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나의 아버지
존경하는 나의 아버지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8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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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호 아들 · AT Kearney 파트너
아버지의 거의 유일한 낙이자 휴식은 가족과 함께 여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유치원, 초등학교 때부터 땅끝마을, 속리산, 제주도, 강원도 산과 바다… 전국을 다 돌아다녔습니다.
 
어려서는 아버지와의 여행이 마냥 좋고 설레기만 했었고, 사춘기를 넘어서면서 좀 시들해졌지만 대학교 이후에 또 다른 면으로 여행이 즐거워졌습니다. 아버지와의 대화 때문이었죠. 그 이전의 대화가 주로 아버지에게 얘기를 듣는 것이었다면 이후, 특히 20대 중반 이후부터는 많은 이야기를 ‘함께’ 나누게 됐습니다.
 
많은 여행 중 기억이 나는 것은 제가 미국에 공부하러 가기 직전인 2004년 여름에 부모님, 동생과 함께 했던 유럽 여행입니다. 오랜 기간 떨어져 있게 되기도 하고 오랜만의 여행이라서, 참 많은 이야기를 아버지와 나눴습니다.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부터 아버지가 하시는 일, 제가 이후에 할 일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돌아다닐 때나 밥 먹을 때 항상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는 제 부족한 얘기를 참 잘 들어주셨습니다. 그게 저에겐 아버지와 더 가까워지는 기회가 되기도 했고, 아름다운 풍경의 잔상과 겹쳐서 큰 추억으로 남게 됐습니다. 또한 이후 제가 유학 중 오셔서 짧은 기간이나마 미국 여행을 할 때에도 여행 자체에 대한 기억보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 기억이 훨씬 큽니다. 예전에는 참 여행을 많이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더 가지 못한 게 아쉽기만 합니다.
 
아버지는 여행을 통해서, 대화를 통해서, 살아가시는 모습을 통해서 제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고 저도 쌍둥이의 아빠가 되고 나니, 아버지처럼 살아간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이런 아버지가 계셨다는 건 다른 이가 갖지 못한 엄청난 축복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아버지가 옆에 안 계시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아버지가 제게 주고 가신 정말 많은 것들 중에 몇 가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아버지 김상철, 그가 남긴 ‘위대한 유산’
 
아버지는 제게 깊이 사고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생각을 바로 하고 세상을 이해하려면 신문을 많이 읽어라, 사설은 꼭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매일 신문을 읽는 습관을 가지게 됐습니다. 가끔씩 아버지가 시간이 나시거나 제가 궁금한 게 있을 때 신문에 나온 내용을 아버지와 함께 얘기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재수생이던 1993년 12월 무렵입니다. 당시는 쌀 개방이 큰 이슈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어느 날 저녁에 특별한 이유 없이 쌀 개방에 대한 반대 기사로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게 됐습니다. 이 대화가 개방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까지 이어졌고, 대안이 무엇일지를 같이 고민했습니다. 한 30분 정도 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을 텐데, 그 때 아버지, 어머니와 제가 열심히 얘기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며칠 후 저는 대학 입학 본고사를 보게 됐습니다. 그런데, 논술문제로 ‘양비론, 양시론, 흑백론을 극복하는 대안을 제시하라’는 주제가 나왔습니다. 제목을 보는 순간 며칠 전 아버지와의 대화를 주제로 쓰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제 머릿속에는 전체 내용의 얼개가 바로 잡히게 됐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주제가 어려웠다는 얘기가 많았었는데 저는 참 편안히 하고 싶은 얘기를 모두 넣어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가족을 포함한 다양한 사람과 격의 없이 함께 즐기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어려서 아버지가 집에 계신 날이면 항상 저와 동생을 데리고 마당일과 집안일을 너무나 즐겁게 하셨습니다. 제가 훈련소에 갈 때도 같이 가셔서 배웅해 주신 기억도 나고 제가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 올 때도 그 친구들과 함께 얘기하시길 좋아하셨습니다. 한번은 대학 때의 크리스마스에 여러 친구들이 집에 온 적이 있었는데 퇴근하고 오신 아버지가 ‘루돌프사슴코’를 함께 부르자고 하셔서 당황스럽지만 재미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는 인생의 새로운 도전에 대해 언제나 긍정적이셨습니다. 제가 건설회사에 다닐 당시 회사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갈 지원자를 뽑고 있었습니다. 저는 한번 도전해 볼 생각이었는데 위험하고 멀리 떨어지는 것이라 부모님은 반대하실 것을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아버지는 너무나 좋은 기회라고 하시면서 사우디 행을 적극 지지해 주셨습니다.
 
가면 여러 가지가 힘들지는 몰라도 나중에 꼭 의미가 있는 경험일 것이고 헤어지는 건 아쉽지만 휴가 때 더 기쁘게 보면 된다고 하시면서.
 
이후 제가 MBA 공부를 위해 준비하려고 한다고 말씀 드렸을 때도, 과정은 힘들어도 그 이상의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지지해 주신 일 중에 아직 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유학 당시부터 최근까지 함께 얘기하면서, 제 경험을 기반으로 나중에 한국이 통일되면 북한 재건에 도움을 주자는 비전을 주셨고, 이를 함께 고민했었습니다. 아직까지는 이를 가슴 깊이 새기고만 있지만 나중에는 꼭 실행하려고 합니다.
 
