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전규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위권 방어’
‘교전규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위권 방어’
  • 고성혁 군사전문저널리스트
  • 승인 2017.12.07 14:2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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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A 북한군 귀순병 구출 과정의 석연찮은 점 몇 가지

지난 11월 13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북한 병사가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순했다. 북한은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귀순병을 치료 중인 이국종 아주대 중증외상센터장은 “뒤에서 맞은 총알이 골반을 부수고 들어가 45도 각도로 위로 향하면서 소장을 으스러뜨리고 위쪽 복벽(배근육)에 박혔다며 쓰러진 상태에서 맞았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이국종 중증외상센터장의 발표는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북한 귀순병이 군사분계선을 넘어와서 쓰러진 상태인데 북한군이 조준 사격을 가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군은 그 어떤 대응사격도 하지 않았다.

▲ 북한 귀순병이 JSA까지 타고 온 지프.러시아가 원산인 UAZ-469 지프차.

판문점 JSA 귀순은 이번이 세 번째

일부에선 JSA에서 교전규칙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전규칙보다 더 상위의 개념은 ‘자위권 방어’다. 적의 총탄이 아군지역으로 넘어왔으면 응당 대응사격을 하는 것이 맞다. 혹자는 ‘아군을 향해 쏜 것이 아니고 북한군을 향해 쐈기 때문에...’ 라며 말을 흐리기도 한다.

그러나 다 이유가 부족하다. 이미 군사분계선을 넘어 아군지역으로 왔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북한군의 사격은 바로 아군에 대한 사격이다. 설사 아군에 대한 조준 사격이 아니라 하더라도 귀순 북한병사를 보호하기 위한 엄호사격이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군은 그 어떤 무력 대응도 하지 않았다. 달리 생각한다면 현재 문재인 정부의 대북 기조를 볼 때, 軍도 북을 향해 사격하는 것이 매우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 보인다.

북한인이 판문점 JSA에서 남쪽으로 귀순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첫 번째는 우리에게 ‘위장 귀순’으로 알려졌던 1967년 북한 조선중앙통신 부사장 이수근의 ‘판문점 기습 귀순’이다. 이수근은 차량을 이용해 기습적으로 귀순했다.

이 과정에서 남한과 북한 사이에 총격전이 발생했다. 명사수들만 배치되어 있는 판문점 북한 경비병이 이수근을 한 발도 못 맞혔다는 것을 당국에서는 수상히 여겼다.

두 번째는 1998년 2월 3일 북한군 장교 변용관 상위(한국군 중위)다. 변 씨는 당시 경비병 복장에 권총 1정을 소지한 채 귀순했다. 북한군은 아니지만 1984년 11월에는 소련 관광안내원 ‘바실리 야코블레비치 마투조크’가 갑작스럽게 망명해 이 과정에서 남북 경비병력 간에 총격전이 발생해 양측에 사망자가 발생했다.

당시 육군 카투사 장명기 상병이 사망했다. 소련 관광안내원까지 포함한다면 JSA를 통해 자유세계 품에 안긴 것은 네 번째다. JSA는 1988년 도끼만행사건을 계기로 사실상 공동경비구역(JSA)이 아니라 군사분계선으로 엄격히 분리 경비된다. 그렇기 때문에 1984년 소련 관광안내원 귀순 때도, 1998년 변용관 상위 귀순 때도 양측은 총격전을 벌였다. 그것도 북한군이 사격함과 동시에 아군도 응전했다.

유엔사는 사건 현장을 담은 CCTV 영상 공개를 한 차례 연기 끝에 지난 22일, 국방부 브리핑룸에서 6분 57초 분량의 CCTV 및 TOD(열상감시장비) 편집본 영상을 공개했다.

유엔사 채드 캐럴 대변인(미군 대령)은 이날 조사 결과 발표를 통해 “유엔사 특별조사단은 북한군이 군사분계선 너머로 총격을 가했다는 것과, 북한군 병사가 잠시나마 군사분계선을 넘었다는 것을 확인했고, 이는 두 차례의 유엔 정전협정 위반이라는 중요한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 JSA에서 수원 아주대병원까지 귀순병을 긴급 후송한 주한미군의 의무수송헬기

아직도 풀리지 않는 구출 과정의 의문점

북한군은 JSA 지역에 반입할 수 없는 자동소총을 들고 나온 것이 영상에 고스란히 잡혔다. 북한군 추격조 4명은 귀순자를 향해 권총과 AK 소총 40여 발을 난사했고, 귀순 병사는 다섯 군데 총상을 입었다. 나머지 총알 대부분은 군사분계선(MDL) 이남지역으로 넘어온 것으로 유엔사는 추정했다.

