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의 계절-조선일보 양상훈 칼럼 파문을 보고
배신의 계절-조선일보 양상훈 칼럼 파문을 보고
  • 박한명 언론인·미디어비평가
  • 승인 2018.06.10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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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운명을 가를 결정적 시기, 조선일보는 역사의 배반자가 되고 싶은가
박한명 언론인·미디어비평가
박한명 언론인·미디어비평가

조선일보는 우익의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언론이지만 결정적인 시기에 우익의 뒤통수를 친 역사가 있다. 요새 거의 모든 방송과 신문, 인터넷 매체들이 문비어천가, 땡문뉴스를 생산하는 제정신으로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다보니 거의 홀로 고군분투하다시피 하지만 지난 대통령 탄핵정국에서만 하더라도 소위 보수궤멸에 앞장서서 문재인 정권 탄생을 예비한 것이 조선일보였다. 터무니없는 루머와 낭설을 사실처럼 포장해 우익이 세운 대통령을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과정에서 조선일보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 후 벌어진 절독운동으로 혼쭐이 나고서야 독자들을 무시한 대가가 무엇인지 조금 알 게 됐을 터이나, 최근 양상훈 주필의 황당하기 짝이 없는 칼럼은 분명 과거의 추억을 불러들이는 불길한 조짐이다. 배신과 기회주의에서나 맛볼 수 있는 비릿한 맛이랄까.

역사를 배신하는 맹독같은 칼럼

결론부터 말하면 양 주필의 ‘역사에 한국민은 전략적 바보로 기록될까’ 칼럼은 황당하다 못해 작금의 시국에 굉장한 악영향을 주는 글이다. 조선일보 주필이 미칠 대외적 영향력이 작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런 글이 북한 비핵화를 이루고 북한 주민의 처참한 인권 문제를 해결해야 할 역사적 책무가 있는 대한민국 우익의 의지를 꺾는 것이기 때문이다. 양 주필 칼럼은 요컨대 한반도 운명을 북한의 선의에 맡기자는 것으로 읽힌다. 북한이 설령 핵을 다 없애지 않고 몇 개 숨겨둔들 CVID 과정에서 국제자본이 들어가게 되면 개혁개방이 이뤄지고, 또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북 체제가 무너질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큰 줄기에서 역사의 방향은 자유와 인권의 편이니 결국 그리되지 않겠느냐는 기대다. 북한 봉건독재 체제의 선의에 기대고 역사의 선의에 기대는 이런 글은 얼마나 나약하고 허망한가. 그런데 변화와 발전을 이뤄내려는 인간의 의지 없이 역사가 순전히 선의를 보인 사례가 있나.

북한 핵공갈에 “일 리 있다”는 명분을 주고, 한반도 운명의 주인이 돼야 할 대한민국 국민의 독립된 의지를 완전히 뭉개고, 동맹인 미국과 일본에 극한 좌절감을 줄 수도 있는 맹독 같은 글에 “양상훈 주필을 파면하라”는 강효상 의원의 비판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그런 강 의원에 “친정 언론사의 논조를 트집 잡아 사장에게 주필의 파면을 요구하는 것은 권력의 횡포이자 중대한 언론자유 침해”라고 거품을 무는 일부 언론의 태도야말로 천지분간 못하는 쉬운 비난 아닌가. 자신이 몸담았던 언론사 선배를 직접 비판하면서 감당해야 할 세상의 시선과, 언론탄압 정권과 싸우는 당사자로서 또 다른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그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김정은의 항복문서를 받아내는데 털끝만한 힘이라도 보태야할 우익의 대표적 언론사가, 대표적 언론인이, 김정은에 항복문서를 갖다 바치자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글을 미북회담 직전에 써대는 위험천만한 시도를 막는 일에는 이만큼 용기가 필요하다.

조선일보가 조선일보다우려면

안 그래도 자신과 당에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아 보이는 언론사를 향해 선거를 앞둔 시기에 당 대표인 홍준표 대표가 나서서 조선일보와 주필을 비판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최근 한국당 의원들이 “북한의 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폐기, PVID를 북한에 강력하게 요구하고 합의해야 한다”는 성명을 주한미국대사관에 전달한 것도 마찬가지다. 한반도 전체가 평화라는 주술에 걸린 시점에 한국당이 무슨 큰 이득을 보겠다고 욕을 먹어가며 그러한 일을 했겠나. 강효상 의원 생각대로 북한에 대한 보도 논조가 왜 그따위로 삐딱하냐고 조선일보를 콕 찍어 비난한 청와대 대변인의 압박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면 다른 곳도 아닌 조선일보 양상훈 주필이 그런 허무맹랑한 글을 쓰기 어렵다는 게 상식적 판단일 것이다. 자두나무 아래에선 갓끈을 고쳐 매지 말라는 류의 옛말을 자주 인용해 국민을 가르치고 훈계하던 게 조선일보 아니었던가.

우익의 기대에 못 미치는 자유한국당과 홍준표 대표가 욕을 많이 먹고 있지만 조선일보의 위험한 기회주의와 비겁함을 비판한 것만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잘한 것이다. 결정적 시기에 우익의 뒤통수를 쳤던 조선일보의 고약한 짓을 방치했다가 벌어진 온갖 재앙들을 작금에 우리가 체험하고 있지 않은가. 한반도 뿐 아니라 세계를 통틀어 결정적 시기에 접어든 우익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북한과 역사의 선의에만 기대라는 건 너무나 낭만적이고 위험한 생각이다. ‘전투에서는 져도 전쟁에서는 이기는’ 행운은 자기 운명을 개척하려는 의지를 포기한 국민에게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민과 북한 주민을 배신하는 어리석은 글로 혹세무민한 조선일보야말로 국민과 한국당에게 사과해야 한다. “분명한 건 한반도 냉전구도 해체와 평화정착 쪽으로 역사의 수레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제 조선일보도 이런 변화의 흐름을 진지하게 바라봐야 할 때가 아닐까” 따위의 기름진 말로 역사의 정의와 불화를 조장하는 뱀과 같은 유혹은 뿌리쳐야 한다. 조선일보가 조선일보다우려면 그래야 한다.

박한명 언론인·미디어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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