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式 정치, “공동의 적과 분노의 동원”
문재인式 정치, “공동의 적과 분노의 동원”
  • 미래한국
  • 승인 2017.09.06 11: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재인 정부의 이른바 적폐청산 작업이 한창이다. 한쪽에선 구악을 정리하는 혁신으로, 다른 한쪽에선 체제 전복의 전조쯤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문재인 정부 100일을 넘긴 오늘의 대한민국호는 어디쯤 항해하고 있는가? 한국자유회의와 대한언론인회가 공동 주최한 3차 대국민토론회에서 발제한 성신여대 서명구 박사(정치외교학)의 발제글을 싣는다. <편집자 주>

지난 8월 19일, 문재인 정부 출범 100일을 맞았다. 취임준비위 기간을 거치지 못한 데 이어 북핵·미사일사태로 여전히 어수선한 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정부 진용도 얼추 갖춰졌고 특히 지난달 19일에는 <문재인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이하 계획)>까지 발표되었다.

비록 문 정부가 70%대에 이르는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여소야대 국회의 한계를 안고 있다는 점, 또 자신의 기대와 달리 급박한 안보 현실로 운신의 폭이 상당 부분 제약된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를 완전히 드러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없지 않지만 국정의 기본 방향은 대체적으로 드러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스스로 존재의 근거를 촛불에서 찾고 있고, 통치의 정당성도 여기에서 끌어내고 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취임사에서 “공직자들은 촛불혁명의 명령을 받드는 국정과제의 도구들”이라고 언명하였고, <계획>에서도 문 정부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이후 9년 만에 ‘촛불시민혁명’으로 집권한 ‘제3기 민주정부’로 자기규정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 정부가 생각하는 촛불의 명령, 민주정부, 나아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러한 주장의 근거는 무엇이며, 그것이 갖고 있는 정치적 의미는 무엇일까? 특히 그것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그리고 오늘날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유일한 대안으로 간주되고 있는 근대 자유민주주의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가?

▲ 문재인 대통령이 30일 오전 청와대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관련해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 연합

민주주의의 역류와 주권자 민주주의

민주화 30년을 맞은 오늘의 시점에서 한국 민주주의를 돌이켜보면 그동안 적지 않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늘지고 부정적인 측면이 점점 심화되어 왔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래리 다이아몬드(Larry Diamond) 교수는 지구적 차원에서 2006년을 기점으로 ‘민주주의 역류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특히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포퓰리즘, 반법치, 반엘리트주의 등을 지적했다. 한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는 2008년 수입쇠고기 관련 촛불사태에서 이러한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국내 전문가들도 이 점에서 비슷한 시각이다. ‘질 나쁜 민주주의’, 독재와 안정된 민주주의 사이의 ‘폭넓은 중간지대론’, 나아가 ‘민주주의 후퇴론’까지 대두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물론 이러한 논의에는 정략적, 이념적 의도가 크게 작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 주의를 요한다. 그러나 크게 보아 포퓰리즘과 반법치는 공통으로 지적되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한국 정치에서 나타난 포퓰리즘과 반법치의 구체적 특성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의 경우에는 “권위주의 해체 과정이 안티테제를 급진화하고 동원하는 과정이었다”는 지적이다.(최장집·박찬표·박상훈·서복경·박수형 지음. <논쟁으로서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13, 174쪽) 즉 도덕적 열정 및 혁명적 이상주의에 바탕을 둔 해방된 공동체를 강조하면서, 특히 낭만주의적 민족관과 공동체적 집단주의의 특성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계획>에서 나타나는 ‘국민중심의 민주주의’, ‘주권자 민주주의’는 바로 그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계획>은 2016년 촛불시민혁명으로 “국민이 더 이상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이자 정치의 실질적 주체로 등장하는 국민의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시대에는 국민이 “나 스스로 나를 대표하는 정치”를 하는 ‘국민 중심의 민주주의’가 실시된다고 한다.

