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역할 회복해야
‘빛과 소금’역할 회복해야
  • 박종현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상임연구원
  • 승인 2017.10.10 14:5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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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흔히 종교개혁은 16세기 극심한 타락상을 보이던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항하여 마르틴 루터, 존 칼빈, 울리히 츠빙글리 등이 성서중심의 신앙과 고대교회 전통을 다시 세우려던 개혁운동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구교에 대항하여 신교가 출현했다는 종교사적 의미 외에도 중세시대의 중농주의 사회에서 근대 중상주의 사회로 이행이 이뤄지고 그에 따른 새로운 경제윤리가 출현하며 정치적으로도 독일 황제와 로마교회의 강력한 결탁 구조가 균열을 일으키고 개혁운동이 유럽 각국으로 확산됨에 따라 국민국가가 출현하며 국민국가가 근대로 이행하며 근대 민주주의 국가들이 출현하는 계기를 이뤘다고 보는 것이 이미 학계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마르틴 루터는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이중적 계층구조를 타파해 만인사제설을 주장했다. 루터를 뒤이어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이끈 칼빈은 자신의 교회 당회 구성원들과 제네바 시의회 참사회 회원들이 상업에 종사하는 계층이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맞는 경제윤리를 성서에서 끌어내 제시했다.

흔히 균형의 원리로 알려진 이 경제원칙은 중세로마교회가 자본 소득과 이자를 정죄해 금지한 것과는 달리 자본 사용료로서 이자를 허용하고 경제성장률에 근접한 이자율을 제시했던 것이다.

한국교회와 종교개혁 500주년

무엇보다도 칼빈은 축적된 부를 하나님의 자비의 목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해 경제행위의 자율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경제행위의 목적을 하나님의 뜻과 결부시켰던 것이다. 다시 두 세기 후에는 영국의 감리교운동을 이끈 존 웨슬리는 만인사제설을 더 발전시켜 직업소명설을 주장했다.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모든 노동 행위는 모두 신성하며 모두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신성한 의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경제사상은 근대의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그에 부가된 윤리를 통해 경제활동에서 기독교적 가치의 토대를 확립했다.

종교개혁은 유럽의 정치적 지형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루터는 황제권력과 가톨릭교회의 밀착 관계의 폐단을 인식하고 정교분리를 주장해 근대적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정립했다.

칼빈주의가 유럽에 확산되면서 교회와 시의회가 분리되어 그 역할 분담했고 또 영국에서 발생한 칼빈주의자들인 청교도들은 왕권을 강력하게 견제하는 세력으로 성장해 의회주의의 토대를 확립했을 뿐 아니라 청교도 혁명을 통해 영국 의회의 실질적 승리를 확립하고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근대 민주주의를 확립했다.

현대 정치에 일반화되어 있는 대의제도는 청교도 혁명으로 확립된 의회주의와 장로교회 제도를 통해 수립되었다. 신대륙 미국에서 19세기 중반 화려하게 꽃핀 직접적 대중민주주의는 원래 청교도 혁명의 회중제도에서 촉발되어 미국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고 세계 최대의 개신교회인 미국 침례교회제도로 나타났다.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단지 교회의 개혁을 넘어서 서구 사회가 근대로 전환하는 거대한 전환점을 제공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한 선교사와 함께 온 한국 근대화

한국교회는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들에서 파견한 선교사들의 활동을 통해 기독교가 뿌리를 내렸다. 미국을 위시해 캐나다와 호주 그리고 영국이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중요한 국가들이다.

1884년에 미국인 의료선교사 호레이스 알렌이 처음 내한해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은 조선에 개화 세력이 등장해 근대화를 지향하던 시기였다.

미국과 영국연방 국가들은 종교개혁의 전통을 수용해 온건한 근대 복음주의 기독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한국에 들어 온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구세군 그리고 성공회 등 다양한 교파는 근대 복음주의 신앙을 공유하고 있었고 이들의 선교 활동은 종교개혁의 전통에 따른 근대적 시민윤리와 민주주의와 기독교 휴머니즘을 전파하고 실천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뚜렷한 정교분리 원칙의 교회로 수립되었고 그와 더불어 근대적 민주주의와 경제윤리를 내재하여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정치, 경제, 교육 및 문화 등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한국의 근대화의 선두 주자로서 역할을 다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 기독교의 선교 과정은 서구의 500년 동안 종교개혁의 유산이 서구의 근대성에 기여한 과정을 압축적으로 재현했다.

한국이 일제의 침략에 놓인 시기에 기독교 선교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반일애국 교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외형적으로 한국교회의 민족주의적 성격은 일본의 지배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이라는 매우 지역적이고 특수한 성격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 민족주의의 실제적 내용은 종교개혁의 유산인 합리적 근대성의 가치가 차지하고 있다.

기독교 윤리의 비폭력적 성격으로 인해 한국의 기독교 민족운동은 무장투쟁은 적은 반면 온건한 애국계몽운동이나 실력양성운동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그 민족운동의 사상적 바탕에 종교개혁의 근대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기독교 민족운동은 을사늑약 전후로 조직된 상동청년학원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전덕기 목사가 주축이 된 이 단체는 항일의식 고취 및 헤이그밀사 사건에 관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일제의 압력에 상동청년학원이 해산된 후 1907년 전국적 규모의 기독교인이 주축이 된 애국계몽단체인 신민회가 조직되었다. 신민회는 비밀조직을 구성해 전국적 규모의 조직을 갖췄고 일제에서 해방된 나라가 민주주의와 근대적 경제 체계를 갖춘 나라가 될 것을 구상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일제는 가장 강력한 애국독립단체인 신민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데라우치 총독 알살 음모를 조작해 신민회 회원 중 105인이 실형을 받기도 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1919년 대한민족의 자랑인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비폭력 만세운동으로 시작된 이 독립만세 운동은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렸을 뿐 아니라 이 사건 직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해방의 그날까지 해외 망명정부로서 독립항쟁과 외교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기독교는 3.1 운동에 참여한 후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교회와 기독교 학교는 3·1 만세 운동의 진정한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었던 김구 김규식 이승만 등 다수가 기독교인이었음을 상기해 보면 한국의 근대화와 애국독립운동에서 기독교와 기독교인의 역할을 빼놓고 그 역사가 기술 불가능할 정도로 역할은 거대했다.