유엔군사령부는 27일 북한군 귀순 당시 현장을 국내외 언론에 공개했다. 귀순 병사가 쓰러진 바로 옆 ‘자유의집’ 부속 건물 환기통 전면에 3발, 측면에 1발 북한군이 쏜 총탄 자국은 선명하게 남았다. 향나무에도 총탄 자국이 있었다. 북한군이 쏜 40여 발의 총탄은 고스란히 아군 지역에 탄흔을 남겼다.

현재 JSA대대는 유엔사 소속이지만 한국군이 경비 임무를 전담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 주한미군의 10대 이양 임무 중에 JSA 경비도 포함되어 있다. 한국군에게 이양되기 전 1984년, 1998년 귀순사태 때는 양측에서 총격전이 있었던 것과는 비교된다.

특히 1984년 11월 23일 소련 여행안내원 바실리 야코블레비치 마투조크가 군사분계선(DMZ)을 넘어 망명을 시도했을 때 북한군  30명이 뒤쫓아 왔다. JSA대대는 경비중대 기동타격대를 투입해 북한 경비대와  약 30분간 총격전을 벌였다. 그 결과 JSA대원은 한 명이 죽고 두 명이 다쳤으며, 북한군은 3명이 죽고 5명이 다쳤다.

과거 전례와 비교해 보면 이번 JSA 귀순사건에 대한 우리 측 대응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많다. 먼저 귀순병이 탈출하면서 총상입고 아군에 구출될 때까지 시간별 행적을 되돌아보자.
 

▲ 총격에 쓰러진 북한 귀순병


총상을 입고 쓰러진 이후 40분 동안 JSA대대는 무엇을 했는가?
 
우리 군이 총격 소리를 들은 3시 15분부터 귀순병이 쓰러진 것을 인지한 3시 31분까지 16분 간 우리 군의 대응을 설명할 수 있는 영상도 공개되지 않아 의문을 남겼다.

공개된 영상을 토대로 보면 북한군이 최초 사격 이후 아군이 귀순병을 구출할 때까지는 무려 37분이 걸렸다. 이번 북한 귀순병은 총상을 입은 지 무려 2시간이 지나 수술을 받기 시작했다. 그 초인적 생명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귀순병은 분명 아군의 JSA 영내로 50여 미터 들어와서 쓰러졌다.

지인을 통해 2009년 JSA에서 전역한 사람과 어렵사리 통화했다.
“이번에 JSA대대에서 북한군 사격에 왜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을까요?”
“저도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원래 북한군이 사격하면 즉각 응사하도록 되어 있거든요”
 또 다른 전역자는 보다 구체적으로 답했다.
“판문점내 소대는 1-2분 내에 대응할 수 있도록 되어 있고, 판문점 외곽의 기동타격대 또한 3-5분 내에 반응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한 3번 초소 병력도 대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 가까운 2초소는 낮에 병력이 투입되는지 모르겠는데, 훨씬 더 가깝습니다. 그런데 부상자를 구출하는데 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저로서도 이해하기 힘듭니다”라고 답했다.

“혹시 JSA대대도 일반 한국군 부대처럼 총기에 시건 장치를 하는 건 아닌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JSA대대 병력은 권총에 실탄 장전하고 경계근무 서고 막사에도 총기대에 일반 부대처럼 시건 장치는 하지 않습니다.”

취재 과정에서 1984년 소련 관광안내원 야코블레비치 마투조크가 JSA 군사분계선을 넘어 왔을 때의 상세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1984년 소련인 귀순 당시의 기록에는 발포하며 추격하는 북측 병력에 대해 상황 발생과 동시에 즉각 남측 병력의 응사가 시작되었고, 15분 후에 판문점 기동타격대가 판문점에 진입해 북한 병사들을 제압하고 항복시키는 데 6분이 걸렸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동타격대는 판문점 경비중대 소속으로, 교대로 판문점 경비를 순환하므로, 판문점 내의 지형 지물에 대해 동일한 지식을 갖습니다.”

▲ 구글어스 지도로 살펴본 북한 귀순병의 탈출 루트. 귀순병이 총상을 입고 쓰러지고 북한군이 물러난 시각은 15시 17분인데 JSA대대의 구출 시각은 15시 55분이다. 구출까지의 시간 간격이 너무 크다.

 엄호 병력 없이 대대장이 직접 구출 나서?

JSA대대장이 귀순병 구출에 직접 뛰어 들었다는 것이 유엔사 동영상을 통해 확인되었다. ‘아이’ 같은 부하를 보낼 수 없어서 자신이 직접 뛰어들었다는 인터뷰도 있었다. 그러나 영관급 이상 예비역이나 군사전문가들의 견해는 좀 다르다. 과연 JSA대대장이 직접 뛰어 들어야 했는지 의문을 표했다.

만에 하나 구출 과정에서 대대장이 피격되면 JSA대대 지휘는 큰 혼란을 맞게 된다. 징집된 사병이 ‘아이’ 같아서 구출에 투입할 수 없었다는 대대장의 말을 십분 이해하더라도 대대장 밑에는 중대장과 소대장도 있다. 그런데 대대장이 부사관과 같이 낮은 포복으로 귀순병을 구출한 것은 마냥 칭송 받을 일인지 검토해봐야 한다.