여기서 핵심 개념은 ‘새로운 국민’으로서, <계획>은 이를 ‘근대적 국민’과 대비하여 설명하고 있다. 근대적 국민은 국가를 구성하는 집합적 존재로서 그 주권은 대표에게 위임되는 데 반해, 새로운 국민은 개개인이 권력의 생성과 과정에 직접 참여·결정하는 존재, 즉 개개인이 국민 주권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국민은 선거나 대표자 위임에 국한되지 않고, ‘아래로부터’, ‘직접’, ‘일상의’, 공론과 합의라는 ‘과정의’, 자치분권과 생활정치의 ‘풀뿌리’로부터 주권을 행사하는 등 ‘주권자 민주주의’를 구현한다고 한다. 물론 대의 민주주의를 전적으로 부정한다고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이를 ‘뛰어넘어 국민 개개인이 모두 주권자로서 자기 스스로 주권을 어디에서나, 늘 행사하는 것을 지향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정치권의 합의, 정부와의 협치, 국민제안, 국민숙의, 국민결정과 같은 공론과 합의의 과정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가 일상적으로 주권을 행사하는 것, 특히 시민사회와 연계하여 ‘2016 촛불’과 같은 자발적 개인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이뤄진다고 밝히고 있다.

<계획>은 이러한 ‘주권자 민주주의’의 기치 하에 국가 비전으로 ‘국민의 나라,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표방하고, 5대 국정목표로 ‘국민이 주인인 정부’, ‘더불어 잘사는 경제’,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 ‘고르게 발전하는 지역’,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를 제시하고 있다.

문 정부가 지향하는 이러한 ‘주권자 민주주의’는 그러나 대한민국과 오늘날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채택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내지는 대의민주주의와 원리적으로 상당 부분 충돌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원래 근대성(modernity) 즉 근대적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한 정치체제로서, 산업사회를 정상적으로 작동시키는 데 있어 현재까지 다른 대안을 찾기 어려운 유일한 선택지이다. 그런데 주권자 민주주의는 이러한 근대성 자체에 무지하거나, 혹은 오해 내지는 몰이해를 하고 있거나 혹은 이를 성급하게 극복하려고 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 ‘문재인 정부 100일 대한민국 어디로 가나’라는 주제로 ‘한국자유회의 제3차 대국민 토론회’가 지난 8월 21일 서울 중구 태평로1가에 있는 프레스센터 20층에서 열렸다.

자유민주주의, 대의민주주의와 충돌하는 주권자 민주주의

첫째는 근대성에 대한 무지 부분이다. 무엇보다 디지털 기술로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은 대의민주주의의 원리 자체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대 아테네를 비롯한 도시국가는 규모 면에서 작았을 뿐만 아니라 매우 단순하고 유기체적 사회로서 공동체에의 참여 자체를 지상의 가치로 여겼던 데 반해, 근대 사회는 고대나 중세와는 달리 개인을 토대로 한, 그리고 매우 분화된 다원 사회와 갈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부 논자들은 현대 IT기술을 통해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직접민주주의를 실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재성·정은주·노현웅·박유리 지음 <다시 민주주의>, 한겨레출판, 2017, 250쪽) 문제는 지리적·공간적 한계의 극복이 아닌 것이다.
둘째는 근대성에 대한 오해 내지는 몰이해 부분이다.

정치적 차원에서의 근대성의 요체는 평등, 자유, 시민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신분제도가 붕괴되면서 나타난 ‘제조건의 평등’은 근대사회의 고유한 특성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평등을 유일한 가치로 떠받드는 평등 지상주의를 앞세워 국가와 정치의 기능을 ‘파이 나누기’ 즉 경제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EBS 다큐프라임 ‘민주주의’ 제작팀, 유규오 지음,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16) <계획>에서도 ‘정의’의 명분으로 ‘차별과 격차’ 해소를 앞세우면서, 경제 주체를 국민 개개인과 가계 중심에 놓겠다고 주장하면서 국가가 개인에 전방위적으로 개입하는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를 강조하고 있다. 근대사회에서의 자유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기본권과 시민의 참정권을 보장하는 ‘정치적 자유다’다. 문제는 이를 경제적 자유로 곡해, 평등의 이름으로 자유 자체를 희생시키려 하는 것이다.

시민의 개념에도 문제가 있다. 흔히 ‘깨어 있는 시민’ 혹은 ‘적극적 시민’을 강조하고 있지만, 문제는 정치 참여와 권리를 강조할 뿐 권리는 완전히 실종된 상황이며, <계획>에서도 이 부분은 찾을 수 없다. 의무와 덕성이 탈락된 존재는 한마디로 민중, 특히 저항적 민중에 다름 아니다. 아무리 사회적 약자의 권익 조직화 그리고 이를 위한 직접민주주의를 표방하더라도 그들의 존재는 민중에 다름 아니다. 근대국가의 정당성 원리인 ‘인민주권론’도 크게 곡해되고 있다.