한국 기독교로 인해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은 것이 여성들이었다. 선교 초기 한국 여성들의 선교활동도 매우 돋보이는 역사적 변화의 하나였다. 그러나 여성들의 운명을 극적으로 바꾼 것은 여성교육의 실시였다. 공교육 체계를 통해 여성교육을 시도한 것은 한국에서 기독교가 처음이었다.

유교가 도입된 후 여성의 지위는 특별한 신분으로 전락했다. 전통 불교는 공교육 체제가 없었고 천주교 여성교육은 1930년대까지 한 개의 학교가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감리교 여선교사들과 장로교 선교사 부인들이 운영하는 여러 여학교를 설립했다.

기독교 선교기 동안 한국에는 최소한 각 도에 한 두 곳의 선교 스테이션이 있었고 거기에는 기독교 병원 혹은 진료소 그리고 남학교와 여학교 그리고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 기독교 여학교를  통해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에게 일반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다.

김마리아 김활란 등 헤아릴 수 없는 여성 지도자들이 기독교를 통해 배출되었다. 기독교 선교사들의 선교 스테이션은 한국 근대화의 초석이며 전초기지로서 기독교적 근대성이 구현되는 입체적인 구조물이었다.

다가오는 시대와 한국교회의 사명

기독교는 한국의 근대성에 가장 크게 기여한 종교이다. 비슷한 시기에 유교가 소멸 단계였고 불교는 근대성의 기여도가 크지 않았으며 한국 천주교회는 개신교보다 100년 먼저 선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개화기 근대화나 여성 근대화에 매우 소극적이었고 민족운동에도 개신교와 같은 활발한 모습을 거의 보여준 적이 없었다.

기독교는 전통적 유교 도덕이나 불교적 세계관과 확연하게 다른 세계관을 보여줬다. 실학 이후 유학도 근대성에 눈을 뜨긴 했으나 개화기 한국 사회를 재구성하는 데 그 한계를 나타냈다.

유학은 확실히 과거 지향적으로 보이게 활동했다. 불교는 조선시대 오랜 시간 은둔의 결과 근대성을 배태하지 못했다고 보인다. 개화기 천주교회 역시 나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근대성 확립에 크게 기여한 바가 많지 않다.

이는 종교개혁이 단지 구교로부터 신교로의 종교적 이행을 넘어서 성서의 깊은 이해를 통한 새로운 윤리체계의 수립과 이를 토대로 중세의 수직적 사회로부터 새로운 근대성의 출현이라는 사회의 대전환이 서구적인 것만이 아니라 한국의 근대사 속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한국 근대사에서 근대성의 출현에 기여하는 종교는 종교개혁적 종교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근대사회의 발전 과정은 전근대적 질서로부터 시민적 민주주의의 사회, 자유로운 시장경제사회로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국민국가의 시대는 20세기를 지나면서 지속 가능한 복지사회로 나아갔고 이러한 조류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한국 사회 안에는 아직도 잔존하는 전근대적 요소가 많이 있다. 미풍양속이란 이름으로 포장되어 한국 근대성의 발목을 잡는 구습이 여전히 많이 있다는 것이다. 지난 세기 동안 한국이 이룩한 것을 보존하고 한 걸음 더 도약하기 위한 준비와 노력이 더 요구되고 있다. 그 요구는 한국교회에 여전히 주어져 있다.

고대 로마가 붕괴되고 암흑시대를 거쳐 중세가 도래한 역사적 격변과 달리 종교개혁은 중세의 질서를 내부적으로 개혁해 근대적 질서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서 역사적 격변이 아닌 역사적 전환과 도약을 이뤄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종교개혁의 역사 변화의 모델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한국 사회의 변화와 한반도 통일에 요구되는 동력과 전망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예견된다.

그 이유는 종교개혁의 가장 근본적 정신과 종교개혁 사상가들이 가장 주목했던 것은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신앙의 바탕에는 역사의 주재자는 하나님이라는 신앙이 늘 전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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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maca 2017-10-11 05:23:06
세계사의 正史 개념으로 보면, 제자백가이후,漢나라때 국교로 성립된 유교는,이후 동아시아의 주요이념으로 세계종교화.한국은 수천년 유교국가임.http://blog.daum.net/macmaca/2313

진실 2017-10-10 19:18:01
인간이 하는 행위는 종교라는 이름이나 형식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거의 모두가 종교행위에 해당된다. 확인된 것만 믿는 것을 소위 과학이라고 말하고 확인되지 않은 것을 믿으면 종교에 해당된다. 그런데 과학을 포함해서 인간이 가진 지식은 많은 부분이 진실이 아니지만 오해나 세뇌를 통해서 얻어진 정보가 점점 진실처럼 믿겨지면서 일종의 신앙이 만들어진다. 중력과 전자기력을 하나로 융합한 통일장이론으로 우주와 생명을 새롭게 설명하는 책(제목; 과학의 재발견)이 나왔는데 노벨 물리학상 후보에 오른 유명한 과학자들도 이 책에 반론을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