이미 문재인 정부는 한미 연합훈련을 중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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