그것은 루소(J.J. Rousseau)로부터 연원하는 것으로서 원래 이는 왕국에서 공화국으로 전환되면서, 주권자로서의 왕이 사라진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한 장치로 설정된 것이다. 문제는 정치적으로 인민주권을 바로 현실 속에서 구현하려는 데서 발생한다.

로베스피에르 (Robespierre)를 비롯한 자코뱅(Jacobi)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지만, <계획> 또한 “국민 개개인이 주권자”라고 강조하면서 이들의 주권이 바로 구현되는 ‘아래로부터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자율성을 가진 중간집단의 매개 없이 분자화된 개인들 위에 국가가 들어서는 것, 그것이 바로 전체주의인 것이다. 아무리 국민 개개인이 주권자라고 강조하면서 인민주권을 표방하는 순수한 다수의 결정을 내리더라도, 그것이 헌정적 제약이나 공적인 논의 과정이 무시된 채 폐쇄 회로에서 만들어져 다수의 힘에만 의지해 시행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는 아니다.(최장집, 같은 책, 165쪽)

셋째는 근대성의 성급하고 무모한 극복이다. <계획>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 일상의 민주주의, 일상적 국민주권행사, 자발적 개인들의 네트워크, 물질주의 극복 등 소위 포스트 모더니즘적 담론에 기초한 직접민주주의다. (손호철,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박정희, 87년, 97년 체제를 넘어서>, 서강대학교출판부, 2017, 83~86쪽) 이중 물질주의 극복은 일찍부터 ‘사람이 먼저다’와 같은 구호로 나타났지만, 문제는 이것이 상정하고 있는 ‘사람’ 혹은 ‘자율적 시민’에 있다.

현실에서 존재하는 것은 민중, 혹은 전근대적 가치를 벗어나지 못한 종족적 민족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근대의 극복 내지는 뛰어넘기를 표방하고 있으나, 기실은 근대성 자체도 제대로 획득하지 못한 채 성급하고 무모하게 탈근대적 가치로 포장한 근대에 대한 안티제제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계획>은 구체적인 100대 국정과제의 첫 머리에 ‘적폐청산’을 올려놓고 있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사안별로 바로잡으면 되는 것인데 불구하고, 애매모호하고 자극적인 ‘국정농단’이라는 용어를 사용, 전 부처에 국정과제라고 ‘명령’을 내리고 또 국민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초법적 하이퍼 대통령제(hyper presidentialism)가 우려되는 대목이다.

‘적폐 청산’에 드리운 전체주의
 
이러한 방식은 부메랑이 되어 문 정부에 대한 불신과 혐오로 이어질 수 있지만,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여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절대적 기준을 적용하는 이러한 방식이야말로 전형적인 도덕정치(moral politics)의 위험성을 예고하고 있다. 이는 ‘민주 대 반민주’의 낡은 진영 논리를 토대로 정치를 선악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일종의 근본주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최장집, 같은 책, 100쪽) 이러한 적폐청산은 당연히 ‘대상의 상정’을, 그리고 청산 주체인 권력의 정당성과 청산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지속적인 ‘분노의 동원’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적의 존재는 시간도 넘나든다. 과거사 문제가 등장하는 소이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절대적인 적을 대상으로 한 적폐청산이 지향하는 궁극적 지점은 어디일까? <계획>은 ‘국민 눈높이에 맞는 과거사 문제 해결’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국민 눈높이’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계획>은 이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다. 따라서 ‘국민 눈높이’를 이끌고 또 규정할 수 있는 이른바 진보진영의 대표적 논객들의 담론을 중심으로 유추해 볼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을 ‘반민족적, 분단, 결손국가’로 보는 시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근거로 가장 중요한 것이 민족이다. 문제는 그것이 근대적 민족이 아니라 종족적, 폐쇄적, 수구적, 저항적 민족이라는 데 있으며, 이러한 민족을 토대로 한 도덕적 합의에 의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는 비현실적 발상을 하고 있는 데 있다.

