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우리 헌법 제1조 1항의 선언(주권재민의 원칙)이다. 헌법의 이 조항은 만장일치를 전제로 한다.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보수나 진보, 좌파나 우파는 없다.
만일 누군가 개헌에서 이 주권재민 조항을 삭제하자거나, 원칙을 변경하자고 한다면 그는 국민들로부터 거센 저항에 직면할 것임은 틀림없다. 그러면 도대체 이 주권이 국민에게 부여된 때는 언제일까.
이 질문이 바로 대한민국 건국의 시점을 묻는 질문이 된다. 대답은 둘로 갈린다. 하나의 주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이고 다른 하나의 주장은 국민주권으로 정부가 수립되고 국제사회가 인정한 1948년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1919년이 대한민국 건국절이라고 선언했지만, 그것은 역사학계에서 주장할 수 있는 해석에 불과할 뿐, 대한민국 통치권자가 할 소리는 아니다.
대한민국은 주권재민의 원리로 대한민국의 독립된 주권이 국내외에 선포되고 국제사회, 특히 유엔이 승인한 1948년이 건국절이 되는 것이 보편성과 정당성을 갖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2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이스라엘 역시 독립 건국의 시기를 1948년으로 선포하고 있다.
이렇듯 명백한 문제가 정쟁이 되고 국민들 사이에 논란이 되는 이유는 우리 진보 정치권과 좌파성향을 가진 시민단체, 사회운동단체, 그리고 역사학계가 헌정(憲政)과 법치(法治)와는 동떨어진 구시대적인 민족주의 사관에 경도되어 있고 여기에 시대착오적인 반미·반일 감정의 골이 여전히 깊어 그 관성의 힘이 무비판적인 추동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구시대적인 민족주의 역사·정치 이념으로는 주권재민의 민주제와 공화주의 법치를 내재적으로 구현하기 어렵게 된다.
하나만 예를 들어 생각해 봐도 그렇다. 만일 우리가 1919년을 대한민국 건국으로 선포한다면 그때 이미 대한민국 주권이 성립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주권은 누구에게 있었다는 것인가?
1919년에 일제 강점이 없었다면 대한제국 황제의 주권을 1919년의 주권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적어도 1919년에 대한민국이 프랑스 혁명처럼 군주제를 타도하고 지금의 헌법이 선포하는 것처럼 시민정부가 구성되어 국민주권과 민주공화제의 상태였다면 1948년은 ‘해방’에 그치고 1919년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사해(四海)에 선포된 주체년(年)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상해 임시정부는 그 명칭이 ‘망명정부’였어야 한다. 하지만 임시정부의 임시(臨時)가 말해 주듯, 상해임정은 주권자인 대한민국 국민의 주권적 승인을 기다려야 했다. 그 승인이 이뤄진 해가 1948년이라는 이야기다.
이 문제에 관련해 진보 진영에서는 우리 헌법이 ‘임시정부의 법통 승계’를 선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1919년을 건국의 정당성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법통의 법은 누가 제정했다는 것인가.
그 법이 헌법이든 법률이든, 제정권자는 주권자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니 1919년 대한민국의 주권자는 도대체 누구였던가. ‘우리 민족’인가. 그러면 ‘우리 민족’의 시한적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단군왕검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인가. 주권의 영역이 미치는 영토의 범위로 치자면 저 만주 벌판을 넘어 중국의 황제 헌원(軒轅)과 싸워 이겼다는 환단고기의 천자 치우(蚩尤)의 동이족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지는 않겠는가.
대한민국은 1948년 한반도라는 지역(Community)에서 문화,역사 공동체로 무리지어 사는 사람들이 정치적 공동체(Polity)를 결성하는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뉜 후 자유민주에 찬동하는 이들의 만장일치로 수립된 공화제 국가다.
여기에 저항하지 않고 침묵했던 이들은 동의한 것으로 간주된다. 6·25 전쟁 기간에는 남북에서 각자 원하는 체제를 선택해 사람들이 오고 갔다.
전쟁 기간 중에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대한민국’으로 자유를 찾아 월남한 이들의 숫자는 약 100만 명에 이른 것으로 추산된다.
남에서 북으로 간 사람들도 있다. 진보와 좌파 학계, 단체들의 주장을 백번 양보해서 6·25전쟁을 통일전쟁이요, 내전이라고 한다면 이제 그러한 전쟁을 통해 대한민국과 북조선인민공화국은 현실적으로 서로 다른 국가가 된 것이다.
그러한 국가들 간에는 주권이 있고, 서로 다른 주권은 민족이라든지 동포라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북조선의 핵미사일은 남조선의 동포를 알아보는 눈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국제정치학적 관점에서 올바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현실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일찍이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국가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자 부득불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그의 <독립정신>에 썼다.
이승만의 주장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오늘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에 위협을 가하는 그 어떤 세력도 ‘대한민국의 적(敵)’이라는 점을 일러준다. 이 점에는 좌와 우에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건국 7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의 탄생과 질곡, 그리고 번영과 위기의 길들을 이 시점에서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
앞으로 문재인 정부하에서 국민들은 대한민국이 자꾸 지워지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은 단일하고 분할되지 않는 총화된 주권의 담지자이고, 시민은 자유롭고 평등한 정치 공동체의 참여자들이다.
따라서 단일한 주권하에 국민과 시민들은 서로 적이 아니지만, 국가에게는 언제나 적이 존재한다.
국가가 영원해야 한다면 주권도 영원해야 하고 따라서 적도 영원하다. 그러한 적의 존재를 잊는 국가는 항상 주권이 와해되려는 예외적 상황에 처하기 마련이고 내부로부터 붕괴되어 왔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보수주의자 이승만이 말한 ‘부득불하게 수립된 국가’를 수호해야 하는 의무를 갖게 된다.
동시에 자유주의자 토머스 제퍼슨이 말한 것처럼 국정 운영자들의 타락과 오류를 막기 위해 시민으로서 ‘영원한 감시’의 의무도 갖게 된다. 자유를 얻은 대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보수와 진보도 없거니와 좌와 우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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