아버지는 끊임없는 추진력의 소유자이셨습니다. 자랑스러우면서도 가족으로서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던 점입니다. 미국 유학 중에 짧게 방문하셨을 때 저는 “너무 몸 생각을 하지 않고 많은 일을 하시니 여기서는 좀 쉬었다 가세요” 라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버지께서 새벽 기도를 끝내고 나서 “자유지식인 선언!”이라는 말을 외치셨습니다. 아버지에게 새로운 하실 일이 생긴 것이었죠.
 
계신 동안 큰 골격을 짜시고, 한국에 돌아오셔서 바로 자유지식인선언을 만드셨습니다. 기존에 하시던 많은 일에 하나의 일이 더 생겼고, 아버지는 이후 더 바빠지셨을 겁니다. 이러한 추진력, 새로운 아이디어 중에 아버지나 우리 가족을 직접 위한 것은 하나도 없었고 모두 대의를, 나라를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열정과 추진력이 없으셨다면 그렇게 많은 일을 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저의 입장에서는 물론 자랑스러움이 매우 크지만 한 구석에 조금은 아쉬움이 남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항상 기도하는 분이셨습니다. 중요한 일, 좋은 일, 기쁜 일, 힘든 일 등 많은 경우에 언제나 기도로 준비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개인적인 일로는 제가 고3 때 학력고사와 재수 때 수능과 본고사, 물론 동생의 수능과 본고사까지 모든 중요한 시험 날이면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그날 시험 보는 시간 내내, 집에 오실 시간이 안 되면 사무실에서 시간표에 맞춰 기도를 하셨습니다. 하루 종일 있는 시험 시간에는 기도하시고, 중간 휴식 시간에 함께 쉬시는 식으로. 아버지의 그러한 기도가 시험장에 있는 제게는 항상 큰 힘이 됐고 그래서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일찍 떠나실 줄은 몰랐기에…
 
지금 제일 아쉬운 것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에 동참할 기회가 많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탈북난민보호 서명운동을 할 때 시간이 되는 주말에 가끔 아버지와 같이 거리에서 서명 받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이렇게 일찍 우리 곁을 떠나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아직은 그럴 여건이 안 되지만 언젠가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 특히 북한과 관계되는 일에 제가 같이 할 일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조금 위안을 삼는 것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들에 직접 참여는 못해도 아버지와의 대화중에 제 의견을 말씀드릴 때가 많았는데 아버지는 항상 열심히 들으시고 “역시 컨설턴트의 의견은 탁월해” 하시면서 항상 반영하시려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어떻게 할 수는 없었지만 생각만하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중3때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이 아버지를 찾아와 아버지를 잘 알고 존경한다고 하면서 육성회장을 맡아 달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적합하지 않은 자리인 것 같아 여러 번 사양하셨지만 결국에는 하게 되셨습니다.
 
그 후 어느 날 아버지 지인께서 전교조 본부와도 같은 모 고등학교 선생님과 함께 찾아오셨답니다. 전교조의 실체를 알려서 더 커지지 않게 막아달라고 하시는 그 선생님의 손에는 전교조 1급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두툼한 파일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걸 읽어보신 아버지는 당신이 육성회장이 되신 것이 우연이 아니겠구나, 전교조가 어떤 단체인지, 참교육이라는 포장 안에는 얼마나 위험한 사상이 있으며 어디와 연결돼 있는지 알려야겠구나 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행동하셨습니다. 아버지는 혼자서 그 거대한 세력과 싸웠습니다. 전국을 다니며 초중고 교감, 교장 선생님들과 전교조를 알아야 하는 거의 모든 이들에게 강연하셨다고 합니다. 또 같은 시기였던 것 같은데 시국 강연도 많이 다니셨던 기억이 납니다. 전국의 영관급 장교들, 고위 공무원 대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 3년을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러던 중 특히 중3 때는 저희 학교 내 전교조 선생님들에게 시달림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저도 많이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이후 서울시장 일로 저희 가족이 너무나 괴로운 일을 겪고 난 후 아버지가 얘기하셨던 것이 생각납니다. “아무 근거도 없이 공격을 했던 세력 중에는 전교조가 제일 컸을 것이다, 그들의 실체를 직접 드러냈으니 그렇게 나왔을 것이다”라고. 결과적으로는 너무나 옳은 일을 하셨지만, 그 일을 하기 위해 감당하셔야 했던, 희생하셔야 했던 것이 지나치게 컸다는 것이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아버지가 그때나 지금이나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어렸을 때 저에게 아버지는 자랑스럽고, 재미있고, 배우고 싶은 게 많아 제가 항상 졸졸 따라다니는 분이었습니다. 커서도 아버지는 제게 한편으로는 대화 상대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생의 관점에서 따라가야 할 분이셨습니다. 제게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저는 우리 아버지라고 말해왔습니다. 아버지, 제 아버지가 돼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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