과거를 ‘박탈의 역사’로, 미래를 ‘약속의 역사’로 상정, 지난 역사를 파행과 왜곡의 역사로 이해하는 변혁적 역사관 즉 혁명적 민족주의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최장집, 같은 책, 159쪽) 따라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반민족적 기득권 세력의 청산이라는 이름하에 전면적으로 부정된다. 특히 대한민국을 세운 이승만 대통령과 경제적으로 이를 일으켜 세운 박정희 대통령이야말로, 르상티망(ressentiment)의 일차적 대상이 되고 있다. 나아가 현실로서의 대한민국은 기득권 세력의 탐욕으로 부패하여 양극화된 사회, ‘헬조선’으로 저주의 대상화된다.

대한민국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은 그나마 약화된 국가의 보호 장치와 제도를 무력화시키려는 기도로 이어진다. 국가보안법은 이미 실질적으로 사문화된 상황이므로 구태여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지 모른다. 상징적 차원에서 이를 폐지할 것인지, 아니면 급진성을 희석시키기 위해 잔존시키는 것이 오히려 이득이 될지를 저울질 하는 단계로 보인다.

법원에 의해 이적성을 판결 받은 단체들에 대해 해산할 수 있는 법률도 제정되지 못한 상황에서, 어떤 국가기구도 체제전복세력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수호하기는 이미 역부족인 상황이다. 최근 군 고위 장성의 ‘갑질 논란’을 통해 군 자체에 대한 불신이 증폭되는 것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개헌 문제다. <계획>은 ‘국민주권적 개헌’으로 얼버무리고 있지만, 많은 논객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직접민주주의 방식을 택하는 방식 즉 개헌이 아니라 광장을 제헌의회로 발전시켜야 하며 이를 통해 결국 ‘새로운 공화국의 구성’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래리 다이아몬드의 지적처럼 현재 세계적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은 포퓰리즘과 법치의 실종이다. 불행히도 한국도 예외는 아니며,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촛불’이다. 이미 한국은 ‘촛불의 명령’에 따른 국정운영의 단계에 들어서 있다. 원래 촛불은 인간의 내면 혹은 존재 자체를 밝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많은 종교가 각종 의식에서 촛불을 켜는 것이고,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촛불을 인간과 우주의 비의에 접근하는 통로로 보고 미학을 전개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러한 촛불을 인간의 내면에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 정치를 향해 다시 말해 ‘적대적 타자’를 향해 드는 행위이다.

이러한 촛불은 ‘위장된 횃불’에 다름 아니다. (김지하, <촛불 횃불 숯불>, 이룸, 2009.) ‘촛불 명령을 받았다고 자임하는 문 정부는, 우발적인 촛불 군중 아니 고도로 사전에 계획되고 조직화된 촛불 대중을 놓고 ‘새로운 국민’으로 호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 주도세력들이 불순, 불만세력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송호근, <촛불의 시간: 군주, 국가의 시간에서 시민의 시간으로>, 북극성, 2017, 85쪽)은 새삼 지적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 광장의 큰 틀을 좌우하는 것은 조직화된 사회단체들, 특히 실무 운영자들이라는 것이 촛불 집회에 참가하고 이를 적극 합리화한 학자의 솔직한 고백이다. (손호철, 같은 책, 83쪽 및 116쪽) 이들이 금과옥조로 떠받들고 있는 시민사회라는 것도 상당 부분 과장된 면이 강하다.

시민사회라는 것도 기실은 시민단체에 다름 아니며, 상당 부분이 자파 집권에 의해 의존하여 물질적 토대를 마련한데다가 권력 헤게모니에 의존하는 기생적 민중단체의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다는 진단이다.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러한 군중, 대중 혹은 민중에게 ‘새로운 국민’이라는 포스트 모던식 개념을 적용하여, 이를 기반으로 근대국가의 민주정치체제 나아가 근대성 자체를 뛰어넘는 ‘국민 중심의 민주주의’, ‘주권자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고 나서는 데 있다.

이러한 근대성의 왜곡은 일종의 최대주의적 민주주의관 즉 해방의 철학 혹은 변혁의 정치학으로 지칭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정치적 권위와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누구에 의해서도 대표되지 않는 직접적 인민주권을 실현하고, 자본주의가 아닌 새로운 생산체제의 건설을 지향하는 등 그야말로 완전히 새로운 어떤 공동체를 추구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위의 책, 104쪽)

그러나 이는 결국 근대 민주주의 혹은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침식·약화시키고, 원자화된 개인 위에 일원적 지배를 하는 국가가 들어서는, 다시 말해 전체주의를 초래할 위험성이 농후한 것이다.

▲ 성신여대 강사 / 전 대통령정책조사비서관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