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회사 영업소에서 생긴 일
며칠 전 강남역 근처에 자리한 어느 보험회사의 영업소에 들렀을 때의 사건이다. 70대 초중반으로 짐작되는 남자 노인 한 명이 휴대전화기에 대고서 마구 고함을 치고 있었다. 나이가 많이 먹은 탓으로 말미암아 듣는 귀가 어두워진 까닭에 불가피하게 큰소리로 통화할 수는 있다. 내가 목격한 노인은 그가 바라는 방향으로 일처리가 진행되지 않은 것이 매우 못마땅했는지 전화기 너머의 상대방에게 인정사정없이 연신 분노를 폭발시키고 있었다.
노인의 화풀이는 그칠 줄을 몰랐다. 실제로 보험금 청구와 관련해 치가 떨리지 않을 가입자가 대한민국에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때마침 영업지점 한쪽에는 작은 유리방이 설치돼 있었다. 뿔이 단단히 난 상태에서 전화하는 고객들을 다독이기 위한 회사 측의 고도의 영업전략의 일환이었는지도 모른다.
노인의 언성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고, 창구에서 번호표를 뽑아들고 오랫동안 대기 중인 다른 고객들도 서서히 술렁대기 시작했다. 영업소 직원이 나머지 손님들도 제각기 일 때문에 여기에 왔다는 것을 생각해 유리방 안에서 통화해달라고 정중히 요청하자 노인은 몹시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며 이렇게 대꾸했다.
“내 일이 먼저야!”
“내가 먼저!”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온 말이다. 내 조카들이 어릴 적에 삼촌 컴퓨터로 오락할 순서를 다투면서 이구동성으로 내뱉은 얘기였던 이유에서다. 이건 단지 내 조카들만의 경우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양보심이나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알 리도, 배웠을 턱도 없는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의 공통된 슬로건이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도로 아이가 된다는 옛 속담은 그저 가볍게 웃고 넘어갈 수 있는 농담만은 더 이상 아니게 되었다. 왜냐? 어린이는 사회생활을 하지 않지만, ‘인생 백세시대’가 수시로 인구에 회자되는 지금은 노인도 사회생활을 하는 사례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가족들에게만 밉상일 아이의 유치찬란한 행동과 달리 노인의 나잇값 못하는 볼썽사나운 일거수일투족이 사회적으로 진상 취급을 받는 중요한 이유다.
노인의 얼굴은 보수의 얼굴
“노인은 보수, 청년은 진보” 한국인의 일반적 정치의식을 좌우하는 것으로 알려진 통상적이고 전통적인 구도, 즉 즉 프레임(Frame)이다. 노인층이 좌파 정당을 지지하고, 청년세대가 우파 정당에 호의적인 유럽 제국(諸國)들과는 다르게 한국과 미국은 보수 정당이 노인 친화적이고, 민주당 계열의 진보 정당이 젊은 세대와 코드가 일치하는 노선과 정책을 취해왔다. 한국 역시 장기적으로는 미국형에서 유럽형으로의 점차적 전이가 예상되지만, 이러한 분석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닌 터라 여기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으련다.
확실한 부분은 청년의 얼굴이 진보의 얼굴이듯이, 노인의 얼굴이 보수의 얼굴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하나하나가 보수의 얼굴인 노인들, 특히 상대적으로 신체건강하고 원기왕성한 젊은(?) 남성 노인들의 모습은 너그럽고 인자하며 포용력 있는 원숙한 인간미의 모범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 솔직히 상당히 먼 정도가 아니라 아주 멀다.
지하철에서 다른 승객들의 존재는 아랑곳없이 거칠게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매너 없는 탑승자의 주류는 실상 중년 아줌마들이 아닌 젊은 남성 노인들이다. 젊은 여성들을 상대로 쓸데없는 참견을 하면서 장광설을 늘어놓는 주인공들도 예외 없이 남성 노인들이다. 대중음식점을 비롯한 다중이용시설들에서 주변의 시선과 불편함은 개의치 않은 채, 남이야 듣든 말든 상관없이 목청을 높이며 ‘언플러그드 아날로그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인물들도 젊은 남성 노인 일색이다.
이들이 요즘 세상에 대해 품은 크고 뿌리 깊은 불만은 대략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사회가 너무 시끄럽다는 거고, 둘째는 질서가 너무나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치명적 역설은 시끄럽고 무질서한 현재의 한국 사회를 조용하고 질서 있는 공동체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들이야말로 단연 시끄럽고 무질서한 사회 구성원이라는 데 있다. 이를테면 기초질서 중의 기초질서라 일컬을 쓰레기 무단투기와 도로 무단횡단만 관찰해도 적지 않은 노인들이 길거리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횡단보도도 없는데 아무 곳에서나 길을 건넌다.