구출 당시를 설명하는 JSA대대장은 ‘차마 아이들을 보낼 수는 없었다’고 답했다. 물론 자신의 부하를 ‘아이’처럼 아낀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작전에 투입해야 할 장병을 ‘아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경솔한 발언이다. 특히 JSA대대는 일반 부대와는 전혀 개념부터 다른 부대다. 자신의 부하를 ‘아이’라고 칭한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JSA대대장이 직접 낮은 포복으로 귀순병을 구출한 것은 JSA 전역자로서 볼 때 어떠냐는 질문에 그는 “ 지적하신 대로 이미 북측이 자동소총을 사용했으므로 이에 상응하는 자동소총으로 대응하는 것이 교전규칙에서 허용되는데, 지휘관을 포함한 단 세 명의 병력이 아무런 엄호와 엄폐 없이 구출을 시도한 것은 무모해 보였습니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오히려 대대장은 판문점 내에서 항상 부대원의 경호를 받아야 합니다. 경비중대장의 지휘 하에 교전규칙 안에서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병력과 무장 차량을 정전위 건물 남측으로 전개해 엄호와 엄폐를 만들고 구출을 시도했어야 합니다.

판문점 경비 병력은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서 상시 훈련을 하고 있어야 하므로 전투 병력의 전개와 구출작전은 훈련 그대로 시행했다면 훨씬 더 신속하고 안전한 대응이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지적했다.

물론 군은 ‘평소 무장인 권총 대신 K-2소총과 방탄복, 방탄헬멧을 갖추고 병력을 길목에 배치하는 한편 대대 병력의 증원을 명령했다. 전투 준비와 배치가 끝난 후 JSA대대장은 TOD(열영상장비)를 운용하면서 오후 3시 31분경 북한군 병사가 부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라고 해명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즉각 대응사격이 이뤄지지 못한 점은 해명되지 못한다. JSA대대장이 경호병력이나 엄호병력도 없이 직접 귀순병 구출에 뛰어든 것에 대해 JSA대대 전역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경솔했다고 말했다.

지난 23일 빈센트 브룩스 한미연합사령관은 쓰러진 북한 귀순병을 ‘포복 구조’를 통해 끌어내 이송한 JSA 한국 측 경비대대장인 권영환 중령, 송승현 상사(진), 노영수 중사 등 3명과 미측 대대장인 파머(Mattaw S. Farmer) 중령, 스미트(Jeffry Schmidt) 소령, 하트필드(Robert Hartfield) 병장을 포상했다.

JSA 북한군 귀순사건은 남북 할 것 없이 급작스럽게 발생한 ‘사건’이다. 이에 북한은 즉각 사격을 가했지만 아군은 응전을 못했다. 북한은 신속하게 소총까지 들고 나와 사격을 가했는데 우리는 왜 대응을 못했을까? JSA대대의 신속 대응력에 문제가 없는지 의구심은 더해간다.

 

“北 총구는 南 향하는데 文 정부의 총구는 정적을 향해 있다”  

조선일보도 11월 17일자 사설에서 ‘탈북 병사 쓰러진 뒤에도 총질, 통일 후 끝까지 단죄 선언을 해야 한다’면서 독일은 통일 후 동독을 탈출하는 민간인에게 사격을 가한 246명을 재판에 회부해 132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고 적시했다.

이종혁 자유한국당 최고위원은 이번 사태에 대해 문재인 정부를 강력하게 성토했다. 이 최고위원은 전화 인터뷰에서 “정전협정을 무시한 채 北의 총구는 남한으로 향하고 있으나, 문 정부의 총구는 북이 아닌 적폐청산 깃발 아래 전 정부의 안보 수장 등 ‘정적(政敵)’들에게 향하고 있는 서글픈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공식 발표하지 않고 있지만, 북한 귀순병에게 발포한 총탄이 군사분계선(MDL)인 판문점 JSA(공동경비구역) 뚫고 넘어온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군이 무대응으로 일관한 것은 ‘핵인질이 된 남한의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라고 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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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사람 2017-12-07 22:37:03
억지로 정치랑 엮지 마시고.. 전역자 한두명 연결해서 다 그렇게 생각하는것 마냥 일반화하지 마시고.. 2009년요? 소련인 망명? 이수근? 그때랑 피아 상황이 완전히 달랐어요. 현장에 한 번 와보셨나요? 글쓰시는 분들 현장을 도외시 하지 마시고 어설픈 지식으로 사람들 현혹시키지 마시죠. 저 역시 JSA 출신이고 최근까지 군 생활 했지만 위 글들은 전혀 공감이 안되네요. 당시 상황을 자세히 풀어놓을 수가 없어 답답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