노인들이 국가와 정부를 향해 정말 진지하게 요구해야만 할 내용은 “길거리의 쓰레기통을 늘려달라”거나, 또는 “도로에 횡단보도를 더 많이 만들어 달라”는 것이어야 하건만 적지 않은 이들은 태극기를 들면서 시끄럽고 무질서한 ‘종북좌빨’ 무리를 저주하고 공격할 뿐이다. 대한민국에서 그나마 휴지통에 쓰레기 제대로 버리고, 교통질서 성실히 준수하는 집단이 노인들이 종북좌빨이라 욕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아예 염두에조차 두지 않는 인상이다.
우리 사회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구속 사태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승리 및 취임을 거치며 보수가 우세한 기울어진 운동장으로부터, 진보가 지배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급변했다는 지적과 담론이 무성하다. 논란이 있긴 하지만 이는 텔레비전과 신문과 인터넷에서의 표면적 지각 변동에 불과할 따름이다. 심층적 일상에서는 보수가 여전히 대세라고 본다.
경기장 구조에는 변함이 없다(?)
진보는 실제보다 왜 힘세고 커 보일까? 문재인 대통령, 영화배우 송강호, 개그맨 김제동, 걸그룹 출신 이효리 등의 극소수 유명 인사들이 진보이거나 혹은 진보로 간주되는 데서 이러한 착시현상은 비롯된다고 보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보수는 어째서 실제보다야 왜소하고 허약하게 비치는가? 우리가 대중교통에서 마주치는, 백화점과 대형마트에서 대면하는, 사무실에서 함께 근무하는 대부분의 이름 없는 평범한 민초들은 아직도 근본적으로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인민은 투표일 하루만 노예의 신분을 벗어나 자유인이 된다고 개탄했다. 21세기 한국인은 선거일 하루 동안만 보수적 굴레를 탈피해 진보로의 용감한 외출을 감행하고서는, 다음날부터는 보수적 모습으로 다시 얌전히 돌아간다.
진보의 표준적 이미지는 문재인 대통령인 듯 싶다. 반면에 보수의 표준값은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도, 같은 당의 원내대표인 김성태 의원도, 신보수를 지향하는 듯싶은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도, 개혁보수를 표방하는 유승민 바른미래당 공동대표도 아니다. 내가 보험회사 영업소에서 체감한 “오로지 나만 먼저”인 이기적 노인이 대한민국 보수의 표준적 자화상이 아닐까.
진보의 문제는 진보진영 대표선수들이 저지르는 ‘내로남불’이 거의 언제나 원인을 제공해왔다. 보수의 문제는 보수세력을 지지하고 추종하는 평범한 일반인들의 거칠고 품격 없는 행동거지가 그 사단 구실을 해온 것이 아닐까.
보수는 블록체인?
블록체인 기술의 최대 특장은 해킹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차별성에 있다. 기존의 중앙집중형 네트워크를 공략하기 위해선 서버 한 대만 해킹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렇지만 블록체인으로 연결된 분산형 네트워크를 해킹하려면 시스템에 접속된 컴퓨터 모두를 뚫어야만 한다.
진보의 변화와 혁신은 몇몇 간판 선수들의 대오각성과 자기희생이면 족하다. 반대로, 보수의 재기와 명예회복을 이루려면 수백만 보수 유권자들 전체가 일일이 스스로의 이념과 문화와 습속을 쇄신하고 업그레이드해야만 한다. 한마디로 진보의 위기의 본질이 배부른 지도자의 무능과 도덕적 해이에 있어왔다면, 보수의 위기의 고갱이는 시대착오적 지지층의 무책임과 이기심에 기인하는 셈이다.
따라서 한국의 보수가 작금에 직면해 있는 엄중하고 총체적인 죽음의 위기는 홍준표만 변한다고, 자유한국당만 바뀐다고 극복되고 해결되지 않는다. 미운 7살짜리 아이인 양 “내가 먼저”라 아우성치는 70살 노인들 전부의 생각과 의식이 개변되어야 보수가 살아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보수의 성공적 부활은 자기 자신을 보수라고 믿어온 수많은 노인들이 나잇값을 할 때만 가능한, 대단히 지난한 과제가 되고 말았다. 나잇값의 양 날개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 약자에 대한 공감과 연대다. 두 가지 덕목 모두가 한국의 노인세대에게는 엄청나게 생소한 개념이자 이제껏 경험해오지 못한 신세계이다.
이 글은 노인을 폄하하는 취지로 읽힐 가능성이 물론 크다. 그러나 이것은 제발 나잇값 해달라는 간곡한 호소다. 노인 세대를 겨냥한 비판을 모욕적인 조롱과 막말로 인식하는 편견과 선입관이 노인 폄하라는 유아적 발상임을 더 늦기 전에 깨달아주시기를 진심으로 부탁드리는 바이다.
공희준 델리크라시(www.delicracy.com) 수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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